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의 '패스트푸드화', 정작 학교엔 대안이 없어요

[아이들은 나의 스승 142] '흰 우유 폭발 사건'을 통해 본 아이들의 편식 습관

등록 2018.07.25 17:24수정 2018.07.25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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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이 청소한 뒤 며칠째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지만, 악취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해당 교실 근처 복도만 지나가도 코를 막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다. 아이들은 요 며칠 동안 그곳을 '영어 교실'이라는 정식 명칭 대신 '가스실'이라 부르며 키득거리고 있다.

누군가가 책상 안에 먹지 않고 넣어둔 우유 몇 팩이 찜통더위에 폭발한 것이다. 바로 발견해 조치를 했다면 아무 일 없었을 테지만, 기말시험 기간 내내 비워져 있던 교실이라 널브러진 우유가 부패한 상태로 며칠간 방치된 게 문제를 키웠다. 마치 녹슨 것처럼 교실 바닥의 불그스름한 자국을 벗겨내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치약도 뿌려보고, 향기 나는 세제를 써서 닦아내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외려 두 가지가 섞여 더 고약한 냄새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제 하나 남은 방법은 교탁과 책상, 의자, 사물함 등을 모두 교실 밖으로 빼낸 다음 락스 등을 이용해 교실 바닥과 벽면을 벗겨낸 뒤 새로 코팅하는 것뿐이다.

한 아이는 악취가 저절로 사라질 때까지 교실을 '체벌 공간'으로 활용하면 어떻겠느냐며 제안하기도 했다. 잘못을 저지른 학생을 시간을 정해 이 교실에 가둬 반성의 시간을 갖게 하자는 것이다. 오죽하면 이런 우스갯소리까지 할까 싶어 혼내기는커녕 되레 그럴듯하다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번 사달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이들이 우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맛이 없다는 이유로 '흰 우유'를 싫어하는 것이다. 학교마다 우유 급식은 희망자에 한해서 실시되고 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제공되는 딸기 우유와 초코 우유를 먹기 위해 신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전언이다.

요즘 아이들은 우유조차 달지 않으면 먹으려 하지 않는다. 본디 우유 급식은 '흰 우유'만을 제공하도록 돼 있지만, 아이들이 원한다는 이유로 딸기 우유와 초코 우유를 '끼워 팔기'를 하고 있다. 교실에서 스틱형으로 된 달디 단 초코 가루를 부러 챙겨와 우유에 넣어 먹는 아이들의 모습은 이미 익숙한 풍경이다.

여기저기서 나름의 대안이 제시되었다. 아예 우유 급식을 폐지하자는 과격한 주장부터, 점심시간 급식과 함께 제공하여 교실로 반입되지 않도록 급식 방식을 개선하자는 이야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우유는 아침을 거른 탓에 점심시간 때까지 기다리기 힘든 아이들을 위한 없어서는 안 될 간식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이참에 문제가 된 '흰 우유'를 빼고 일주일 내내 모두가 좋아하는 딸기 우유와 초코 우유로 바꾸면 쉽게 해결될 수 있어요."

한 아이의 의견에 반론이 나오기는커녕 가장 '합리적인' 대안이라며 모두가 맞장구를 쳤다. 아이들의 뜻을 한데모아 학생회를 통해 학교에 건의할 예정이라며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었다. 문제점을 공유한 뒤 토론을 통해 대안을 모색하고 관철시키기 위해 힘을 모으는 과정이야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과연 그게 옳은 방안인가는 따져봐야 할 문제다.

이는 사실 우유만의 호불호 문제가 아니다.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아이들의 편식 습관은 반영하고 허용될 사안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바로잡아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치킨과 돈가스, 햄버거와 피자를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학교 급식에 매번 그러한 패스트푸드를 제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건 사실이다. 실제로 패스트푸드가 시나브로 아이들의 학교 급식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 갖은 야채와 고추장이 버무려진 비빔밥 메뉴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고 대신 치킨 마요네즈 덮밥이 그 자리를 꿰차고 있다. 아직 햄버거와 피자까지는 아니지만, 돈가스는 불고기와 함께 아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반찬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야채는 종류를 불문하고 기피 대상 1호이며, 생선 요리도 조림이거나 찜이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나마 생선은 튀긴 뒤 그 위에 달디 단 소스라도 뿌려져 있어야 젓가락질 한두 번이라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인 김치도 가공된 참치나 돼지고기를 넣어 끓인 찌개가 아니면 웬만해선 먹지 않아 아이들의 식판에서 사라져가는 모양새다.

아이들의 식습관을 두고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갈등이 좀처럼 풀릴 기미가 없다. 우선, 아이들이 야채와 생선을 먹지 않아 학교 급식 식단표에 넣기가 어렵다는 영양교사의 하소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애초 메뉴에서 제외되어 있다 보니 맛볼 기회조차 없어 더욱 편식 습관이 고착화되는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도 일리가 없진 않다.

하나 분명한 건, 학교에서 아이들의 편식 습관을 바로잡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맛도 있고 몸에도 좋은 음식이라면 고민할 것도 없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은 '맛있는 음식'과 '몸에 좋은 음식' 중에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전자를 선택한다.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한다거나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식의 영양 교육으로는 더 이상 아이들을 설득해낼 수 없다.

물론, 일부에선 아이들의 입맛을 고려해 야채와 생선을 요리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다양한 요리법을 개발한다고 해도, 맛으로 패스트푸드를 이길 수는 없다고 단언하는 목소리가 대부분이다. 더욱이 바쁜 일상 속 간편함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이른바 '슬로푸드'가 패스트푸드와 경쟁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아이들의 입맛을 고려한 요리법이라 해 봐야 딱히 특별할 게 없다. 십 수 년 동안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터라, 바삭한 식감을 위해 기름에 튀기거나 볶고, 설탕을 듬뿍 뿌리는 게 고작이다. '퓨전 요리'라며 그럴듯한 이름은 붙어 있지만, 패스트푸드를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단 하루라도 급식에 나오지 않으면 못 견뎌하는 고기 요리조차 기름을 뺀 편육보다 튀기고 볶은 돈가스와 불고기를 훨씬 더 좋아하니 더 말해 무엇 할까. 점심시간 급식소 대신 매점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의 발길을 돌리려면 어쩔 수 없다는 하소연이다. 고육지책일 테지만, 몸에 좋은 식자재를 요리해 되레 몸에 나쁜 음식을 만드는 거라고 비판을 받는 이유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따금 나오곤 했는데, 데치고 무친 나물과 바지락 초무침 같은 요리는 더 이상 식단표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대개 아이들은 쌉싸름하고 시큼한 맛에 손사래를 치는데, 나물과 초무침은 이미 그들에게 대표적인 '혐오 식품'이다. 요리하자면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가정에서도 꺼려하는 탓인지 요즘엔 웬만한 식당 아니면 구경조차 힘들게 됐다.

아이들이 싫어한다고 급식에서 야채와 생선을 빼고 죄다 고기반찬만 메뉴에 올릴 수 없듯, '흰 우유'를 먹지 않는다고 학교에서 딸기 우유와 초코 우유만 제공할 순 없다. 몸에 좋은 음식을 먹도록 하는 것이 이른바 '밥상머리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지만, 고백하건대 학교에서 손을 쓰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듯하다. 급식 지도에 지친 한 동료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가정에서 어릴 적부터 잘못 길들여진 식습관을 학교 교육을 통해 바꿔낼 수 있다고 믿는 게 외려 황당하죠. 그것도 20년 가까이 지난 고등학생들인데. 과격하게 들릴지는 모르나, 당장 매점을 없애고, 맛이 없어 학교 급식을 못 먹겠다면 차라리 굶기는 것이 편식 습관을 바로잡는 마지막 남은 대책이라고 생각해요."
#학교 급식 #육식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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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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