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토박이 삶이 담긴 맛, 어떻드래요?

[시골에서 책읽기] 전순예 '강원도의 맛'

등록 2018.07.17 14:35수정 2018.07.17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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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하우스도 없고 냉장고도 없던 시절, 풋고추석박김치는 가을 고추를 거둘 때 고추를 섶째로 뽑아 그늘진 곳에 잘 보관해야 담글 수 있었습니다. (19쪽)


1945년에 강원 평창 어두니골에서 흙지기 딸로 태어난 분은 어머니를 도와 여섯 살부터 부엌일을 했다고 합니다. 어릴 적 읽은 동화책 한 권은 '글 쓰는 길'을 가고 싶다는 꿈씨앗이 되었고, 어느새 <강원도의 맛>(전순예, 송송책방, 2018)이라는 책 하나를 내놓는 살림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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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송송책방


작은오빠는 동원훈련이 끝나는 날, 미역을 새끼줄로 꽁꽁 묶어 억지로 들어서 멜 수 있는 만큼 많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새벽마다 미역을 주워 말리느라고 훈련이 힘든 줄도 모르고, 한 달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고 지냈다고 합니다. (26쪽)
삶아서 어린 손주까지 둘러앉아 먹으려고 다들 하나씩 알을 들고 깠는데 알이 꿩병아리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답니다. 할아버지는 꿩한테 너무 미안하고 손주 보기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때부터 꿩고기는 절대 먹지 않고, 겨울이면 꿩한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산속에 콩이나 곡식을 가끔씩 뿌려 준다고 합니다. (40쪽)


<강원도의 맛>은 강원도 시골순이 삶을 고스란히 담는 맛책입니다. 강원도 시골순이로서 어릴 적부터 어머니 곁에서 지켜보고 거들고 배우던 살림에 깃든 맛을 다루는 책이에요. 글에는 드문드문 강원말이 깃드는데, 아마 평창 어두니골이란 두멧자락에서 밥살림을 물려받는 동안 찬찬히 스며든 삶말일 테지요. 강원도 사투리라기보다는 손수 지어서 손수 누리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 말인 삶말이나 살림말이라 해야 알맞지 싶습니다.

그런데 <강원도의 맛>에는 어떤 밥이 더 맛있다든지, 어떤 밥짓기를 해 볼 만하다는 이야기는 잘 안 나옵니다. 맛에 얽힌 삶을 자분자분히 들려줍니다. 군사독재가 서슬퍼렇던 무렵 동원훈련에 끌려가야 했던 작은오빠가 바닷가에서 미역을 처음 보고는 놀라서 이 미역을 어떻게든 말려서 멧골집으로 가져가서 온식구한테 맛을 보이려는 마음으로 고된 나날을 견딘 이야기가 흐릅니다.

멧골에서 나는 나물로 떡을 해 먹으면서 몸이 살아난 이웃 할아버지 이야기가 흐르고, 꿩을 잡고 꿩알을 얻어서 좋다며 손주를 불러 함께 먹으려는데, 그만 꿩병아리가 거의 자란 알이라 너무 창피하고 미안한 나머지 이다음부터는 꿩고기나 꿩알은 안 먹은 어느 할아버지 이야기가 흐릅니다.

송기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너무 예뻐서 먹어버리기가 아깝습니다. 아주 부드러운 솔 향이 나는 달착지근하고 매끌매끌한 국수송기는 입안에서 살살 녹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맛도 '송기 맛'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맛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송기는 '송기 맛'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73쪽)


글쓴이 아버님이 온 하루를 다 쏟으면서 더러 삶아 주던 송기국수는 매우 값진 먹을거리였다고 해요. 솔껍질을 벗기고 솔속살을 찬찬히 벗겨서 삶는 송기국수는 더없이 품을 들여야 비로소 얻는 국수 한 그릇이었다고 합니다. 달리 어떻게 말로 그리기 어려워 '송기 맛'이라고만 말한다는 송기국수라고 해요.

참말 그렇지요. 달걀이 맛있으면 '달걀 맛'입니다. 김치가 맛나면 '김치 맛'이지요. 달리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모든 나물은 저마다 맛이 달라 이 나물에 대고 다른 나물 이름을 따서 가리킬 수 없습니다. 곤드레는 곤드레 맛이요, 머위는 머위 맛이며, 달래는 달래 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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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란, 우리 살림맛이란, 우리 집 맛이란 무엇일까 하고 돌아봅니다. 집에서 아이들하고 함께 김치부침개를 반죽하고 부쳐서 먹으며 '살림맛'을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 최종규


솔향기같이 향긋한 잣송이 향기가 집안에 가득합니다. 다듬잇돌에다 잣송이를 놓고 작은 망치로 때려 바수었습니다. 잣을 까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잣알이 터져 껍질과 섞인 것을 한 움큼 골라서 찹쌀을 조금 넣고 죽을 끓였습니다. 그동안 입맛이 없어 맛이라고는 몰랐는데, 아주 고소한 맛이 씹을 것도 없이 입에 떠 넣으면 술쩍 넘어갑니다. 오랜만에 배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309쪽)


입맛이 없어 끙끙 앓던 이웃 아지매 한 분은 어느 날 '청설모가 가지를 뚝뚝 끊어 놓은 잣방울'을 보았다고 해요. 다른 밥은 도무지 안 넘어가던 무렵인데, 잣내음이 코를 찔러 잣방울가지를 알뜰히 이고 집으로 가져 가셨다는데, 이날 밤부터 청솔모가 집을 에워싸면서 창호문을 갉고 시끄럽게 울었대요.

청설모가 끊어 놓은 잣방울가지였으니 웬만큼 다시 마당에 던져 놓으니 청설모가 부리나케 도로 물어 갔고, 남은 잣방울가지에서 날마다 쉬잖고 잣방울을 바수어 잣으로 죽도 하고 알맹이만 따로 씹어서 먹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겨울을 나니 이듬해 봄에 아픈 데가 말끔히 사라졌대요.

어쩌면 <강원도의 맛>은 강원도 멧골마을에서 살던 사람들이 달리 약도 병원도 학교도 없는 터전이라 하지만, 손수 짓고 가꾸면서 밥 한 그릇 나누고 이야기 한 자락 주고받던 살림을 고이 품은 책일 수 있습니다. 숲살림을 품으면서 밥살림을 천천히 익힌 나날을 그러모았다고 할 만해요. 오늘 우리는 어떤 터전에서 어떤 살림을 품으면서 어떤 밥 한 그릇을 지어서 나누는 하루일까요?
덧붙이는 글 <강원도의 맛>(전순예 / 송송책방 / 2018.5.28.)

강원도의 맛

전순예 지음,
송송책방,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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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사전을 새로 쓴다. <사전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우리말 꾸러미 사전》《우리말 글쓰기 사전》《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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