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03 09:09최종 업데이트 19.06.25 15:35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표창원 의원은 <임정> 취재팀을 만난 자리에서 "임시정부의 뿌리를 찾지 않는 것은 인간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 김종훈







지난 4월 13일, 서울 백범기념관 앞.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9주년 기념식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 4월 13일 오늘이 아니라 국호와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내각을 구성한 4월 11일이므로 바로잡아야 한다"며 "법령 개정을 거쳐 내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4월11일로 수정해 기념하겠다"고 밝혔다.

이 총리의 이날 선언으로 내년(2019) 대한민국 100주년을 앞두고서야 임시정부 수립일이 제자리를 찾게 됐다. 여기에는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역할이 컸다. 표 의원은 관련 법률을 검토하고, 학계 인사들과 함께 공청회를 열어 여론을 모았다. 앞서 국가보훈처에도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을 변경할 것을 요청했다. 결국 99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정부의 공식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취재팀은 지난 7월 31일 표창원 의원을 만나 '대한민국 100주년'을 주제로 놓고 긴 이야기를 나눴다. 표 의원은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의 필요성에 대해 묻자 "대한민국의 뿌리를 찾지 않는 삶은 짐승과 다르지 않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오는 8월 15일 로드다큐 <임정> 1편 공개에 앞서 표 의원의 인터뷰 영상 일부를 시청자 여러분께 미리 선보인다.

더불어 '임정투어 가이드북' 제작을 위해 이벤트 형식으로 진행됐던 7편의 글도 프로젝트에 참여한 청년 4인의 에세이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광복절 이후 순차적으로 공개될 6편의 로드다큐 <임정>도 꼭 시청해 주기를 부탁드린다. 표창원 의원도 9월에 진행되는 로드다큐 <임정> 시사회 때 함께할 것을 약속했다.

 










1. 김종훈(프로젝트 기획)
  많이들 말한다. '고생했다'고. 때마다 답한다. '잘 되게 도와 달라'고. 정말로 요즘엔 너무 한다 싶을 정도로 '도와 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좇아 20박 21일 동안 중국 현지 취재를 진행했다.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취재가 중국 상하이, 자싱, 항저우,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 구이린, 충칭까지 이어졌다. 6000km가 넘는 거리다. 기획부터 준비, 취재, 현지 촬영, 편집까지 단 한순간도 쉬운 일이 없었다. 지금도 후반 작업을 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다.

이유는 하나, 좀 더 많은 청년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직접 눈으로 봤으면 하는 간절함 때문이다.

이런 대접이 옳은가
  중국 현지 취재를 진행하는 내내 안타깝고 미안한 감정이 이어졌다. 김구 선생의 유적지를 찾아도, 김원봉 장군의 흔적을 좇아도 다르지 않았다.

제대로 몰랐기에 죄송했고, 내년도 대한민국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온전히 지켜내지 못해 미안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켜낸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이런 대접을 받는 게 옳은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원창리 13호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시계를 교환한 장소. 윤 의사는 이곳에서 마지막 식사를 한 뒤 의거에 성공했다. 1932년 4월 29일의 일이다. 아무런 표식도 없다. ⓒ 김종훈

 

대한민국 탄생 장소 서금이로(옛 김신부로) 어딘가에서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아무런 표식도 없다. ⓒ 김종훈

 

난징 천녕사 이곳 난징 천녕사에서 김원봉 장군과 조선혁명간부학교 학생들은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훈련을 했다. 아무런 흔적도 없다. ⓒ 김종훈


  상하이 원창리 13호에 갔을 때 그랬다.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훙커오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키기 직전, 김구 선생과 마지막 식사를 나눈 장소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서로의 시계를 교환했다.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었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이 없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 탄생한 서금이로(옛 김신부로)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흔적이 없다. 장소조차 특정이 안 되고 있다. 건너편 길인 회해중로(옛 하비로)도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틀을 잡은 두 번째 청사가 자리 잡았던 장소지만, 표지석 하나 없다.

난징 천녕사도 상황은 똑같다. 약산 김원봉 장군이 청년들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군 간부를 양성하고 훈련한 곳이지만, '천녕사'라는 단어 외엔 아무것도 없다. 깊은 산속 폐허로만 남아있다.

대부분의 유적지가 방치되고 폐허가 됐다. 해방 후 수십 년 동안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회조차 없었다. 어느 누구도 온전히 알려주지 않았다. 앞장서야 할 정부는 해방 후인 '1948년 나라가 건국됐다'며 왜곡하고 방해했다.

"그곳에 서면 묵직한 감동이 인다"
  이점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김구 선생과 문재인 대통령이 섰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 충칭 계단에 서 보면 안다. 분명 애석하고 아쉬웠던 감정이 일었던 장소지만, 동시에 묵직한 감동이 밀려온다. 앞서 언급한 원창리 13호도, 서금이로도, 천녕사도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우리가 직접 그곳에 섰기 때문이다.
 

그곳에 서면 안다 충칭의 그 계단에 서면, 김구 선생과 문재인 대통령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꼭 서보기를 추천한다. ⓒ 김종훈



해방을 맞이한 김구 선생과 임정 요인들이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을 때 왜 굳게 입을 닫았는지, 2017년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 중 처음으로 충칭 청사를 찾아 애국지사 후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문 대통령이 왜 '가슴이 멘다'고 말했는지, 그 계단에 직접 서면 알 수 있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 나 역시 함께하고 있음을. 수십 년 전 애국지사들이 걸었던 그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진다.

그래서 꼭 찾아가 보기를 바란다. 8월 15일 첫 선을 보이는 로드다큐 <임정>과 스토리펀딩을 통해 진행 중인 <임정투어 가이드북>이 대놓고 권할 것이다.

'당신도 할 수 있다'고. '꼭 직접 가서 느껴보라'고. 그러니 로드다큐 <임정>과 스토리펀딩 <임정투어 가이드북> 더욱더 잘 되게 도와 달라. 그들을 생각하며 내일도 최선을 다하겠다.   
스토리펀딩 <임정> 응원하기 - 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9766

2. 김혜주(프로그램 편집, 조연출)

파괴왕과 울보
  임정투어를 하며 어떤 것들을 파괴했기에 이런 별명이 붙었을까? 나는 촬영 장비, 인간 관계 등 다양한 것들을 파괴했다. 이런 나에게 선배들은 "넌 만지지 마", "제발 천천히"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

가장 먼저 부순 건 드론. 드론은 학생 때부터 조작을 해봐서 별 걱정 없이 날리기 시작했지만 사고가 나고 말았다. 사고가 난 장소는 차가 많이 다니고 건물들이 붙어있는 좁은 길이었다. 분명 나는 최대한 낮은 곳에서 인도 쪽으로 가까이 오게끔 운전을 했는데, 분명 그렇게 했는데 벽에 부딪혀버렸다. 아찔했다.

사고가 난 직후 달려가 확인해보니 프로펠러만 고장 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괜찮아요, 이거만 교체만 하면 돼요"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것도 매우 씩씩하게.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카메라가 본체와 완전히 분리된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제대로 사고를 친 셈이 됐다. 장비가 고장 난 건 둘째 치고 앞으로의 촬영에 차질이 생길 판이었다. 그런데 사고를 친 당사자의 '쿨한 척한 태도'에 선배들은 당황했다. 그들에게 질책을 들은 나는 반대쪽 건널목에 가서 혼자 눈물을 훔쳤다.

마음고생 때문인지, 결국 그날 꿈에 드론이 나왔다. 꿈 속에서는 그날의 사고가 재현되었다. 드론이 벽에 부딪혀서 떨어지던 그 순간, 잊을 수가 없다. 다음날에도 계속 촬영을 진행해야 했기에 괜찮은 척하며 기죽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지만, 여정 내내 속은 그러지 못했다.

항저우 한국독립당 본부 사흠방 항저우 사흠방에서 찍은 드론 촬영 모습, 이 영상을 끝으로 드론은 장렬히 전사했다. '사흠방' 글씨 옆 왼쪽 첫 번째 집이 한국독립당 본부 자리다. ⓒ 김종훈



'허망함을 감출 수 없다'
  투어를 마치고 편집을 앞둔 상태에서 느낀 바를 말하자면 힘들었고, 고단했고, 괴로웠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21일간 쉼 없이 달려왔고 숙소에 들어가서도 바로 쉴 수 없었다. 마치 임정 요인들의 발자취처럼 무겁고 어려웠다. 하지만 정말로 힘들었던 건, 힘들게 찾아간 임정 요인들이 머물렀던 터가 전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을 보며 느낀 허망함이었다.

첫날 방문했던 곳부터 그랬다. 대한민국의 시작인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첫 번째로 세워진 곳은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서금이로(구 김신부로)에 있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임정 요인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게 영광스럽고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첫날부터 무거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온전히 담기 위해 훙커오공원(현 루쉰공원) 안쪽에는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존재한다. 이날 취재팀은 윤 의사의 의거지를 드론 촬영을 통해 정확하게 밝혀냈다. ⓒ 김종훈



생각해보면 나는 현장에서 참 많이 울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울었던 곳은 윤봉길 의사 의거지였다. 루쉰공원 내 매헌 기념관에서 윤 의사 관련 영상을 본 나는 눈물을 흘린 게 아니라 쏟았다고 할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제대로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죄송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의 무지가 너무 미웠다. 무엇보다 이제야 방문했다는 것에 대해 미안했다. 이날 존경을 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눈물을 흘리는 일뿐이었다. 윤봉길 의사를 결코 잊지 않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임정투어는 내 삶의 태도를 바꾸게 했다. 역사에 무지했던 나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쉽게 얻은 현재가 아니기에 임정 요인에게 느낀 죄송함이 진심이라면 앞으로 삶을 잘 버터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에게 비할 바 안 되지만 현재에 충실하며 기억하고 존경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살아낼 것이다.

3. 정교진(프로그램 연출, 촬영감독)
  20박 21일 간의 중국 현지 취재와 그 결과를 온전히 담아내는 6편의 로드다큐, 그리고 책 한 권. 다큐 마감은 8월 중하순. 본격적인 일정에 들어가기 전, 타이트한 마감시한과 출간 계획을 들었을 땐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명확하게 8월 데드라인을 확인하고 나서야 농담이 아닌 사실임을 실감했다.

20박 21일, 상하이부터 충칭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흔적들을 방문하면서 그 과정을 영상으로 세세하게 기록해야 했다. 나와 회사동료 두 명, 그리고 청년 여행가 한 명, 성격도 제각각인 4인이 모여 총 6000km의 거리를 이동하면서 벌어질 이야기들은 촬영·연출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즐겁지 않았다.

출발 전 회의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사실 나의 역할에 대해 감이 서질 않았다. 상황을 기록하는 사람으로 가야 할지 개입하여 함께 떠나는 사람으로 가야 할지부터 모호했다. 4명의 로드다큐를 온전히 보여주려면 그만큼의 카메라를 운용할 인력이 필요한 데 우리가 가진 예산상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틈틈이 상황을 기록하며 최소한의 장면 연출을 위한 개입만 했다. 여정을 이어가며 스스로 정한 규칙이다.

청년여행가 최한솔씨는 유일하게 중국어가 가능한 사람이다. 중국 일정에서 필요한 모든 통역을 도맡아했다. 김혜주 기자는 자기 몸집만한 가방을 앞뒤로 메고 나와 함께 임정의 흔적들을 담아내야 했다. 그날 찍은 영상을 백업하는 일도 쉽지 않았는데 그 작업은 새벽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김종훈 기자는 행여나 임정요인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을까 밤잠 설치며 수십 번 내용을 재검토했다. 나 역시 1인 다역을 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여정 중 누구 하나 아픈 사람이 생기면 안 된다고 서로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몸에 먼저 이상이 왔다.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 자싱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한 정교진 감독, 폭우가 내려치는 상황 속에서도 일정 때문에 촬영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달이 났다. ⓒ 김종훈


  비오는 날 촬영으로 인해 무리했던 탓인지 몸이 으스스했다. 나를 찾아온 증상이 잠시 지나치는 소나기이길 기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는 심각해졌다. 어느새 가만히 서있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팀원들은 전체 여정을 위해 차라리 병원에 입원할 것을 권했고 결국 임정 프로젝트 시작 5일 만에 몸살감기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창피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나려했다. 잊혀져가는 임정의 역사를 취재할 임무를 생각하니 마음 편히 누울 수도 없었다. 링거를 맞는 내내 수없이 내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길 기도했다. 그러지 않아도 부족한 시간인데 아프다고 이렇게 누워서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몸이 불편하더라도 마음만은 편하기 위해 다음 날 일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진행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러한 다짐에는 약산 김원봉 선생이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이야기는 되뇔 때마다 가슴을 후벼 팠다.

처음 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밀정>, <암살>이라는 두 영화 속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은 정말 화려했고 대단했다. 하지만 그의 말년과 그가 살아온 흔적들은 고요하고 슬펐다.

당시 현상금 60만 원이 걸렸던 백범 김구 선생보다 더 많은 현상금(100만 원)이 걸렸을 만큼 일제에 큰 위협을 줬던 인물이었음에도 해방 이후 자발적으로 월북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서의 공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충칭 김원봉 장군 집터 광복군 부사령을 했던 김원봉 장군이 살았던 충칭 집터. 지금은 폐업 중인 옷가게만 남은 상황이다. ⓒ 김종훈



더욱 슬픈 건 그가 살았던 중국 현지의 집은 기념 장소가 아니라 시장 한가운데 허름한 옷가게로 쓰이고 있었다. 그마저도 폐업을 앞두고 있었다. 목숨을 걸어가며 일제로부터 해방을 위해 반평생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쳤지만 해방 후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인 노덕술에게 갖은 수모를 당했다. 이후에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더 이상 늦춰지면 안 된다.

로드다큐 제작에 들어가면서 바빠지기 시작했다. 6TB라는 엄청난 분량의 영상을 보기 좋게 '요리'하는 작업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지금껏 내가 한 작업 중 최장시간 분량의 작품이다. 최장시간 분량만큼 최고 난이도일 것이다. 내 가족을 포함한 모든 지인들에게 영상과 책을 통해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을 공유하고 싶다.

4. 최한솔 (임정투어 첫 번째 참가자, 통역)

지난 4월 초 남미여행을 즐기고 있을 때 우연히 인터넷에서 임정투어에 함께할 1인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평소 역사 공부에 흥미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지원서를 작성했다. 수일 후 '함께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김종훈, 정교진, 김혜주 기자를 만났다. 우연히 지원하게 되었지만 진심을 다해 내 의지와 능력을 어필했고 좋은 결과로 이어져 세 사람과 20박 21일을 동행하게 된 것이다.

출발 전 팀원들과 네 번의 만남을 가졌다. 부족하지만 최대한 노력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공부하면서 임정투어를 계획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출발 전에는 역사 답사를 간다는 생각에, 내가 중요한 일을 한다는 생각에 마냥 설레기만 했다. 다만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다른 팀원들을 대신해 통역을 도맡아야 한다는 점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나의 역할은 또렷해졌다. 중국에서 약 일 년 반 동안 생활했던 경험이 유용했다.
 

기차 안에서 20박 21일 동안 6000km가 넘는 길을 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게 온전히 느껴졌다. ⓒ 김종훈



같은 아시아권이어도 중국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른 나라니까~'라는 생각을 하고 바라보아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들이 많았다.

매 순간 충격 받은 팀원들에게 "중국은 이런 문화가 있어서 그래요"라고 설명했다. 팀원들은 내 설명을 듣고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특히 문이 없는 화장실을 경험하고, 중앙선을 넘나드는 택시기사들의 운전 행태에 놀라고, 정해진 출발 시간보다 먼저 출발해 버리는 기차에 당황했다.

그러나 힘들어만 할 순 없었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고생한 만큼 '임정요원들도 이렇게, 아니 이것보다 훨씬 더 힘든 생활을 하셨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답사지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없는, 심지어 관광지도 아닌 그곳에 갈 때마다 방치된 역사의 현장들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내가 왔다 간다고 변화가 있을까, 이미 늦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내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늦으면 찾는 사람 없이 잊혀질 수밖에 없다. 움직여야 변화한다는 말을 믿는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작은 움직임들이 생기길 기대한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