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는 이유로 몸이 시들어가는 당신께

몸으로 성취하는 여성에 대한 오해들... 나는 춤추며 나이 들고 싶다

등록 2018.08.07 12:15수정 2018.08.07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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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유난히 지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였다. 목회자였던 아버지가 지방 소도시 제법 큰 교회의 새내기 목사로 재임하던 무렵이었다. 성장이 빨랐고 엄마는 아파서 유치원에도 1년 일찍 간 나는, 돌봐주는 어른 없이도 동네 조무래기들과 운동장을 거침없이 뛰어놀았다. 교회 사택에 살던 내게 제법 큰 운동장은 나의 '영역' 비슷한 것이었고 그래서 돌이키면 민망하지만 좀 기고만장했던 듯도 하다.

어느 날 내 운동장에 태권도복을 갖춰 입은 사내애가 나타났다. 검은 띠였는지 여하튼 유색의 띠를 의기양양하게 두르고 나타나선, 큰소리를 치면서 "여기서 내 주먹 맞고 안 울 애는 없을걸!" 따위 말을 했다. 어쩐지 자존심이 상한 내가 어디 한번 질러보라며 버티고 섰고, 그 아인 거침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아팠다, 눈물이 핑 돌 만큼. 그런데 참았다. 힘을 쥐어짜서 "별것도 아니네" 하는 반응을 남기곤 돌아섰고 '가오'가 상한 남자앤 사라졌다. 나도 태권도를 배우고 싶었지만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게다가 여자애라서 도장에 다니지 못했고, 자라면서 운동장이 온통 남자들의 차지가 되는 걸 보며 배알이 꼴리는 기분을 느꼈다.

운동장은 왜 남자들 차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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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과 농구 공이 골망을 가르는 순간의 느낌은 짜릿함 그 자체다. ⓒ Mike Wilson, unsplash


몸의 영역에서는 아마 태생부터 페미니스트였나보다. 둘이나 되는 남동생들과 종종 놀다 보니 사춘기 무렵에는 원핸드슛을 날리는, 드문 여자애가 되어있었다. 고등학교 체육시간에 배운 레이업슛도 무척 재미있었다. 몸이 제법 날랜 편이었으니 키만 좀 컸으면 훌륭한 아마추어 농구인이 되었을지도.

대학에 진학해서는 남자들 사이에 껴서 농구 좀 했다고, 대놓고 이상한 여자(그러니까 미친년) 취급을 당했다. 토씨 하나 안 보태고 "저런 게 무슨 여자야?" 소리도 들었고, 코트에서 꺼지라는 듯 부러 거칠게 몸싸움을 걸던 교수(!), 공을 잡는 척 가슴으로 손이 오던 동기놈... 나열하기만도 부아가 치미는 폭력을 겪어야 했다. 단지 남자들의 영역에 끼어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들은 성장과정에서 몸으로 성취를 이루는 경험이 드물거나 그것을 즐기기 어렵다. 내 손을 떠난 공이 골망을 가르는 순간의 그 시원한 쾌감, 땀을 흘리며 무언가를 배우고 될랑 말랑하던 어떤 동작을 드디어 몸으로 체화하는 순간의 뿌듯함 같은 것들.


산만하거나 나처럼 활동량이 많은 아이는 유난스럽다거나 나대지 말라는 퉁을 듣는다(다른 성별이었으면 아마도 칭찬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다움에 더 맞춤한 피아노나 발레 등을 배우며 성장해간다. 운동을 해서 근육이라도 잡힐라치면 치마도 입지 말라는 둥, 운동은 오직 살 빼는 용도로서의 효용이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여자다움' 강요 아래 시들어가는 몸

유교의 영향이 남아있고 서구에 비해 미소지니(misogyny. 여성비하 혹은 여성혐오)가 두드러지는 동아시아의 여성들은 근육량도 최저 수준일 것이다. 이는 선천적으로 피지컬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결국 운동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30세가 넘어가면 근육량이 줄어들기 시작하는데 이 속도를 더욱 부추기는 것이 부족한 영양(다이어트가 뭐라고!)과 운동량이다.

타고난 체력을 모조리 소진하고 정신력으로 버티다가 마흔 즈음이 되면 잔병치레를 하면서 살기 위해 운동을 하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마녀체력>을 쓴 이영미도 타고난 저질체력에 편집자로서 책상머리에서 살다가 최후의 보루에서 시작한 운동을 설파하는 '전도사'가 된 케이스. 

"연약한 것보다 강한 것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일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오늘도 퇴사를 고민하는 직장 후배들에게도 알려 주고 싶다. 체력이 강해지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극복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는 것을."

(<마녀체력> 서문 중에서)

그는 자그마치 철인 3종 경기를 하는 여성이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많은 인내심이 필요한 운동을 잘 견디지 못한다. 마흔 즈음, 다시 춤의 세계로 돌아와야 했다

춤추며 나이 드는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서 걷다가도 음악이 흘러나오면 눈이 번히 뜨이면서 초인마냥 허리가 와자작 펴지는 그런 모습을 늘 떠올리곤 했다. 땅을 쳐다보고 할머니처럼 발을 끌며 걷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종일 학교에서 친구들의 괴롭힘과 따돌림을 받고 나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든 상태로 패잔병처럼 집에 오곤 했다. 그때 내 모습이 얼마나 처량했는지 낯모르는 아저씨가(아마 공사장 잡부였을) "너 무슨 일 있니?"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열 살 무렵부터 고질적인 어깨통증은 그래서 생겼다.

세상이 온통 무거웠고 얼른 어른이 되어 더 큰 곳으로 나갈 날만 꿈꿨다. 운동회 준비를 하느라 매스게임 안무 같은 것을 하면 언제나 주목받고, 칭찬을 받았다. 그때만큼은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애들도 날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 춤이 소중할밖에.

다시 춤으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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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인 헬스 몸에 착하고 나쁨은 없다. 운동은 힘있는 일상을 살게 해주고, 몸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일의 기쁨을 알려준다. ⓒ Jason brisco(unsplash)


21살 무렵 처음 춤을 추기 시작했으니 십여 년을 어깨가 굳은 채 거의 앉은 자세로 생활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나마 춤을 추고서는 통증이 별반 없었지만 이를 그만두자 몸에 문제가 생겼다. 30대 중반을 넘겨 척추측만이 온 것이다.

수술을 해야 할 만큼 심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에스(S) 자로 휜 척추는 내장을 압박했고, 순환계에 문제가 생겼으며 신경통으로 양치질을 하다 손목이 아파 '억' 소리 나는 지경이 되었다. 결국 살기 위해 몸을 바로잡고, 이를 유지할 근력을 갖추기 위해 운동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빚을 내서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고, 유기농 먹거리로 식단을 채웠다. 다시 춤도 시작했다.

다행히 내 몸은 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 번 배워두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춤의 매력. 곁가지를 치듯 다른 춤으로 옮겨가도 습득해놓은 것들은 큰 어려움 없이 활용할 수가 있었다.

20대 초반 올드스쿨 힙합을 추면서 파워풀하고 큰 무브먼트에 익숙해졌고, 이제는 이를 한정된 커플 춤의 문법 안에서도 발산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솔로 댄서로서의 장점을 커플 춤에서 자신을 돋보여야 할 순간에 비기처럼 짠~ 꺼내놓으면 된다(물론 아주 많은 연습과 적절한 센스, 타이밍 캐치가 필요하다).

다행히 지금 추고 있는 웨스트코스트 스윙(웨코)과 주크댄스는 개개인의 댄서 역량이 필요한, 어찌 보면 현대무용스러운 춤이다. 둘이 함께 움직이지만 공작새처럼 춤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팔로워의 롤을 수행하려면 우선 곧고 바른 몸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주크는 '댄서를 위한 춤'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웨이브와 아이솔레이션(몸 전체에서 한 부분만 움직이는 것)은 기본이어서 춤 초보에겐 좀 버겁다.

그 와중에 주크는 굽이 있는 신을 신을 때가 많은데, 이것은 아직 적응 중이다. 작년에 다친 발목이 아직 완전하지 않아서 4센티 이상은 무리다. 힐이라고 해도 사실 여성들이 멋으로 신는 하이힐이 아니고, 충격을 흡수하는 쿠션이 내장된 댄스슈즈는 그보다 훨씬 편하다. 게다가 같은 디자인이라도 발 모양에 딱 맞춰서 제작하기에 피로도 덜 쌓인다. 걸그룹이 괜히 힐을 신고 춤을 출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커플 댄서들은 생각보다 연령대가 높아서 춤을 추기 전후로 몸을 잘 풀어주고 평소에도 요가나 스트레칭으로 관절을 돌보며 유연성과 근력을 다져야 한다. 내가 커플댄스 입문 당시에 췄던 스윙댄스(린디합)는 20대 중후반에서 30대가 주연령대이고(활동량이 갑!), 웨스트코스트 스윙, 살사와 탱고는 그보다 높은데 아예 중년댄서들을 위한 동호회가 따로 존재하기도 한다.

터치는 약속일 뿐, 춤추는 몸은 내 것

카페 등 온라인 공간에서 연령을 제한하는 동호회들도 있는데 그것은 누구에게나 오픈했을 때 과도한 작업이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대개 '어린 여성 손 잡으려고 오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호회마다 운영진이 내규를 만들어 공지하고 있고 여러 문제를 예방하거나 일어났을 때 해결하기 위해 규모가 큰 곳에서는 아예 '윤리위원회' 등의 문제해결기구를 따로 두기도 한다.

춤을 추던 도중 언어적·신체적 성희롱을 당하면 춤을 중단하거나 끝난 후라도 문제를 제기하면 된다. 말처럼 쉬운 건 아니고 모든 경우가 잘 해결된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킨 댄서는 나중에라도 도태되기 때문에 그때그때 필요한 증언을 확보해두는 것이 좋다. 증거가 없더라도 몇 월 며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록해두는 것, 그리고 신뢰할 만한 댄서에게 이를 얘기해두는 일 등이다. 단톡방에서 계속 (우스개로) 야한 이야기를 하는 회원이 제재를 받는 것도 본 적이 있다.

춤마다 허용되는 터치가 있고, 이건은 서로의 약속이고 규칙이다. 이를 스킨십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고, 댄서의 몸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것. 춤마다 허용되는 터치가 다르지만, 신호를 주고받기 위한 것이지 스킨십과는 명백히 다르다. 손이나 등을 잡고 춤을 추는 것과 그 손을 더듬거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 실수로 그럴 순 있지만 당하는 사람은 실수인지 고의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무조건 참으면서 출 필요는 없다. 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부족함이 있겠지만(커플댄스계 '미투'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동호회나 춤판의 평판을 위해서라도 댄서를 돕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러니 두려움으로 시작조차 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춤은 어디까지나 건강과 즐거움, 그리고 좋은 사귐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기자의 브런치에도 송고합니다. https://brunch.co.kr/@stranger9199
#여성 #운동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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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하셨습니까>를 썼고 인권, 여성 분야와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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