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제가 된 소녀들... 여성은 그런 존재였다

[피렌체 삐딱하게 보기] 르네상스의 아웃사이더① 배제되었던 다수 '여성'

등록 2018.08.08 10:27수정 2018.08.0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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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메디치가의 피렌체는 페리클레스의 아테네가 아니라 오히려 스파르타 같은 도시였으며, 자유롭고 열린 도시가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생활방식에만 집착하는 닫힌 도시였다는 점이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집시와 르네상스, 김운찬 옮김, 문학동네, 26쪽)

르네상스 시절 피렌체는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다양성이 존중되고 여러 문화가 섞이면서 창조의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였다. 그리고 유럽 최초로 공공 고아원과 병원을 설립할 정도로 시민의식이 앞서 있었다.

현대에도 많은 학자들과 여행자들이 피렌체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하지만 어떤 시대의 어떤 도시가 아름답기만 할 수 있을까? 과연 피렌체는 모두에게 열린 도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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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노첸티 고아원(Ospedale degli Innocenti) 브루넬레스키가 설계 했으며, 1445년 설립된 최초의 고아원이다. 현재도 운영되고 있다. ⓒ 박기철



거주하되 '시민'이 아니었던 여성

피렌체의 공화정은 '자격 있는 시민들 간 무차별 평등'이라는 원칙 하에 추첨으로 정부 관료를 선출했다. 하지만 '자격 있는 시민'이 되기는 어려웠다. 정치에 참여하려면 세금 체납이 없고 길드에 가입된 남자여야 했다. 1398년 조사에 따르면, 총 21개의 길드가 있었고 전체 회원 수는 약 4500명이었다(주요 7개 길드는 2천 명, 나머지 14개 길드는 2500명).

당시 인구가 4만 여명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전체 인구 중 단 10퍼센트 남짓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나머지 90퍼센트는 배제되었고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아웃사이더는 여성이었다. 여성들이 사회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어떻게 배제되었는지 보여주는 여러 사례가 있다.

피렌체 사람들에게 각 구역의 수도원은 가치관 형성의 구심점이었다. 당시 수도원들은 여성을 어떻게 보았을까?

피렌체 수도원에서는 '여성들은 이 자유 도시의 시민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하며…… 옷과 보석에 금과 은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안톤 질 지음, 미켈란젤로, 이명혜 옮김, 생각의 나무, 56쪽)

사정이 이렇다보니 여성들은 희로애락을 가진 한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물론 중세에 비해 처지가 다소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들은 '어머니, 수녀, 여왕, 시인의 찬미 대상' 등 관념화된 대상으로만 가치를 인정받았다. 피렌체에서 만나는 예술 작품에 여성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살펴 보면 이런 경향을 쉽게 알 수 있다.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역시 다소 편협한 여성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작품에서 극단적인 남성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에서 여성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나마 등장한 여성들은 남성처럼 우람한 근육이 두드러지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미켈란젤로는 유화가 조각에 비해 수준이 낮다며 무시했다. 그는 유화를 비하할 때 '여성들에게나 알맞은 분야'라는 표현을 썼다. 미켈란젤로뿐 아니라 당시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여성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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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도니 톤도(Doni Tondo) 앞에 있는 여성은 건장한 남성 못지 않은 팔근육을 가지고 있다 ⓒ 우피치 미술관 소장


가난한 이민 여성들은 관념화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1403년 피렌체 정부는 공공 유곽을 관리하기 위해 '오네스타(Onesta)'라는 기관을 만든다. 오네스타는 가격을 관리하고 매춘부들에게 등록비와 세금을 걷었다. 그리고 미혼인 소년과 젊은 청년들 외에는 엄격하게 출입을 제한했다. 

피렌체 정부는 혈기왕성한 소년들이 성욕을 못 참고 정상적인 가정의 소녀들을 범할까 걱정했다. 그래서 소년들의 성욕을 해소시키기 위해 하층민의 딸이나 이민 여성들로 공공 유곽을 만들었던 것이다. 

미혼 청년들만 출입이 가능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법은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과거 대한민국의 판결처럼 피렌체에서도 같은 여성이라도 그 가치는 달랐다.

합법적인 여성 혐오

지위가 높은 여성이라고 남성들과 법적으로 평등한 것은 아니었다. 1378년, 나름 고귀한 집안의 딸인 니콜로사 소데리니는 '검은 가죽에 장식이 있는'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았다. 이 판결을 받았을 때 그녀는 불과 열 살이었다.

1433년에 만들어진 법에서는 '여성들의 몰상식함'을 비난하며 옷 장식을 함부로 달지 못하게 했다. 여자들은 손목과 팔꿈치 부분을 제외하고는 옷에 단추를 달 수 없었다. 하녀들은 단추를 포함해 어떠한 장신구도 달 수 없었고 머릿수건과 나막신만 허락되었다.

이것이 그 당시의 법이다. (중략) 하지만 이런 법률 뒤에 담겨 있는 여성 혐오론자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가? 법률을 어기고 가슴에 은단추로 멋을 부린 여자는 발가벗긴 채 길바닥에서 채찍질을 당해야 했다. 이런 사회 전체의 가학적인 징벌에서 전율이 느껴진다.(팀 팍스 지음, 메디치 머니, 황소연 옮김, 청림출판, 69쪽)

정부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자들의 풍기문란을 단속했고 여자들은 교묘히 피할 방법을 찾는 두뇌 게임이 반복되었다.

법이 이렇다 보니 재판 역시 여성에 대한 편견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로마의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 1578-1644)는 친구의 딸이자 문하생이었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3)를 성폭행한 혐의로 1612년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때 타시의 죄목은 '처녀성 강탈'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아르테미시아의 '처녀성을 빼앗은 것'이 죄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여성의 처녀성 역시 중요한 재산 중 하나였다. 때문에 이 재판에서는 성폭행보다는 타인의 재산을 갈취했는지 여부가 초점이었다.

그래서 아르테미시아가 겁탈 당하기 전에 성경험이 있었다면, 즉 처녀가 아니라면 타시는 무죄가 되는 것이다.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이 정말 처녀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치스러운 검사를 여러 번 거쳐야 했다. (관련기사 : '선혈이 줄줄'... 여성화가의 한맺힌 복수)

물론 이 재판은 피렌체가 아닌 로마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피렌체의 군주인 코시모 2세 메디치가 재판에 압력을 행사했으며,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역시 성폭행 피해 여성에 대한 시각은 비슷했다.

그래도 아르테미시아처럼 남자 가족이 있는 경우는 법에 호소라도 할 수 있었다. 가족이나 친지가 아무도 없었던 여성들은 더 험한 일도 당해야 했다.

치료제로서의 소녀들

과거에는 현대의 매독으로 추정되는 '폭스(pox)'라는 성병이 유행했다.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한 여러 처방 중에는 '처녀 치료'라는 것이 있었다. 폭스에 걸린 남자가 성경험이 없는 소녀와 관계를 가지면 남자 몸에 있는 독성을 뽑아낼 수 있다는 치료법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소녀들을 구하는 것은 어려웠고 돈도 많이 들었다. 주로 부유한 귀족들이나 상인들에게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이런 소녀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무리 가난해도 처녀 치료에 딸을 선뜻 내어줄 부모는 없었다. 이러다 보니 좀 더 통제가 쉬우면서도 뒤탈이 없는 대상을 찾게 된다. 바로 피렌체 곳곳에 있던 보호시설의 고아 소녀들이 처녀 치료에 쓰이게 된다.

16세기 후반 피렌체를 통치했던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Francesco I de' Medici, 1541-1587)는 딸 엘레오노르 데 메디치(Eleonor de 'Medici, 1567-1611)를 빈첸초 곤차가(Vincenzo Gonzaga)에게 시집 보내길 원했다. 곤차가 가문은 파도바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곤차가는 100만 두카토의 지참금 등 여러 무리한 요구를 제시했다. 결국 메디치 가문과의 혼담은 깨지고, 빈첸초는 다른 가문의 마르게리타 파르네세(Margherita Farnese)와 결혼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빈첸초가 성불구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결혼 생활은 파탄을 맞는다.

이혼 후 이번에는 빈첸초가 다시 메디치에게 혼담을 건넨다. 입장이 바뀐 메디치는 지참금을 대폭 깎았다. 그리고 빈첸초의 성기능이 정상인지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증명 방법은 빈첸초가 처녀를 임신시키는 것이었다. 몇 번의 협상 끝에 메디치에서 처녀를 구해오는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제 메디치 가문에서는 비용이 적게 들고 검증이 끝난 뒤에는 쉽게 무시해버릴 수 있는 피렌체의 처녀를 찾는 일에 착수했다.(니콜라스 터프스트라 지음, 피렌체 뒷골목을 가다, 임병철 옮김, 글항아리, 348쪽)

이런 일은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 대중들에게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결코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렌체 정부의 통제 하에 있던 공공 보호시설들 중에서 소녀를 찾기로 했다. 당시 시설을 관리하던 사제들은 조건에 맞는 여러 소녀를 추천하면서 적극 협조한다. 결국 '피에타의 집'이라는 시설에서 21살의 고아 줄리아가 선택되었다.

사실 여기에는 숨겨진 또다른 목적도 있었다. 난봉꾼 빈체초가 폭스 환자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앞서 말한 처녀 치료도 겸한 검증이었다. 줄리아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임신을 한다. 빈첸초에 대한 검증이 끝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메디치 가문은 빈첸초를 사위로 맞아들인다. 줄리아와 아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이상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도시 인구의 절반은 여성이었지만 사회 분위기와 법 제도에 의해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여성들 외에도 하층 노동자나 성소수자, 이민자 등 수많은 아웃사이더들이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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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의 집'이 있었을 거라 추정되는 거리 왼쪽 건물은 피렌체 미술사 연구소로, 이 건물이 '피에타의 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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