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에서 좀벌레가 꿈틀... 이런 곳에서 평생 산다면

[성평등하고 안전한 주거생활 ②] 정상가족을 벗어나도 안정적 삶의 공간 꾸릴 수 있어야

등록 2018.07.21 20:30수정 2018.07.2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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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구'로 살아가는 사람, 특히 여성과 소수자는 때로 혼자 사는 삶이 너무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이대로 좁은 원룸에서 평생을 살아갈 생각을 하면 답답하고, 임대주택 청약 조건마다 '신혼부부'가 우대 조건으로 걸려 있는 것을 볼 때 절망합니다. 왜 주거정책은 모든 사람을 4인 정상가족의 (예비) 일원으로 취급할까요? 현재 주거정책의 사각지대는 어디인지, 평등하고 안전한 여성과 소수자의 삶을 위한 정책 방향은 무엇인지, 청년들의 시각에서 알아봅니다. 해당 기사는 개인의 사정으로 필명으로 처리합니다.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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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삿짐 싸기의 달인이다. ⓒ unsplash


나는 이삿짐 싸기의 달인이다. 커다란 이민 가방에 옷가지, 몇 안 되는 책을 던져넣고 갖가지 잡동사니는 백팩에 우겨넣는다. 여기에 소형 빨래 건조대를 옆구리에 끼면 이사 준비 끝이다. 성인이 되고 난 후 거처가 거의 몇 달 주기로 정신없이 바뀐 덕이다. 몇 달 후에 도착할 택배를 주문할 때는 도대체 어디로 주소를 적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가끔 지인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말하게 되면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너 전에는 다른 데 살지 않았어?'라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했다. 거처, 방, 집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쉽게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이상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이 지면에서 내가 할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말해보지 않은 이야기이다. 이제 와서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어쩌면 나의 이상한 이야기는 나만의 이야기도,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도 아니고 이 사회에서는 생각보다 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머무를 방이 나의 '집'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거의 평생을 경기 교외의 아파트에서 세대주를 아버지로 두고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오빠와 별 걱정 없이 안락하게 살았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해, 통학은 택도 없는 거리였기 때문에 1년 동안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다음 해에는 기숙사에 입주하지 못해 자취를 했는데, 첫 단계인 부동산 방문에서부터 그때까지 알던 삶과 아주 다른 삶을 강렬히 맛보게 되었다.

그나마 방세가 싼 지역에서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40만 원에 맞춰 중개인이 보여준 집들은 나를 경악하게 했다. 여기에서 사람이 산단 말이야? 창문을 열면 보이는 것은 옆 건물의 회색 벽뿐인 방, 현관문이 골목으로 바로 연결되는 방, 그다지 크지 않은 내 체구의 사람이 두 명 누우면 꽉 찰 크기의 방 등등 경기 교외의 안락한 삶에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집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중에서 겨우 고른, 그나마 나은 방도 내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3월이 지나 날이 풀리자 하수구에서 악취가 올라와 방을 가득 채웠다. 물론 악취도 함께였다. 바닥에는 좀벌레가 잔치를 벌였다. 락스, 끓는 물, 살충제만으론 지은 지 30년이 넘어가는 건물의 노쇠함을 이길 수 없었다. 가끔 밥을 먹고 밥그릇을 잘 말리지 못하고 학교에 다녀오면 남아있는 물기 안에서 좀벌레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한평생 들어보지도 못한 벌레에 물린 자국이 생겨있어서 물파스형 피부질환 치료제는 필수품이었다.

자취방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싫어 거의 매일 학교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공부하고 방에 들어가곤 했다. 결국 나는 1학기를 끝마치자마자 그 방을 나와 다시는 되돌아보지 않았다. 남은 계약 기간에는 다른 학생들이 단기 입주를 했다. 그 사람들이 각 학기를 마치고 방을 나갈 때마다 내가 월세를 내는 일이 없도록 재빨리 다른 세입자를 구해야 했고, 그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그 방에 살던 기간 동안 나는 그 공간을 단 한 번도 '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도저히 정을 붙일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곳, 자취방을 집으로 삼고 정착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취'라는 말은 그 생활이 일시적임을 암시한다. 자취방을 평생, 아니면 10년 정도 장기적으로 지내면서 삶을 꾸려나갈 공간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정착할 생각으로 자취촌에 오는 사람도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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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핏츠의 "'노답청춘' 집 찾아 지구 반 바퀴"(2015) 티저 영상. 자취하는 당사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이들이 자취를 일종의 과도기로 생각한다. 청년들은 이 공간을 '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 미스핏츠 유튜브 갈무리


자취하는 당사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이들이 자취를 일종의 과도기로 생각한다. 어차피 잠깐 지나갈 거, 주거의 수준이 영 사람 살 정도가 아니어도 괜찮다! 침대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일을 해야 하는 좁아터진 원룸이어도 문제가 없다! 어차피 몇 년 있으면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안락한 보금자리를 찾게 될 테니!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차피 벗어날 공간이니 몇 달만 참았고, 이후에 방을 빌린 사람들도 몇 달만 참고 살다가 각각 살 곳을 찾아 나갔다.

그런데 이후 비혼과 1인 가구로서의 삶을 상상하면서, 그것이 도대체 자취와 어떻게 다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1인 가구가 제도적으로 주거를 보조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은 대부분 장기적인 주거를 보장하지 않는다. 1인 가구를 누군가는 장기적인 삶의 형태로 보지만, 정부 기관을 포함한 대부분은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이 함께하는 정상적인 가족을 꾸리기 위한 과도기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 간극에서 오늘날 장기적인 삶의 형태로의 1인 가구를 계획하는 이들의 비극이 생겨난다.

만약 내가 평생을, 아니면 적어도 장기적으로라도 그때의 첫 자취방에 정착하고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면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상당한 고소득층이 아닌 이상) 오늘날 1인 가구에게 허락되는 것은 그런 공간뿐이다. 잠깐 스쳐 가는 공간. 정착할 수 없는 공간, 삶을 꾸릴 수 없는 공간.

나는 자취방에서의 생활을 뒤로하고 여름을 본가에서 보냈다. 부모님, 할머니, 오빠가 같이 사는 경기 교외의 전셋집에서 나는 정상가족(적어도 형태로만 보면 정상의 범주에 들어갔다)과 정상주거의 틀이 제공하는 안락함을 마음껏 누렸다. 벌레를 걱정할 필요도, 월세를 걱정할 필요도, 안전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가히 축복이라고 해도 될 만한 생활이었다. 2학기에는 운 좋게 학교 기숙사에 입주했고, 12월 말 무렵 나는 다시 본가에 가 달콤한 생활을 만끽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사람 일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번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심각하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불행한 연례행사같이 일어나던 아버지의 가정폭력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고 어머니는 생명에 위협을 느껴 집을 나오셨다. 아버지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던 나도 덩달아 집을 뛰쳐나온 꼴이 되었다. 내 앞에서 울고 계신 어머니를 어르고 달래며 이런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어떤 곳이 있는지 등 대책을 찾던 내 머릿속에 순간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그럼 나는 이제 어디에 살지?

정상가족을 박차고 뛰쳐나간 삶은 녹록지 않았다

이혼 소송을 준비하는 중인 어머니는 주거에 있어 제도적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세대주는 여전히 아버지였고, 대부분의 재산은 아버지 소유였고, 이혼 소송에 불리할까 봐 전출신고도 할 수 없었다. 제도에게서 외면당한 어머니를 도운 것은 이모들이었다. 어머니께서 그나마 가지고 있는 재산에 이모들의 돈을 모아 보증금 2000만 원, 월세 60만 원의 방을 얻을 수 있었다.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 오빠 그리고 나 세 명이 겨우 들어가 살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방이었다.

가뜩이나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 세 명이서 개인 공간도, 식사하는 곳과 휴식하는 곳의 분리도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생활하자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어차피 독립하는 것은 예정된 일이기에 조금 앞당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포기했다. 한 달에 아르바이트 두 개로 버는 100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생활비와 집세를 감당하고 거기에다 학비를 위한 저축까지 할 수는 없었다.

LH공사의 주거지원 프로그램을 활용해볼까 했지만 월세를 낮추기 위해서는 상당한 보증금이 필요했다. 겨우겨우 모아온 몇백만 원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학자금 대출도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보증금을 위한 대출을 받을 수도 없었다. 내가 아직은 모르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내가 그것을 못 찾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이 사회에서 주어진 기반 없이 '정상'에서 빠져나와 여성 혼자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시작하기도 전에 너무 절실하게 체감했다. 거기에 더해 평소 앓던 우울증 증세가 더 심해져 나는 그냥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결국 그 상태로 좁은 방에서 몇 개월을 더 견디다가 거주비가 거의 들지 않는 학교 기숙사에 추가 입주해 지금은 그나마 한숨 돌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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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핏츠의 "'노답청춘' 집 찾아 지구 반 바퀴"(2015) 티저 영상.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수호하는 가부장제에서 뛰쳐나온 여성은 자유도, 사랑도, 커뮤니티도, 지원도 꿈꾸기 힘들다. 열악한 주거환경과 불안정한 삶 외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 ⓒ 미스핏츠 유튜브 갈무리


앞에서 밝혔듯이, 나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일이기도 하고, 공감이나 이해를 받기에는 너무 특수하고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건 내가 지금까지 알아온 세상에서는!) 그러나 '집'을 주제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면서 이것이 생각보다 흔한 이야기임을 새삼 깨달았다. 가부장제 밖의 삶이 얼마나 위태롭고 감수해야 할 위험이 많은지 아는 젊은 여성이 결혼을 통해 정상가족을 이루고, 정상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폭력과 부당함을 견디다가 결국에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힘든 방법으로 그 가족에서 뛰쳐나오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그 여성의 고난, 가장 크게는 주거에 대한 고난으로 이어진다. 대부분이 인식하는 '집'은 가족 단위와 직결된다. 어머니, 아버지와 내가 한 울타리 안에서 화목하게 사는 공간. 기존의 주거공간과 주거제도는 이런 집의 개념에 충실하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수호하는 가부장제에서 뛰쳐나온 여성에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없는 한) 열악한 주거환경과 불안정한 삶 외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

어머니는 이혼 소송이 바라는 대로 원활하게 진행될 경우 분할한 재산으로 작은 오피스텔을 하나 사서 그곳에서 계속 살 생각을 하고 계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내가 살 곳을 찾아 떠나야 할 것이다. 이미 확인했듯 그 과정은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벌어진 일과 겪은 어려움에 대해서는 크게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그저 어머니와 내가 앞으로 경험할 삶이 정상가족과 그 집에서 벗어나도 안전할 수 있는 삶이기를,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삶이기를 바랄 뿐이다.

[성평등하고 안전한 주거생활 이전 기사]
① "훔칠 건 없고 몰카를..." 경찰의 말, 그 원룸을 나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여성가족부 '성평등드리머(청년정책참여단)' 1기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된 기사입니다.
#성평등 #여성 #1인가구 #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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