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반올림' 농성 천막, 1023일 만에 철거한다

[현장] 삼성전자-반올림, 24일 "향후 중재안 무조건 수용" 서명... 11년 만에 문제 해결 실마리

등록 2018.07.24 14:53수정 2018.07.2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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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백혈병' 희생자 부친의 눈물 (서울=연합뉴스) 김주성 기자 = 24일 서울 서대문구 법무법인 지평에서 열린 '삼성전자-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조정위 3자간 제2차 조정재개 및 중재방식 합의서명식'에서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 아버지인 반올림 황상기 대표가 소감을 밝히더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왼쪽부터 황상기 대표, 김지형 조정위원장, 김선식 삼성전자 전무. 2018.7.24 ⓒ 연합뉴스


"유미가 병에 걸려서 치료 받을 적에 유미와 약속한 게 있다. 유미가 걸린 병은 개인적으로 걸린 게 아니라 반도체 공장에 의해 걸린 것이니, (유미가) 병에 걸린 이유를 꼭 밝혀내겠다고 유미와 약속했었다. 오늘 합의로써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2007년 3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눈시울을 붉히며 이야기했다.

삼성전자와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시민단체인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이하 반올림)이 그간 두 단체를 중재해온 조정위원회가 향후 제안할 중재안을 무조건 수용한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11년 만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됐다.

삼성전자와 반올림은 24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서대문구 법무법인 지평 사무실에서 '제2차 조정재개를 위한 중재방식 합의 서명식'을 가졌다.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등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원회)'가 향후 제안할 중재안을 양측이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게 합의문의 골자다. 이로써 사실상 교착상태에 빠졌던 삼성전자와 반올림간 조정이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정위가 양측에 중재안을 내놓은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4년 12월 발족한 조정위원회(위원장 김지형 전 대법관)는 이듬해 7월 권고안을 마련해 양측에 제안했다. 삼성전자가 1000억 원을 내 직업병 피해자 보상을 위한 공익법인을 세우고, 피해자들에게 보상과 사과를 하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권고안을 거부하고 자체 보상위원회를 꾸렸다. 이에 반올림은 2015년 10월 7일부터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천막 농성을 해왔다.

조정위원회가 지난 18일 '2차 조정을 위한 공개 제안서'를 삼성전자와 반올림에 보내면서부터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1차 때는 조정위원회가 내놓은 조정안을 양측이 받아들일지 말지 정하게 했다면, 이번에는 조정위가 양측의 의견을 듣고 중재안을 만들면 양측이 반드시 따르는 중재 방식을 제안했다. 양측 모두 이를 받아들이면서 이날 서명식이 열리게 됐다.

지난 11년 떠올리며 눈물 보인 황상기씨..."정부·삼성 변해야 한다"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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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올림과 삼성전자 간 합의문 ⓒ 신지수


이날 반올림 피해자 대표로 합의문에 서명한 황상기씨는 "우리 유미가 백혈병에 걸린 지 꼭 만 13년이 넘었다"라며 운을 뗐다. 황씨는 "돈 없고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들이 작업현장에서 화학약품에 의해 병들고 죽어갔다"며 "(이 문제를) 10년이 넘도록 해결하지 못 한 것은 참으로 섭섭한 일이다"라고 울먹이며 이야기했다. 딸 생각에 한 동안 말을 잇지 못 한 그는 "이제라도 삼성직업병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이날 합의문에 서명하기까지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 인사도 전했다. 그는 반올림 활동가, 반올림을 지원한 단체·정당·종교인, 개인적으로 반올림에 후원한 시민들, '또 하나의 가족' 영화 스태프들, 다큐멘터리 스태프 등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정부에 대해서는 섭섭함을 토로했다. 그는 "삼성은 노동자들이 이렇게 많이 병들고 죽는데도 책임회피하면서 10년이 넘도록 있었다"라며 "이제야 급하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섭섭하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삼성은 물론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변해야 한다"라며 "세상은 변해가고 있는데 삼성은 눈을 뜨지 못 하고 있다, 사회와 노동자와 소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황씨는 정부에 대해서도 "삼성 직업병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라면서 "삼성 노동자들이 각종 화학약품으로 병들고 죽어갔는데, 근로감독이나 처벌을 제대로 했느냐"라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이 아무리 잘못해도, 노동자들이 죽어도, 정부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며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다"라며 "그래서 기업 입장에서는 사람이 병들고 죽어도 고치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산업재해가 발생한 기업과 사업장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우리나라 노동현장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삼성전자 김기남 대표이사 대신 서명한 김선식 전무는 "중재 방식을 수용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라면서도 "완전한 문제 해결만이 발병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일이라 판단했다"라고 했다. 김 전무는 이어 "회사는 조정위원회가 합리적인 중재안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 생각한다"라며 "향후 일정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라고 밝혔다.

조정위, 9월 말~10월 초 쯤 최종 중재안 발표 예정

이날 합의를 토대로 조정위는 8~9월 중재안을 논의·마련해, 9월 말에서 10월 초에는 최종 중재안을 발표하는 자리를 가질 계획이다. 중재안에는 반올림 피해자에 대한 보상안과 삼성전자 측의 사과와 재발방지 및 사회공헌 방안 등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김지형 조정위원장은 "조정위원회 산하에 따로 자문위원회를 둬, 사회적 논의 절차를 밟아나갈 예정이다"라며 "이러한 절차를 거쳐 중재의 실체적 내용과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포함된 최종 중재안을 확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올림은 이날 서명식을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의 첫 매듭'으로 평가하고 오는 25일 오후 7시 문화제 뒤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 있는 농성장을 철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농성을 시작한 지 1023일 만에 집에 돌아가는 셈이다. 

이날 농성장에서 마지막 밤을 보낼 예정인 황상기씨는 "1000일 넘게 지내다보니 농성장이 내 집 같이 느껴진다"라며 "하지만 오늘 지나고 내일 밤에는 이제 집에 가야죠"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끝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와중에도 피해자들이 계속 나오는 것이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다"라며 "(이번 합의를 계기로) 노동자들이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병에 걸리고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멈춰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반올림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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