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때문에 생긴 일, 잠을 잘 수가 없다

어릴 적 여름에 대한 기억... 어차피 가을은 올 것이다

등록 2018.07.20 08:40수정 2018.07.20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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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 남평문씨세거지에서 만난 능소화. 꽃이 귀한 여름에 아름답고 밝게 피어나 더위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 김숙귀


짧은 장마가 끝나자마자 몰려온 폭염으로 밤잠마저 설치는 요즘이다. 사나운 더위는 일주일 넘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나 역시 참기 힘든 더위에 머리는 하얗게 비고 온통 신경이 곤두서있어 집중하여 책 한 장도 넘기기가 어렵다.


지난 밤에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평소 자리에 누우면 바로 잠들기에 스스로 건강하다는 위안 거리로 삼고 있건만 무더운 여름날 밤에는 수십 분이 지나도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기 일쑤다. 그렇게 겨우 잠이 들었다가도 끈적거리고 불쾌한 느낌에 몇 번이나 잠이 깨어 다시 쉬이 잠들지 못하고 집안을 서성대곤 한다.

무엇보다 이 여름이 괴로운 이유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여행을 떠나는 일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바다는 밀려드는 사람들로 몸살을 앓고 더위에 쉽게 지쳐버리기에 아름다운 풍광을 온전히 가슴에 담기도 힘들다. 유독 더위에 약한 내게 이토록 숨막히는 폭염은 사나운 맹수와 다르지 않다. 무섭게 달려드는 맹수에게 살점을 뜯기는 것 만큼이나 고통스럽다.

유난히 더위를 타면서도 기계 바람은 무척 싫어하는지라 몇 년 전에야 마련한 에어컨은 쓸 일이 별로 없다.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노라면 두통이 오고 온몸이 으슬거리며 곧 아플 것 같다. 그래도 정말 견디기 힘들 때는 멀찍이 떨어져서 잠깐 신세를 지기도 하지만 나의 여름은 언제나 손때묻은 부채 하나, 그리고 오래된 선풍기와 함께이다.

대나무껍질에 한지를 붙여 만든 부채의 바람은 생각보다 훨씬 시원하여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해준다. 부채를 들고 크게 바람을 일어본다. 넓은 부채끝에서 이는 시원한 바람이 문득 나를 어린 시절의 여름속으로 데리고 간다.

늘 그렇듯이 방학을 맞아 시골집에 내려온 어린 손주를 할머니께서는 살뜰히 챙기셨다. 할머니집의 넓은 마당 한쪽에는 우물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상추, 쪽파, 깻잎들이 자라고 있었다. 대청마루 위 시렁에는 제사때 쓰는 큰 소쿠리들이 얹혀 있었고 부엌앞 빨랫줄에는 늘보리밥이 담긴 소쿠리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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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여름 찾아간 구례 운조루. 시원한 대청마루와 시렁에 얹힌 광주리를 보며 어릴적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께서는 시골집에 온 손주에게 직접 만드신 쌀엿을 광주리에서 꺼내 주시곤 했다. ⓒ 김숙귀


할머니는 보리쌀을 넉넉히 삶아 식혀 두었다가 식사때마다 조금씩 덜어 쌀이랑 섞어서 밥을 지으셨다. 여름날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열무된장비빔밥은 어린 내 입에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큰 양푼에 보리쌀 섞어 지은 밥을 푸고 송송 썬 열무김치와 맛있게 끓인 강된장도 넣고 할머니가 동네 방앗간에서 직접 짜오신 참기름을 넉넉히 두른 다음, 슥슥 비벼서 가족과 둘러앉아 먹던 그 맛을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저녁이 되면 낮에 사서 우물에 빠트려 놓은 수박을 아버지가 큰 두레박으로 건져올려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식구들은 마당 한가운데 놓아둔 평상에 나와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쯤 되면 나는 슬슬 내려앉는 잠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여름이 되면 늘 지니고 계시는 커다란 부채로 바람을 일어 손주의 더위를 쫓아주셨다. 어릴적 여름은 내기억속에 그지없는 정겨움과 편안함으로 남아 있다.

오늘도 괴로운 하루를 보내고 저녁을 맞았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던 해가 함지로 사라진 시간, 이제야 간신히 숨을 고르며 집 뒤 자그마한 공원으로 나가본다. 낮의 열기가 아직도 얼마간 남아있지만 해가 진 여름 저녁 공기는 시원하기까지 하다. 낮에 축 처져 있었을 풀과 나뭇잎도 비로소 조금 기운을 차리는 듯하다.

어차피 가을은 올 것이다. 깜깜한 밤을 건너왔기에 아침의 햇살이 더욱 밝고 빛나듯이 이토록 무더운 여름을 지나왔기에 가을은 한층 더 소슬하고 청량할 것이다. 내일은 며칠 전에 담가둔 열무김치를 꺼내고 강된장 끓여서 어린시절, 서늘한 여름의 기억을 양념삼아 비빔밥을 만들어 먹어야겠다. 그러면 사나운 더위도 잠시 저만큼 물러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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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나를 살아있게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과 객창감을 글로 풀어낼 때 나는 행복하다. 꽃잎에 매달린 이슬 한 방울, 삽상한 가을바람 한 자락, 허리를 굽혀야 보이는 한 송이 들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날마다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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