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김태리가 전등 점등식에서 만난 건 우연이 아니다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 행간 읽기 1] '미스터 션샤인'과 주사 서병달 사건 (상)

등록 2018.08.15 18:13수정 2018.08.1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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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미스터 션샤인> 스틸컷 ⓒ tvN


<암살>, <밀정>, <조선총잡이>, <미스터 션샤인>. 이런 영화나 드라마들의 공통점이 있다. 구한말이나 식민지 시대가 시간적 배경이라는 것. 그만큼 스토리의 기본이 되는 역사적 사실의 조합이나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미술에 공을 들인다는 것이다.

당시 실제 상황은 사진이나 외지인들의 기록으로 꽤 많이 남아 있다. 이미 신문이 나오기 시작했고, 몇몇 우리 역사서도 있다. 그런데 이들 기록과 맞춰보면 위의 작품들에 약간씩 오류가 있다는 생각이 항상 든다.


여러 역사서 가운데  매천 황현(1855~1910)이 쓴 편년체 역사서 <매천야록>은 마치 신문을 보듯 사건 혹은 당시 화제를 시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황현은 전남 광양에서 출생해서 구례에서 성장한 시인이자 구한말 우국지사였다.

그가 낸 역사서는 기록방식의 주기성과 일관성이 다소 부족하지만 당시 생활상을 짐작해보는 데 매우 유용한 측면이 있다.

구한말 우국지사가 남긴 편년체 역사서

1864년 고종 1년, 즉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작 시기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47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매천야록>은 총 6권 7책으로 구성돼 있다. 기록이 1910년에 끝나게 되는 것은 그가 향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황현 선생은 대한제국의 국권이 박탈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에 항거하며 경술국치일(1910년 8월 29일)에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소주에 아편을 섞어 자결했다.

1권이 '상하 2책'으로 되어 있고 나머진 1권이 한 책으로 집필돼 있다. 선생이 직접 쓴 필사본 형태의 저서로, 시대상을 감안하면 은밀히 볼 수밖에 없는 내용의 책이었다. 역사적 격변의 시기에 무능하고 부패했던 조선 정부를 서슴없이 비판했고, 청과 서구열강의 정치·경제적 개입은 물론 일제의 학정과 민중의 핍박 받는 현실도 거침없이 담았다.


해방 전에 이미 조선사편수회에서 저서의 존재를 알았지만 편찬하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책의 내용상 발각될 경우 보존하기 힘들 것을 염려해 후손들이 사본까지 만들어 지켜오다가 해방 이후에 공개됐다.

사실 이 책은 구한말 굵직굵직한 사건들보다 그 사이 사이에 남겨진 당시의 세태와 풍속 혹은 달라지고 있는 문물에 대한 기록들이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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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 선생과 '매천 야록' 전라도 광양에서 태어난 황현 선생은 한말 4대 시인으로 꼽히며, 젋은 시절 한양으로 올라와 과거를 보고 성균관 유생이 되기도 했으나 과거제도의 부패를 목격하고 낙향했다. 오른쪽 사진은 선생이 남긴 편년체 역사서 ‘매천 야록’ ⓒ 매천황현선생기념사업회


책의 내용이 시절의 엄중함을 거스르고 있으니 당연히 후대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만은 못하지만 서점에 가면 다양한 <매천야록> 정본이나 해설본을 만날 수 있다.

1990년 금성출판사의 소년소녀한국고전문학 시리즈로 나온 어린이용 <매천야록>에서부터 원문과 번역본을 충실히 제공하고 있는 <매천야록 상중하 3권>(명문당, 역자 이장희, 2008)까지, 대략 20여 종이 출판됐다. 황현 선생은 눈에 띄는 관직을 한 적이 없는 초야의 학자이자 시인이었기에 다소 늦게 조명된 점은 분명 있다.

이 책은 고문이라서 번역하더라도 단어 등이 생소한 것들이 많고 심지어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이 택하고 있는 역사서술 방식이 부분적으로는 기사본말체도 넘나들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조선왕조실록>처럼 편년체라서 한계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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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출간된 '매천야록' 편역서들 왼쪽에서부터 ‘지식인의 눈으로 바라본 개화와 망국의 역사-매천야록’(허경진 역, 서해문집, 2006), ‘한권으로 읽는 매천야록’(나중헌 역, 북랩스, 2012), ‘매천야록 상중하(이장희 역, 명문당, 2008), 매천야록-전3권(임형택 역, 문학과 지성, 2006) ⓒ 각 출판사


편년체 역사서는 시간 순으로 기록돼 있으므로 어떤 사건 전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관련된 기술을 일일이 다 찾아 다시 맞추어야 하는 단점이 있고 그마저도 기록이 촘촘하지 않을 경우 불가능한 면이 있다.

마찬가지로 <매천야록>도 한 개인이 주변의 소문, 누가 전해 준 정보, 구한말 신문 등에서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기록한 것이어서 기록의 간극이 촘촘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특히 신문물이나 정치적인 이슈들에 대한 황현 선생의 기록은 정보의 양과 사전 지식의 한계로 인해 단편성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많다.

고로 다른 역사서나 후대의 연구를 통해 황현 선생이 기술한 <매천야록>의 행간을 메워보는 일은 재미있는 역사 탐구가 될 수 있어 보인다. 본인은 글 읽기를 도와주는 주석이 나름대로 잘 달려 있는 <지식인의 눈으로 바라본 개화기 망국의 역사-매천야록>(서해문집, 허역자 이경진, 2006)을 참고하는 편이다. 또한 부족한 정보에 대해서는 다른 여러 자료들을 통해 보완해가면서 당시 시대상을 그려보고 있다.

그런 작업의 일환으로 구한말 이 땅에 들어온 전기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고자 한다.

<미스터 션샤인>과 주사 서병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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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한장면 이병헌, 김태리 주연의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자주 등장하는 진고개(현 충무로)에서 전등 점등식 날 두 사람은 첫 조우를 한다 ⓒ tvN


구한말 대한제국 시절을 다룬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스토리의 한 축으로 미리견(彌利堅)이 나온다. 바로 미국을 의미한다. 드라마 스토리 상 미국의 역할이 뭔지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구한말 조선반도에서의 미국 행보 중 전기사업은 빼 놓을 수 없는 얘기다.

<미스터 션샤인> 2화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조선의 거리에 가로등이 갑자기 켜지고 전차가 지나간다. <미스터 션샤인>의 시대 배경은 바로 전차가 막 도입된 초창기이자 '주사 서병달' 사건이 있기 얼마전으로 보인다.

전차는 이미 1899년에 몇몇 노선이 운행되기 시작했고 전등도 그 이전에 들어와 있었으니 말이 안 되는 시대 묘사는 아니나, 세세하게 따져 보면 허점이 보인다.

이 두 가지의 신문물은 고종이 설립한 최초의 대한제국 전기회사 한성전기의 사업이었으며, 이 사업에 미국인들이 관여했다. <미스터 션샤인>의 오류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일단 <매천야록>에 언급된 전기사업에 대해 확인해보자.

<매천야록>에는 전기사업 중 전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전차에 대한 격찬이나 비판이 아니라 서병달이라는 사람이 연루된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매천야록> 제3권에 따르면, 1903년 계묘년에 주사 서병달이 방문을 붙이는 등 무리를 선동하여 전차 탑승을 막았고 심지어 사람들은 전차에 돌을 던져 부수기까지 해 미국인들이 대한제국 정부에 얘기해서 서병달을 가두게 했다.

전차 운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원래 미국인이 관리하다가 3년 후에 돌려주기로 했는데, 미국이 이를 지키지 않자 주사 서병달이 나섰다고 <매천야록>에 기록돼 있다. 하지만 도대체 서병달이라는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왜 그런 일을 벌인 건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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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전기 창립자와 하청업자들 헨리 콜브란(Henry Collbran) 영국 태생의 미국 콜로라도 사업가로 미국 콜로라도 중부철도회사(Midland Terminal Railway of Colorado)의 사장을 역임했다. 1896년 제임스 모스(James Morse, 毛斯)의 경인철도 부설사업의 도급공사를 맡으면서 대한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사업가 보스트윅(Harry Rice Bostwick, 寶時旭)과 세운 회사가 고종이 설립한 대한제국 최초의 전기회사 ‘한성전기’의 공사와 운영에 대한 도급사업을 맡기 위해 ‘콜브란-보스윅 회사(Collbran&Bostwick Company)’를 설립했다. 사진은 왼쪽에서부터 콜브란, 고종황제, 보스트윅. ⓒ 박성호


대한제국에서 전차가 운행되기 시작한 것은 1899년이다. 이를 위해 고종은 1898년에 한성전기라는 회사를 세웠다고 한다. 형식적으로는 1898년 1월18일 이근배, 김두승이 전차, 전등, 전화 설비의 사업을 위한 운영권을 농상공부에 신청해 26일 허가를 받은 걸로 되어 있지만, 30만 원이라는 자본금 계획(전차, 전등, 전화 각 10만 원)에 의해 투자된 재원은 전적으로 왕실의 돈이었다.

한성전기, 그 뒤에 미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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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전기회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런데 이 한성전기는 기술이 없었기에 당시 경인철도 등 철로공사를 위해 들어와 있던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윅(콜브란-보스트윅 상사)에게 공사 및 회사의 운영 전반을 맡기게 됐다. 그래서 서대문-종로-홍릉(1899), 종로-남대문-용산(1899), 남대문-서대문(1900)에 세 노선이 운행된다.

뿐만 아니라 전차를 운행하기 위한 발전설비가 있던 동대문에 200KW 발전설비를 증설해 1900년 4월 10일 종로에 가로등을 밝혔다. 1901년에는 상가와 주택가에 전등사업을 시작하면서 전기사업을 더욱 본격화했다. 야간 점등 사업은 전차의 운행을 야간으로 확대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한성전기가 콜브란 등과 맺은 운영청부 계약은 미국인들이 엄청나게 이익을 챙기는 계약이었다. 회사 운영의 전권을 받음은 물론, 용역비로 수입·지출 전 비용의 12%를 받고, 외국인 근로자에게 선지급하는 임금에 대한 10% 이자까지 챙겼다. 거기에 관련 공사들을 다가져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기술과 운영 노하우가 없는 조선 정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초기엔 요금이 비싸서 이용율이 신기한 문물을 그냥 체험해보는 호기심용에 그쳤다. 실질적인 운송사업이 되지 못한 것이다. 선로, 전차, 발전 설비 및 석탄 등의 매출원가도 엄청 높아 전차사업은 당연히 적자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엔지니어, 전차기사 등 고용된 외국인들의 인건비는 고용안정을 빌미로 엄청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1904년 8월부터 1909년 5월까지 31만 1615원의 순이익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했다. 1904년 미국인 소유의 한미전기회사로 바뀌고 나서 이런 손익구조가 개선된 걸 보면 고의적인 적자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점점 적자가 누적되자 미국인들은 미지급에 대한 저당을 빌미로 한성전기회사를 차지했고, 이를 일본에 넘길 작업들을 한창 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바로 1902년~1903년 시기였다. 원래 1년 계약이었고 기술 및 운영에 대한 것을 점차 조선에 넘겨줘야 했지만 교묘하게 이를 지연시켰다.

뿐만 아니라 애초 계약시 회사재산 전체를 공사대금의 담보로 제공한 게 문제였다. 1902년 이들은 한성전기 채무액으로 약 150만 원을 요구했지만, 상수도 사업 등 다른 사업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 바로 수금하진 않았다. 이후 기대감이 사라지자 같은 해 8월 15일 미국공사 알렌은 대한제국 정부에 문서를 보냈다. 채무 미변제에 따라서 한성전기의 자산은 콜브란 측의 소유로 바뀌었다는 선언이었다.

'전차거부' '도보출근'... 백성들이 일으킨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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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미스터 션샤인>에도 나온 '독립신문' ⓒ tvN


그들은 한성전기에서 대한제국의 국기를 내리고 미국 국기를 거는 등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전차가 신기한 문물임은 분명하지만 조선 백성들의 반감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개통 직후인 1899년 5월 26일 종로 2가에서 한성전기회사 사장과 소수의 승객이 황후의 능으로 가는 길에 다섯 살 어린아이가 전차바퀴에 깔려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운전사는 일본인, 차장은 조선인이었는데, 사고가 났는데도 그냥 지나가려 하자 아이의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승무원에 덤벼들었다.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승무원들에게 돌을 던지고 전차를 부수기 시작했고 급기야 석유를 부어 차량을 전소시켜 버리고, 그 다음에 오는 전차까지 전복시킨 사건이 있었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고종은 특별담화까지 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다음날 5월 27일 <독립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당시 일자리를 잃은 인력거꾼들도 전차 운행을 위협했다고 한다. 결국 한성전기 일본인 승무원, 기술자, 사무원들이 본국으로 가버려 3개월간 전차 운행이 정지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 도륙비지 사건'이라고 불리는 기독교 탄압사태까지 발생했다. 1900년에 당시 친러 세력이었던 김영준(군부대신), 이용익(내장원경)은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이 피폐해질 것을 우려해 백성들에게 전차승차 거부를 요구했고, 이를 안 고종이 호통을 쳤다.

하지만 이들은 12월 1일을 기해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을 죽이라는 비밀스러운 교지를 각 도에 뿌렸다. 결국 언더우드 박사가 발 빠르게 움직여 미국공사 알렌에게 알리고 알렌이 고종황제에게 기독교인 보호를 요청했다. 고종은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가해도 하지 말라는 칙전을 전보로 날리면서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됐다. 하지만 채권을 이용해 한성전기를 먹으려는 미국인들의 속셈이 드러나면서 대한제국의 반발이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1902년에서 1903년 사이 대한제국 정부의 몇몇 관료들이 콜브란 측에 강하게 저항했으나 실효는 없었다. 먼저 관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의 전차 승차거부가 일어났고 채무 확인을 위해 한성전기에 대한 원장조사를 시도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그 이듬해 오히려 위정척사파들이 백성을 동원해 전차사업을 환수하려고 움직였다. 1903년 5월 15일에 주사 김중진이 전차를 타는 조선인들은 대한제국의 신민이 아니라는 포고문을 붙이기도 했다. 바로 그 다음날(5월 16일) 서병달 주사가 종로에 나타나 전차를 타지 말자고 일장 연설을 했고 바로 한성전기의 직원들에 의해 제지당해 경무청에 구금되게 된다.

이 사건은 당시 <황성신문> 5월 18일자에 보도되기도 했다. 아마 황현 선생도 이 기사를 봤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전차 승차거부 운동은 더 거세졌다. 7월 10일에는 손진민 등 10명의 연명으로 각 동과 신문사에 승차거부 참여 통문이 돌았고 실제 황성신문 및 제국 신문 등에 보도됐다. 대한제국 관리 일부는 도보출근을 결의하기도 하고 여러 동네에 승차거부운동에 대한 방이 붙기도 했다. 일각에선 승객들에게 욕설을 하고 오물을 던지거나 매표상인들을 위협하는 과격한 움직임까지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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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신문> 전차사업 하청업자인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윅의 횡포를 보도한 <애국신문> 기사 ⓒ 애국신문


지금이야 한국전력이 국영기업이지만 당시 한성전기는 결국 외국 기업가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사기업 형태로 전락할 위기였다. 도대체 서병달 주사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한성전기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시대 배경을 감안하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어떤 장면이 옥에 티일까?

(*다음 편에 계속)

[참고문헌]

1. <한전국기통신 100년사>, 1984년, 전기통신공사
2. <한국근대 전기산업의 발전과 경성전기(주)>, 2006년, 오진석
3. <대한제국의 전기사업-한성전기회사를 중심으로>, 김연희
4. <관광안내로 본 근대 도시 경성 -1920~30년대 도해 이미지를 중심으로>, 2017년, 김선정
5. <도시 '본정통'의 장소 기억 -충무로·명동 일대의 사례>, 2013년, 전종한
6. 전우용의 서울탐사 블로그-센긴마에히로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 홈페이지 및 블로그와 동시에 게재됩니다.
#매천야록 #황현 #서병달 #미스터선샤인 #한성전기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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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방송 채널에서 교양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 1998년부터 다큐멘터리 웹진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운영. 자연다큐멘터리 도시 매미에 대한 9년간의 관찰일기 '매미, 여름 내내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6년 공개, 동명의 논픽션 생태동화(2004,사계절출판사)도 출간. 현재 모 방송사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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