'가짜 명단'이 살생부로... 거짓말이 낳은 대학살

[박만순의 기억전쟁] 충북 음성군 대소면 민간인 학살사건

등록 2018.07.12 17:38수정 2018.07.1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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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빨갱이 새끼 당장 죽여 버리겠어!"

6사단 헌병대 일등상사 박정보는 김○○ 구대장에게 눈을 부라리며 권총을 들이댔다. 김  구대장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커다란 눈망울만 좌우로 굴렸다. 잠시 후 그는 "정말 억울합니다, 저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빨갱이가 아니라 애국잡니다"라며 박정보의 군화를 붙잡고 엉엉 울며 하소연했다.

하지만 박정보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야 이 새끼야, 너희 양조장 창고에서 인공기(북한 국기)랑 플래카드가 이렇게 나왔는데도 발뺌이냐?"라며 인공기를 김○○ 구대장의 눈앞에 들이댔다. "아닙니다. 그건 제 것이 아니고요. 빨갱이들이 민청(民靑) 사무실로 쓰면서 썼던 겁니다" 자기는 빨갱이들과 싸운 애국자라고 주장했으나, 김 구대장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 구대장(당시 39세)은 국민방위군 중위로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방위군 책임자였다. 그의 직책은 구대장(區隊長)으로 산하에 5명의 중대장(방위군 소위)이 있었다. 즉 대한청년단 활동을 하다가, 온양 방위사관학교를 수료하고, 대소면 국민방위군 책임자로 활동한 것이다. 그런 그에게 국군 헌병대가 빨갱이라며 총살을 집행하려니, 김 구대장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양조장 창고를 북한군이 민청사무실로 사용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자 그는 폭탄발언을 했다. "대장님, 사실은 제가 인공 때 부역했던 빨갱이 200명을 처형하기 위해 명단을 작성했습니다"라며 명부를 제출했다. 동시에 자신의 부하인 김○○, 민○○ 선임하사에게 다음날인 1951년 1월 6일 오전 10시까지 부역자들을 잡아들이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북한군 점령시절 부역했다가 국군 수복 후에 자수한 200명의 대소면민들이 대소국민학교 교실로 붙잡혀왔다. 대소 주민들이 대거 검거된 시간 김 구대장은 오해(?)를 벗고 헌병대로부터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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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자명부대소국민학교 앞개울에서 처형된 이들의 명부. 진실화해위 조사과정에서 발견됐다. ⓒ 진실화해위원회



중공군의 참전으로 서울시민을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2차 피난을 준비했다. 국군들 역시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6사단 헌병대와 제6사단 19연대 1대대는 음성군 오산면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들은 대소지서를 사무실로 사용하게 되었고, 경찰들은 국민방위군 사무실로 근무지를 이동하게 되었다.

김 구대장의 제보를 받은 6사단 헌병대는 방위군과 대소지서 경찰들에게 부역자들을 전부 체포해 올 것을 명령했다. 당시는 계엄 상황이라 경찰은 군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방위군 역시 육군에 속해 있었기에, 경찰들이 방위군 눈치를 보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방위군과 대소지서에 비치되어 있던 부역자명부를 갖고 부역자 200명을 잡아들였다. 정확히는 '부역자'가 아니라 '부역자수자'였다. 즉 북한군 점령시절에 인민군의 심부름을 하거나 직책을 맡아 활동한 이들이 대한민국에 자수를 한 것이다.

자수자들은 경찰의 심사를 받아 갑·을·병·정으로 분류되어, 모두 훈방처리 되었다. 대소면에서는 자수자가 총 205명이었는데, 전국적으로는 39만 7050명이었다. 부역 자수자 200명은 갑·을·병으로 분류됐다. 을에 해당되는 이들은 재심사에서 갑과 병으로 다시 나뉘었는데 갑은 처형이고, 병은 훈방이었다.

갑에 속한 이들을 처형한다는 소식을 들은 대소지서 순경 신현갑은 대소국민학교로 뛰어갔다. 교실 2개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는데, 국민방위군 감찰이 M1총을 메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신현갑은 그의 귀싸대기를 때리며, "왜 죄 없는 사람들을 저렇게 모아두었느냐, 저렇게 모아 놓으면 죽을 수도 있지 않느냐"며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교실에 들어가자 육군 대위가 있었다.

신현갑은 다시 육군 대위에게 항의했다. "왜 죄 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모아 놨습니까? 진짜 빨갱이들은 이미 다 도망갔습니다." 죄 없는 주민들을 살리기 위한 신현갑의 목숨을 건 구명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신현갑의 주장은 즉시 묵살당했고, 그는 정규 군인들에게 집단 뭇매를 당했다(참고 :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보고서』중 <음성군 대소면 부역혐의자 희생사건>)

갑으로 분류된 부역 자수자들은 손이 뒤로 묶인 채 대소국민학교 앞 개울가로 끌려갔다. 이들은 개울을 향해 일렬로 세워졌다. 군인 20명 정도가 일열 횡대로 서서 사격자세를 취했다. 잠시 후 "탕 탕 탕"소리가 찬 공기를 갈라놓았다. 총에 맞은 이들은 검붉은 피를 흘리며 개울로 머리를 쳐 박았다. 길지 않은 시간에 총살은 마무리되었고, 일부 사람들은 대소중학교 인근에서 총살당했다. 진실화해위 조사에 따르면, 이날 죽은 이들이 최소 59명이다.

집단학살이 이루어진 후 시신수습은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주민들이 겨울피난을 간 상태이기도 했고, 군인·경찰·방위군이 공동으로 학살한 시신을 수습할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이다. 당시는 빨갱이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못한 상황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당시 열세 살이었던 유해운(81세·대소면 삼호리)은 아버지 유영수가 대소국민학교 앞개울에서 학살당하던 날 피난 짐을 쌌다. 동생, 형수, 조카와 함께 걸어서 청주 내덕동까지 걸었다. 내덕동이 형수 친정동네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새도 없이 피난길에 올랐던 것이다. 2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마을 어귀에서 만난 동네 형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당시 유해운보다 다섯 살이 많았던 정홍원(현재 86세· 대소면 삼호리)은 "해운아 네 엄마 돌아가셨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유해운은 그 자리에서 몸이 얼은 것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잠시 후 정홍원이 "해운아 정신 차려"라며 몸을 부축해서야 입을 열었다.

"형 어떻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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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완순 학살 터어머니가 학살된 장소 앞에 선 유해운 ⓒ 박만순


정홍원이 전한 어머니의 소식은 기가 막혔다. 아버지 유영수가 처형당한 지 20여일 만에 군인들이 유해운 집을 들이닥쳤다. 집에는 유영수의 아내 구완순(당시 51세)밖에 없었다. 군인들은 "빨갱이년 이리 나와"라며 구완순을 강제 연행했다. 집에서 불과 50미터도 안 되는 곳에서 구완순을 총살시켰다. 유영수가 인공시절 삼호리 인민위원장을 했다는 이유로 그 부인까지 처형한 것이다. 남편도 불법적으로 학살당했는데, 그 부인까지 졸지에 처형된 것이다.

20여일 사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유해운은 낙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시신을 혼자 수습할 수는 없었다. 집안 어른들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모두가 초상집이었기 때문이다.

마을 아저씨 4명에게 일당을 주고 대소초등학교 앞개울로 같이 갔다. 초봄이었지만 개울에는 살얼음이 얼어 있었고, 군데군데 시신들이 물에 팅팅 불어있었다. 시신들은 몇 개의 웅덩이에 쌓여 있었는데, 시신들을 일일이 꺼내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신들을 꺼내는데 옷이 얼어서 '덜벅덜벅' 소리가 났다. 몸뚱이가 붓기도 했지만 겨울철이라 크게 부패하지는 않았다. 결국 아버지의 시신을 찾은 유해운은 목 놓아 울지도 못했다. 빨갱이 죽음에는 곡(哭)도 할 수 없는 시대였다.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5일 음성군 대소면 국민보도연맹원들은 진천군 광혜원면 조리방죽에서 학살되었다. 약 15명이 처형되었다. 6개월 후인 1951년 1월 6일 대소초등학교 앞개울에서는 59명 이상이 부역자로 규정되어 처형되었다. 또한 그해 2월 23일에는 1·4후퇴 후 복귀한 대소면 국민방위군이 대소지서에 구금된 8명의 민간인을 오산리 뒷산에서 처형했다. 이유는 삐라(전단지)를 뿌렸다는 혐의였다. 대소면과 이웃한 광혜원면 사방이 공동묘지였다.

1951년 1월 말에는 대소면 삼호리 구완순이 집 앞에서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이었다. 물론 구완순의 죽음을 목격한 정홍원과 마을 사람들이 있었지만 60여 년 동안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음성군 대소면 민간인학살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12년 만에 삼호리를 찾았다. 대소면 면소재지가 있는 오산리에 가서 노인들을 만났으나, 전쟁 당시 상황을 아는 이들이 없었다. 2개의 경로당을 찾았으나 별 소득이 없어 시골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산리와 더불어 피해가 컸던 삼호리를 찾았다.

삼호리 경로당으로 찾아가 방문목적을 이야기했지만 반응은 뜨악했다. "다 조사한 걸, 뭘 또 하려구," 기자가 12년 전에 이 곳을 찾아 와 실태조사를 하고, 대소면사무소에서 진실화해위에 낼 '진실규명신청서' 작성을 해줬다고 하니, 반응이 이내 달라졌다. "어쩐지 얼굴이 익더라니"하면서 반가워한다. "근데 뭘 또 조사하려구?"라는 소리에 "예, 다른 피해자를 만나 보려구요"라 대꾸했다.

12년 전에 신청하지 못한 두 분의 사연을 들었다. 그 중 유해운씨는 아버지가 학살된 지 20여일 만에 어머니를 잃은 경우다. 그런데 그의 입은 무겁기만 했다. "아휴 지겨워, 그 소리 하기도 싫어, 기억하기도 싫어"하며 고개를 절래 흔든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사망한 현장위치를 물어보자 자세히 안내했다.

누구든 아픈 사연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오류는 반복되지 않을까? 여전히 대소면 면소재지의 공기는 칙칙하다. 6.25때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사연을 마음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또한 전쟁 당시 대소면 국민방위군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김 구대장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200명의 블랙리스트를 건넨 사실은 용서될 수 있는 것인가? 부역자 자수자명단은 이내 살생부로 바뀌었다.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자, 리스트를 작성한 자, 리스트를 건넨 자, 리스트를 살생부로 전환시킨 자, 이들 모두를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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