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저씨는 내 생일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엄마 육아 그 아빠 일기 105] 사소함에 기뻐하는 아이들

등록 2018.07.20 08:42수정 2018.07.20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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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일 축하합니다


약 한달 전 둘째 산들이의 생일 즈음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는데 산들이가 다짜고짜 나를 부르더니 무슨 큰일이나 난 듯 호들갑을 떨면서 말을 건넸다.

"아빠, 아빠, 나한테 오늘 편지 왔다."
"응? 무슨 편지"
"생일 축하 편지."
"생일 축하? 누가 네 생일을 축하한다고 편지를 보냈어?"
"응. 봐봐. OO자동차 아저씨가 나한테 생일 축하한다고 편지를 보냈어. 이제 곧 내 생일인 거 어떻게 알았지? 아빠가 말해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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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를 감동시킨 편지 생일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 이희동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아이가 건넨 종이를 보고나니 그 모든 사항이 파악됐다. 그것은 5년 전 우리에게 자동차를 팔았던 자동차회사 영업사원이 고객관리 차원에서 보낸 생일 축하 편지였다. 아마도 고객의 인적사항에 식구 생일을 기입하는 칸이 있었을 것이고, 그 영업사원은 매뉴얼대로 거기에 적힌 날짜에 맞춰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편지는 그런 글들의 내용이 으레 그렇듯이 매우 형식적이었다. 오늘만 행복하지 마시고 1년 내내 행복하길 바라며, 많은 사랑, 많은 웃음, 더욱 더 많은 행복이 항상 함께하라는 등등 아주 전형적인 글들의 조합이었다. 그러나 그런 편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받은 둘째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그렇게 기뻐?"
"그럼. 누군가가 내 생일을 축하해준다는데 기쁘지. 아빠는 안 기쁘겠어?"
"아빠? 그, 그렇지. 아빠도 생일 축하 받으면 기분 좋지."
"그렇지? 게다가 이런 생일 축하 편지는 처음이잖아. 생일 축하한다고 편지까지 보내고. 나도 이 아저씨한테 생일 축하 편지 보내야 하는 거 아냐?"
"응? 글쎄. 나중에 아빠가 기회 되면 아저씨 생일도 물어볼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혹스러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를 '고객'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의 축하나 감사 인사를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생일이나 기념일이 되면 항상 수많은 축하 문자 등이 도착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것을 사람의 인사가 아닌 자본의 고객관리라고 느꼈을 뿐이었다.

사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가 가져야 하는 당연한 덕목이기도 했다. 그 모든 형식적인 인사와 배려를 진담으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부담스러울 테니까. 내가 그들의 인사를 형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만큼 그들 역시 한낱 고객인 내게 진심을 다해 인사하는 건 아니겠거니.


그런데 그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다시금 나를 돌아보게 됐다. 오히려 나의 이런 무미건조한 대응이 이 사회를 더 삭막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들은 사소한 것에도 이렇게 감사하고 기뻐하는데,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이런 마음가짐에서 시작해야 되는 건 아닐까?

#2. 막내의 그림

퇴근 길. 막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들렀다. 교육 과정은 모두 끝나 있었고 부모가 아직 데려가지 않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소위 당직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막내는 아빠를 보자마자 반갑다며 뛰어왔고 보란 듯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빠, 이거 봐봐!"
"응? 이게 뭐지?"
"뭐긴. 오늘 우리 그림 그렸어."
"그림? 이게 뭔데?"
"그것도 몰라? 엄마하고 아빠잖아."
"엄마랑? 아빠?"
"어때, 나 잘 그렸지?"
"응?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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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가 그린 엄마, 아빠 마지못해 칭찬하는 아빠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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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가 그린 뱀 아빠 나 잘 그리지? ⓒ 이희동


아이는 그제야 아빠의 대답에 만족한 듯 어린이집의 하루에 대해 쫑알쫑알하기 시작했다. 달리기는 자신이 어린이집에서 가장 빠르고, 밥도 어린이집에서 가장 잘 먹고, 오늘은 정리 잘한다고 선생님한테 칭찬을 들었다는 이야기 등.

매번 주기적으로 듣는 말이기에 나는 건성으로 응응 거리며 대답했지만, 아이는 그런 아빠의 리액션에도 흥분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을 존중하다는 사실에 아이는 한껏 기분이 좋아보였다.

#3. "아빠, 나 잘했지?"

집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첫째와 둘째가 나를 붙들고 경쟁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막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늘 의문문으로 시작하는 아이들. 아빠가 자신의 말에 좀 더 귀 기울이도록 하는 나름대로의 기술이다.

"아빠, 내가 진짜 대단한 뉴스 하나 이야기 해줄까?"
"뭔데?"
"오늘 내가 배드민턴 수업에서 서브 잘 넣었다고 선생님한테 칭찬 받았다."
"그래? 거봐. 우리 산들이는 뭐든 노력하면 잘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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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의 지식 자랑 어려운 국가 순서 외우기 ⓒ 이희동


"아빠, 나, 알림장에 글씨 잘 쓰면 받는 별 몇 개 받았게?"
"글쎄. 잘 모르겠는데."
"11개 받았다."
"우와 대단한데. 거봐. 까꿍이도 글씨 잘 쓰려고 하면 잘 쓰잖아. 평소에도 아무렇게 쓰지 말고 정성들여 써. 알았지?"


여기까지면 좋으련만 아이들은 아빠의 칭찬에 더욱 흥분해서 학교에서 있었던 온갖 이야기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농구하면서 달리기 했던 이야기, 글씨를 쓰면서 선생님한테 칭찬 받은 이야기, 여자 아이들의 인기투표에서 자신이 2위를 한 이야기 등 대게가 자신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가에 대한 것들이었다. 결국 아빠의 칭찬을 갈구하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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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자랑 공룡 장난감도 자랑거리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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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둥이의 자랑 겸 애교 아빠, 나 멋있지? ⓒ 이희동


"아빠, 나 잘했지?"
"그래. 너는 엄마, 아빠 자식이니까 다 잘 할 수 있을 거야. 뭐든지 노력하면 다 되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해. 알았지?"

항상 똑같은 내용의 대화였고, 항상 건성건성 대답하는 아빠였지만, 아이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듯했다. 사람의 자존감은 가족 간의 사랑과 유대를 바탕으로 10살 때까지 길러진다고 하는데 나의 칭찬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하기 바랄 뿐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미안해졌다. 내가 아이들과의 대화에 대해 너무 신경을 안 쓰고 있는 건 아닌지 뜨끔했다. 동시에 그런 아빠의 무성의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며 최선을 다해 떠드는 아이들에게 고마웠다.

나도 좀 더 아이와의 대화에 충실하도록 노력해야지.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아빠 퇴근했냐며 빼꼼 내다보고 문을 콩 닫고 들어갈 나이이지 않은가. 그때 가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아이들과 열심히 떠들어 두는 수밖에.

사소한 것에도 기뻐하고, 심지어 아빠의 영혼 없는 대답에도 용기를 얻는 아이들. 그런 삶의 자세가 앞으로 계속되기를.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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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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