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도 모르는데 옹심이를 어떻게 만드나요

사실상 직업교육이 된 진로교육... '꿈 없다'고 문제아는 아닌데

등록 2018.08.08 10:00수정 2018.08.0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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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의 개념이 자리 잡으면서 직장인 사이에서는 '퇴사'라는 키워드가 유행이다. 퇴사 후에 먹고 사는 법을 알려주는 교육부터, 세계일주, 와인 클래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준다는 강의 등이 인기리에 마감되고 있다.

바야흐로 '꿈꾸는 어른'의 전성시대다. 꿈꾸지 않으면 뭔가 수동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압박감이 사회 곳곳을 지배한다. 회사에 다니는 와중에도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고, 꿈을 꾸고, 퇴사 이후의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세상이다.

그 때문일까? 청소년 진로교육도 비슷한 개념으로 흘러가고 있다. 꿈을 찾는다는 명목 아래 바리스타 체험, 드론 체험, 창업캠프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꿈을 키우는 교육들이 청소년 진로교육의 주를 이루고 있다. 여러 직업을 체험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고 꿈을 키워보라는 것이 주 골자다.

잘 다니던 회사를 떠나 평소 관심있던 청소년 교육 영역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1년 6개월 정도 되었다. 현장에서 진로교육을 진행하며 학생들을 만나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친구들이 있다. 눈은 초점이 없고, 손은 팔짱 아니면 주머니로 향한다. 대놓고 자는 학생들은 그나마 양반이다. 단체 활동에도 시큰둥해 프로그램 진행 자체를 어렵게 하거나 모둠의 성과에 악영향을 주는 이들도 있다. 동료들이 이런 학생들을 일컫는 말이 있다. '요주의 인물.'

어찌 됐건 이들도 교육 대상인 만큼 열심히 참여를 독려해야 한다. 그럴 때마다 이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전 꿈이 없는데요?'다.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도 모르겠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친구들. 꿈에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운 친구들이다. 그런 학생들을 향해 진로교육 현장에서는 끊임없이 "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감자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옹심이를 만들어야 하니 레시피를 외우라고 하는 셈이다.

"꿈을 가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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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교육의 사각지대 학생들이 진로교육 강사의 설명을 듣는 중, 오른쪽 상단의 학생들이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정대영


지난봄에 만난 선재(15·가명)는 프로그램에 관심이 없었다. 5주 동안 결석 한번 없는 성실한 아이였지만, 책상만 멍하니 보거나 옆 친구와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3주 차 쉬는 시간에 선재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 많이 힘들어요?
"아니요. 그냥 그래요."

- 혹시 앞으로 뭐 하고 싶어요?
"몰라요. 그냥 살아요(친구: 이번 생은 망했어요.)"

선재에게 질문한 이유는 다음 프로그램이 '꿈과 비전 찾기'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꿈과 사회의 요구를 어떻게 조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 탐색하는 시간인 만큼 조언을 해주고자 했다. 그러나 학교는 그냥 다니는 것이고, 꿈은 모른다던 선재의 교재는 공란으로 남았다. 4주가 지나고 5주 차까지도 선재는 하루하루 학교에 다니는 것 외에 어떤 꿈도 목표도 찾지 못했다.

상부 보고에는 이미 꿈을 구체화한 상태로 참여했던 아이의 피드백이 올라갔다. 선재의 이야기는 없었다.

창업캠프에 참여했던 소연(15·가명)이도 마찬가지였다. 단체 게임 시간에는 누구보다 활달하고 목소리 큰 아이였다. 그러나 정작 설문지에는 "왜 하는지 모르겠다. 게임은 재미있었다"는 피드백이 남았다. 소연이의 피드백 역시 보고되지 못했다. 다른 아이의 긍정적인 내용만 올라갔을 뿐이었다.

교육하는 입장에서는 이 아이들이 불편할 수 있다. 협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눈에 이 아이들은 그저 '문제아'다. 그러다 보니 진로교육은 잘 따라오는 학생들 위주로 진행되고, 피드백 설문도 구체적인 꿈을 갖고 열심히 참여해 소감문을 빽빽하게 채운 아이들 위주로 공개되곤 한다. 정말 꿈에 대한 가이드가 필요한 '요주의 인물'들은 배제되고 외면당하는 것이다. 그렇게 잘 쓰인 설문은 진로교사들의 성과가 되고, 업체와 강사들의 실적이 된다. 그런 어른들의 '일' 속에 사각지대의 아이들은 없다.

어른들도 방황하는데... 꿈을 못 찾아도 괜찮아

가만히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본다. 꿈이 참 많이도 변했다. 5살 때는 운전이 하고 싶어 택시기사를 꿈꾸기도 했고, 경찰청 사람들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며 형사가 되고 싶었다. 광고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뒤에는 꽤나 오랫동안 카피라이터를 꿈꿨고, 단 하나도 접근하지 못한 채 점수에 맞춰 무역 전공으로 대학에 갔다. 외무고시, 기자, 선교사 등 대학에서도 여러 꿈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중견기업의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나도 꿈을 못 찾아 20대 중반까지 방황했는데, 이 아이들에게 꿈을 가져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 과연 맞는 걸까?

어른들은 청소년들에게 꿈꾸기를 강요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도 어른의 꿈을 찾아 여러 활동을 맴돈다. 오히려 이 아이들은 떳떳하다. "나는 꿈이 없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 말의 이면에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니잖아요?", "꼭 지금 완성된 꿈을 꿔야 하나요?", "그걸 도와주는 게 교육하는 어른들이 하실 일 아닌가요?"

꿈 없는 아이들이라고 해서 꿈이 싫을 리 없다. 다만 그 꿈에 접근하기까지의 방법이 너무 어른 시각 위주로 흘러가지는 않는지, 우리 진로교육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돌아볼 필요는 있겠다. 그리고 꿈을 직업과 동격으로 여기고 직업에 대한 단기 체험 위주로 가기보다는 이 아이들에게 이제는 꿈의 현실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줘도 좋을 것 같다.

"지금 꿈을 못 찾아도 괜찮아. 꿈은 어차피 많이 변할 거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할 수도 있고, 흘러가다 보니 어떤 자리에 와 있을 수도 있어. 꿈과 직업은 다른 거야. 무엇이 되었든 네가 행복한 게 꿈이면 돼. 퇴근 후의 맥주 한 잔의 만족이든, 갖고 싶은 무엇의 수집이든, 가고 싶은 곳의 여행이든."

어른들의 세상에서 과연 이 말이 진로교육용으로 적합할지는 모르겠지만.
#청소년 #진로교육 #꿈 #비전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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