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오라잍60화

죽어도 하기 싫던 농사... 왜 다시 돌아왔냐면

[나의 아름다운 실패기] 텃밭농부가 프로농사꾼이 되기까지

등록 2018.07.22 13:59수정 2018.08.0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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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그게 곧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지나고 보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였다고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시민기자들의 아름다운 실패기를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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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 야산 언덕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농장 ⓒ 오창균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중에서 농부로서의 삶은 한 번도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이 농사였을 것이다. 농촌에서 태어났고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남의 땅에서 소작농을 하던 부모님을 보며 자랐다. 힘들고 가난한 삶의 원인이 농사라고 생각했다.

고향을 떠나 공장노동자를 거쳐 컴퓨터프로그램 전산기술직에 취업했을 때는 신분이 상승된 것도 같았다. 결혼 후 보통사람의 평범한 삶을 살아가다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문득 새로운 꿈이 생겼다. 남은 삶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었다.


생산은 없고 소비만 하는 도시를 떠나 산골에서 자급자족으로 농사짓고 글 쓰며 소박한 삶을 일궈보고 싶었다. 그 당시 유행처럼 몰아치던 귀농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아내는 완강히 반대했다. 10년 후에는 보내준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날이 올 때까지 컴퓨터 튜닝 자영업을 하면서 텃밭농사라도 짓자는 생각으로 도시농업시민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텃밭을 일구는 도시농부가 되었다.

10년의 세월은 금세 지나갔다. 전업농부가 되기 위한 귀농을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2014년, 때마침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경기도 시흥 그린벨트지역의 1만 평 농장에서 함께 농사를 짓자는 제안을 받았다. 귀농 지역과 농지를 따로 알아볼 필요가 없을 뿐더러, 아내의 희망 사항인 서울 집과도 가까웠다. 드디어 꿈꿨던 농사를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농사로 먹고살 수 있는가

첫술에 배부르랴는 속담처럼, 농사 시작 첫해는 수입이 적은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농장을 정비하고 농사를 계획하는 준비과정으로 여겼다. 농장의 규모로 보면 최소한 세 명의 숙련된 노동력이 필요했다. 반면 공동생산과 공동분배에 동의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한때 세 명이서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만족할 만한 수입이 보장 안 되는 현실을 깨닫고 떠났다. 결국 둘만 남게 됐다.

농사의 작부체계(작물을 심는 일)와 관리는 주로 내가 담당했다. 동료는 지역의 다양한 인력네트워크를 활용해 직거래 판매와 농사체험, 주말농장 등을 기획했다. 자연과 멀어진 사람들이 농사를 통해 치유하고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게 농장의 운영 취지이기도 했다. 덕분에 많은 사람이 농장을 찾았다.


운영 목적에 맞게 안전하고 건강한 농산물을 생산하려 노력했다. 화학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는 친환경재배를 원칙으로 정했다. 잡초 억제를 위한 검은 비닐을 덮지 않아 풀숲을 만들기도 했다. 농사면적에 따른 노동력의 한계를 무시한 채 원칙만을 고수하다가 관리를 못 해 낭패를 본 것이다.

지금은 작물의 생육환경에 맞춰서 낙엽으로 덮거나, 비닐을 쓰더라도 풀을 적절하게 키우는 등 자연상태에 가까운 환경을 유지하며 농사를 짓는다. 어떻게든 처음 농사를 시작할 때의 목적만은 지키고 싶었다. 오래전부터 유기농과 자연농에 관심이 있었고, 농산물에 돈 이상의 가치를 담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유통시장에 내놓지 않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신뢰를 하는 직거래 판매를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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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밭 마음이 끌리고 농부와 궁합이 맞는 작물이 있다 ⓒ 오창균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연결되는 직거래의 장점은 분명했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문제로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만큼 다양한 작물재배를 진행하진 못했다. 또한 소량판매 중심이어서 제때 팔지 못하거나 저장기간이 짧은 농산물은 품질이 떨어져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택배발송 역시 준비와 포장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농사짓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계산기를 두들겨보면 이론적으로 나오는 매출액이 있는데, 현실에서는 칼로 무를 자르듯 정확하면서도 일정한 수익이 나오진 않았다. 고육지책으로 닭을 키워 유정란 판매로 부가적인 수입을 올리려 노력했다.

삼십여 마리를 키울 때는 판매할 달걀이 항상 부족했지만 키우는 데 큰 힘이 들진 않았다. 유정란의 판로가 확실하다는 판단에 따라 넓은 닭장을 새로 짓고 백여 마리의 중병아리를 데려와 키웠다. 그러나 많은 닭을 키우는 데는 체계적인 관리와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농사와 병행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농사에만 집중하기 위해 닭장을 폐쇄했다.

지난 3년간의 농사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동료가 농기계에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넓은 농장에서 체력이 바닥날 정도로 일을 하더라도 정신력으로 버틸 수는 있었다. 그러나 심리적인 불안정과 스트레스는 농사짓는 기운을 빼앗기도 한다.

농장이 개발제한구역에서 해제된다는 말이 나돌자 낯선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고, 땅값이 들썩이자 임대한 농장의 일부를 땅 주인이 팔아버렸다. 몇 년간 농사를 지어온 밭이 중장비에 깎이는 것을 보며, 내 땅에서 농사짓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기도 했다.

농사짓기 좋은 때는 한 번도 없었다

1만 평으로 시작한 농장은 7천 평으로 줄어들었지만, 두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여전히 벅차다. 적자생존처럼 몇 년을 버티면서 농장의 토양에 맞는 작물과 내 마음이 이끌리는 작물이 무엇인지를 알아갔고, 판매방식에도 변화를 줬다.

2년 전, 친환경농산물인증(무농약)을 받으면서 지역의 친환경학교급식과 생협에 판로를 열었다. 농장의 규모로 보면 처음부터 시작했어야 하는데... 농부가 처음이라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제 한 번에 많은 생산물을 안정적으로 판매할 수 있게 되었으니 농사를 잘 짓는 일만 남았다.

지난해 한 가지 품목을 팔아 수백만 원을 벌었다. 그때의 첫 경험은 농사에 대한 의지를 높이는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몇 년간 푼돈(?)만 받아온 아내에게 미안했는데, 올해는 목돈을 줄 수 있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아내는 해마다 똑같은 말을 하지 않았냐면서 내 손에 들어와야 믿을 수 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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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밭 작물의 수확량과 판매수입의 기대치는 항상 밑돌았다 ⓒ 오창균


슬픈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는 걸까. 야심 차게 준비한 양파가 지난겨울의 혹독한 추위 때문에 작황(농작물이 잘되고 못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기대를 걸었던 감자도 수확기에 장마와 겹치면서 품질이 떨어져 가격이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고생한 것을 올해부터 보상을 받는구나 싶었는데, 하늘이 돕지 않았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려 본다. 농사를 준비하는 과정이 탄탄하지 못했음에도 결과를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농사는 작물을 돌보는 과정을 소홀히 하면 결과도 그만큼만 나온다. 일 년 농사는 한 해에 한 번밖에 기회가 없으므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는 평범한 진리를 떠올린 쓰라린 경험이었다.

나의 농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귀농 #농사 #양파 #감자 #친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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