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냄새 때문에..." 멈칫한 택배기사가 슬프다

[명랑한 중년] 111년 만의 폭염, 도무지 명랑하기 힘든 나날

등록 2018.08.06 11:40수정 2018.08.0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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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외벽 균열 공사와 칠 공사를 한다는 안내문을 승강기에서 봤는데 오늘이구나. 하필, 111년 만의 폭염이라는데 ⓒ unsplash


아침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우리 집 강아지 짖는 소리가 난다. 이 아이들은 사람만 보면 좋아서 발라당 배를 까고 웬만해서는 잘 짖지 않는데. 이상하다 싶어 거실로 나와 보니, 베란다 밖으로 아저씨 2명이 밧줄에 매달려 있다.

아파트 외벽 균열 공사와 칠 공사를 한다는 안내문을 승강기에서 봤는데 오늘이구나. 하필, 111년 만의 폭염이라는데. 베란다 문을 열고 시원한 물이라도 전해줄까 하고 쳐다보니 허리춤에 물병이 매달려있다. 나는 얼른 에어컨을 껐다. 뜨거운 환풍기 바람이 두 분을 향하고 있었다.


1시간쯤 후, 아랫집 베란다에 약간의 누수가 있다고 아파트 관리실 담당자와 보수작업을 맡은 관리소장이 집에 왔다. 관리소장은 베란다 큰 문을 열고 몸을 바깥으로 쑥 빼서 균열 간 외벽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관리소장의 허리춤을 움켜잡고 소리쳤다.

"어머 조심하세요. 떨어지면 어쩌시려고."  

우리 집은 밑을 내려다보기도 무서운 22층이다. 그 분은 내 행동에 당황하셨는지 어색하게 웃으시며 괜찮다고 했다. 순간 나도 당황해서 허리춤을 놓아야 할지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할지 안절부절 못했다. 그는 이쪽저쪽을 꼼꼼히 확인했고 금세 땀범벅이 되었다.

"덥다고 일 안 하면 우리 같은 사람은..."


봄에 담근 매실음료에 얼음을 띄워 드리며 말했다.

"저기, 날이 너무 더운데 일하시는 분들 이러다 큰일 나겠어요. 더위 좀 가시고 일 시작하면 안 돼요?" 
"아이고, 걱정해주셔서 감사한데 덥다고 일 안 하면 우리 같은 사람은 여름에 먹고살기 힘들어요. 일정이 잡혀있어서 기한 내에 끝내야 되기도 하고요."

말문이 탁 막혔다. 이런 날씨에 누가 땡볕에서 일하고 싶겠는가. 다른 이의 생계 앞에 부질없는 오지랖을 부린 것 같아 얼굴이 화끈했다. 내 민망함을 눈치 챘는지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이런 날씨에 이런 일한다고 걱정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일 할만 해요. 얼음물도 주시고 아이스크림도 주시고. 이렇게 매실도 주시잖아요. 그리고 한낮에는 우리도 일 못해요."

균열부위 확인이 끝나고 두 분은 돌아갔다.

밧줄이 아직도 흔들거리는 걸 보니 아직 작업 중인가 보다. 작업하시는 분들이 우리 집을 벗어나긴 했어도 에어컨을 틀기는 왠지 죄스럽고 집안에서 에어컨을 안 켜고 있자니 숨이 막혀 집 근처 서점으로 피서 가려고 주섬주섬 준비했다.

여름에는 세탁소에 맡길 옷이 별로 없다. 남편 양복바지가 유일하다. 그러니 바지 하나 맡기려고 세탁소 아저씨를 부르기 뭐해서 나갈 때마다 들고 나가서 직접 맡긴다. 바지 하나를 챙겨 들고 세탁소를 향했다.

세탁소에서는 주변 상가 사람들이 모여 수박 파티가 한창이었다. 나는 이 아파트에서 15년째 거주중이고 이 상가는 규모가 매우 작아서 나는 거의 모든 상가 사람들과 알고 지낸다. 슈퍼, 치킨 집, 보습학원, 미용실 등 모두 나의 단골집이다.

자연스레 나도 거기 끼여 수박을 해치웠다. 오늘은 세탁소 사장님이 수박을 쐈고 내일은 치킨집 사장님이 쏠 테니 내일도 오라고 한다. 한 지붕 세 가족 같은 훈훈한 분위기. 그런데 이런저런 말을 하다 보니 주제가 자연스레 아파트 보수작업 하는 사람들로 흘러간다.

이 땡볕에 너무 고생한다며 이런 날씨에 일하다 '사람 죽는다'고 관리실에 민원을 넣어야겠다고 한다. 나는 생계 어쩌고 하는 얘기를 하려다 그냥 조용히 나왔다. 잘 먹은 수박이 체할 거 같았다.

시원한 서점에서 바라본 공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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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 최악의 폭염이 계속된 2일 아침 서울 세종로사거리에서 사람들이 뜨거운 도로를 건너 출근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집 앞 10분 거리인 서점을 향해 가는데 이게 웬일. 낡은 상하수도 배관 교체공사를 한다고 아스팔트를 부수고 있다. 긴팔에 안전모를 쓴 사람들이 차량 통제를 하며, 도로 한가운데 서서 우회길 안내를 하고 있다. 굴착기 앞에서 삽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그 잠깐이 현기증을 불러 올만큼 뜨거웠다.

미리 잡힌 일정이라 이렇게까지 더울 줄은 몰랐겠지. 그래서 이런 날 이런 작업을 하는 거겠지. 저 분들은 생계가 달린 거니 함부로 민원을 넣으면 안 되는 거겠지. 일사병으로 사람이 죽기도 하는데. 무게 없는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서점에 들어오니 살 것 같다. 서점에 딸린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들이켰다. 신간들을 살펴보고, 읽고 싶은 책 몇 권을 골라 창가에 비치된 의자에 앉았다. 창밖으로 공사현장이 보인다. 도로 위에는 미친 열기가 흐물흐물 머리를 풀어헤치며 떠오르고 있었다. 눈이 자꾸 밖을 향한다. 불과 20여 미터 앞에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있다.

공사장 옆, 가로수 아래에 옷으로 얼굴을 덮고 누워 쉬는 사람들. 도로 옆이라 지열이 50도는 족히 될 거 같은데 축 늘어져있다. 엄마 따라 서점에 온 어린 아이는 굴착기가 밖에 있다고 연신 좋아라고 쫑알거린다.

같은 굴착기를 바라보는 나와 아이의 온도차는 북극과 적도 차이가 났다. 다만 지쳐 보이는 아이 엄마의 영혼 없는 리액션에는 온도가 없다. 이 와중에 정신 나간 내 다리는 서점에서 틀어놓은 음악에 맞춰 까딱거리고 있고, 철없이 삐져나온 내 머리카락은 '엘라스틴 했어요'를 뽐내며 에어컨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너무 덥죠? 이거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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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아저씨는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는 나를 보더니 멈칫한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연합뉴스


집으로 오는 길,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입맛이 없을수록 맛있는 걸 해 달라는 식구들 때문에 요리 콘텐츠가 바닥이 난 나도 곤혹스럽다. 신박한 뭔가를 해달라는데 된장찌개에 오이라도 넣어야 할까 보다.

결국 찬거리는 조금 사고 아이스크림과 간식거리만 잔뜩 샀다. 한 5분 걸었는데 땀이 앞을 가린다. 승강기에 타고 문이 닫히려는데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재빨리 열림 버튼을 눌렀다. 택배 아저씨다.

그런데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는 나를 보더니 멈칫한다. "어서 타세요." 내 말에 그는 주저하며 "땀 냄새가 나서..."한다. "아휴, 이렇게 더운데 땀나는 건 당연하죠, 괜찮아요. 어서 타세요."

그가 타고 문이 닫히자 순식간에 땀 냄새가 꽉 찼다. 나는 입으로만 숨을 쉬었다. 그는 방금 물에서 나온 사람처럼 온 몸이 물로 흥건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쭈쭈바를 하나 꺼내서 "너무 덥죠? 이거 드세요" 했다. 그는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진짜 너무 덥네요" 답했다. 짧은 순간 몇 마디를 나누고 그가 내렸다.

집에 들어와 짐을 내려놓고 물을 한잔 마신 후, 속으로 천천히 열을 세었다. 베란다 밖, 밧줄이 사라진 걸 보니 오늘 공사는 끝났나 보다. 공기 탈취제를 들고 승강기로 갔다. 온 몸이 땀에 절은 그가 신경 쓰여 타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냄새를 향해 분무기를 쏘아댔다.

하루 종일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그 뭔가를 털어 내듯 마구마구. 날이 더워서 목구멍까지 뜨거워지더니 급기야 날이 더워서 눈에서도 땀이 났다.

그렇게 더운 하루가 겨우 갔다.
#폭염 #보수공사 #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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