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도 문법은 어렵다

[2만 시간동안의 남미9] 모두가 백조가 된 졸업식

등록 2018.08.14 10:49수정 2018.08.1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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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 올해 초, 나는 한참 불볕더위가 기승일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입성했다.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현지 영어교사의 길. 관련 자격증 코스를 시작한 뒤에도 비원어민이라 뒤처질 거라는 자격지심에 시달린다. 하지만 곧 그런 생각들이 내 자신을 미운 오리 새끼로 만들었음을 깨닫고 마음을 고쳐먹으려 노력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정든 학원의 마지막 날이 찾아온다.)


오늘은 테플(TEFL) 자격증 코스 반 모두가 처참할 정도로 퀭한 표정이다. 지난 2주 내내 진행된 교생 실습과 촉박한 실습 일지 작성 기한에 과하게 에너지를 쏟은 건 나뿐만이 아닌듯하다.

거의 반 좀비 상태에 들어선지라 수업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그런 우리 덕에 억지로 수업을 끌고 가던 강사 릴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커의 뚜껑을 닫았다. 오늘따라 그 소리가 더 크게 들린 건 내 기분 탓일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둘러보던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모든 교과목들을 다 마쳤어요. 이제 해야 할 건 딱 하나 남았네요."

끝났으면 끝났지 뭐가 또 남았을 게 뭐람. 좋다 말았던 우리는 투덜거리며 그녀가 나눠주는 A4 종이 한 장씩을 받았다. 그녀의 지시대로 종이 한가운데 각자의 이름을 크게 적어놓고 옆 사람에게 돌렸다.


그 뒤, 이름 근처에 개인적인 메시지나 서로를 격려하는 글을 적기 시작했다. 세상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말 마지막이 왔음을 느꼈다. 많이 시원하고 조금 섭섭한 이 기분. 물론 더 이상 강의실에 죽치고 공부하지 않아도 돼서 시원하고 매일 보던 이들 중 몇은 다시 보지 못할 거라는 사실에 섭섭하다.

제자리로 돌아와 내 종이를 받아들었다. 글 밑에 자기 이름을 적지 않았어도 누구의 글씨인지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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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님을 포함 반의 모두가 손수 롤링페이퍼를 써주었다. ⓒ 송승희


- 덴마크에서 온 S
; 참 활발한 성격을 가진 너! 그런 너는 항상 설명을 할 때는 포인트를 꼭 집어주고 질문을 할 때는 명확한 동기와 너만의 흥미를 가지고 하지. 또 너는 참 통찰력이 깊은 것 같아. 항상 반의 누구도 하지 않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말이야. 아 참, 그러고 보니 나는 여기서 너의 베스트 프렌드(Best friend) 로구나.

-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J
; 내 생각에는 너는 문법과 그걸 설명하는 데에 강한 것 같아. 이것이 네가 가진 긍정적인 성격과 함께 네 학생의 이해를 돕는 게 큰 도움이 될 거야.

- 미국 뉴욕 출신 D
; 너는 언젠가 '팁 시스템' 전체를 해체하고 말 거야. 한 번에 한 학생씩- 나는 너를 믿어!
(무슨 내용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저번에 '팁 문화'를 두고 논쟁을 한 뒤 조금 꼬인 것 같다)

- 미국 텍사스 출신 N
; 너는 탁월한 유머감각을 가진 것 같아. 그리고 이건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수업에 큰 도움이 될 거야!

- 미국 북부 출신 P
; 너는 참 다감한 선생님이 될 거야. 너는 항상 너의 학생의 흥미를 생각하니 말이야. 이건 선생님이 되기 위한 좋은 요소 중의 하나일 거야!

- 미국 테네시 출신 L 강사님
;  너는 좋은 태도를 가졌고 항상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반으로 가져와 수업을 이끌지. 또 너는 굉장히 사려 깊고 참을성 있어!

이어지는 졸업 사진 촬영도 잘 마친 우리는 학교에서 준비한 다과와 음료를 들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개강 첫날부터 학원 측의 불의에 대항한 이야기, 교생 실습 중의 온갖 해프닝에 앞으로의 계획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서로를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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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모두가 '백조'가 된 졸업식 정가운데의 기자와 그의 덴마크인 친구는 비원어민임에도 코스를 마치고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 송승희


그중 대학만 갓 졸업했지 아무 경력도 없이 넘어온 거라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라는 J와 모국어임에도 전형적인 이과생이라 문법이 약해 '자신감 제로'라는 D의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 내 눈이 커졌다. 나만 걱정덩어리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다 싶었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헛기침을 한번 했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는 지난 한 달간 내가 미운 오리 새끼 같다고 생각했어."

내 마음을 공감하는 S를 제외하고 모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모두들 잘 알다시피 난 영어권 국가 출신도 아니고  이쪽에 학위가 있는 것도 딱히 이 바닥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살면서 이런 것 저런 것 많이 시도해보았지만 이번 같은 리스크 큰 도전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모두 무슨 말을 한마디씩 하려고 입을 달싹했지만 내가 입을 먼저 열어 막았다.

"알아. 하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어. 당연히 여기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미안해. 지질해 보일까 봐 내 열등감이 더 깊어질까 봐 같은 처지인 S 빼고는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어. 그렇지만 오늘 이렇게 코스도 다 마쳤고... 그랬으니까 괜찮아. 좋은 게 좋은 거지."

갑자기 내 짝지 N이 손을 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 중에서 얘보다 문법 잘 아는 사람 있어?"

"......"

"호주 억양, 사투리, 문화 등등 그쪽에 대해 얘보다 잘 아는 사람 있어?"

"......"

"S 말고는 영어 바닥부터 시작해서 그 마음 아는 사람은? 그래서 기초반 학생들 마음 더 잘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은?"

"......"

"없지? 그렇지?"

그가 이런 질문 공세를 하는 동안 교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나는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져옴을 느낀다. 이어 N은 심지어 같은 나라에서 온 자기네들도 각각 다른 강점과 약점이 있다며 제발 걱정 말라고 비는 시늉을 한다.

모두들 얼굴을 내게 향하고 본인들이 얼마나 모자란 사람들인 설명하기 시작해 내가 다 미안해졌다. 다들 얼마나 열정적으로 고백성사를 하는지 급기야 나는 도망까지 쳐야 했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보며 정신없이 웃었다.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내 약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기의 적은 자기 자신이라고 내 약점은 바로 이렇게 생각해왔던 나 자신인 것이다. 애초에 미운 오리 새끼는 없었다. 내가 근심 걱정이 너무 많고 스스로 창조해낸 내 안의 열등감이 너무 커진 나머지 오늘날 이 사달이 난 것이다.

경험이 전무한 초보(교사)일수록 자기 자신을 믿는 게 아주 중요하다. 그런 믿음이 있어도 수업을 잘 이끌어 나가기는 쉽지 않을 텐데 나는 그것조차 없었다. 이게 앞으로 내가 고쳐나가야 할 첫 번째 숙제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평상시보다 학원이 일찍 끝났다. 평소라면 모두들 바람같이 빠져나왔을 테지만 오늘따라 동작이 더디다. 그동안 공부했던 교실을 한 번 더 둘러보고 릴라에게 했던 감사 인사를 또 하고 매일 오르내리던 통로의 계단을 느릿느릿 빠져나왔다. 모두 시원하면서도 조금씩은 아쉬운 모양이다. 그런 우리 모두의 손에는 한 달간의 수고의 증거인 자격증서가 쥐어져있다.

오늘은 방과 후 늘 하던 가로수 나무 밑의 모임을 생략하고 모두 바로 집으로 직행했다. 이유인 즉슨 우리는 오늘 저녁 시내에서 '졸업 쫑파티'를 하기로 하기로 미리 말이 오갔기 때문. 우리는 학원 졸업/자격증 취득을 축하하고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선 서로에게 운을 빌어주기 위해 '한 잔 걸칠' 계획이다!

- 지난 3월 말, 한 달간 정든 학원 앞에서.
#남미 #아르헨티나 #도전 #졸업식 #열등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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