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의 무죄, 그녀는 실패했는가

[주장] 1991년 아니타 힐과 2018년 김지은... 미투는 이제 시작

등록 2018.08.16 21:05수정 2018.08.16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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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런스 토마스 대법관 인준 청문회장에서 선서하는 아니타 힐 ⓒ SAMUEL GOLDWYN FILMS


1991년 미국의 대법관 인준 청문회에 한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아니타 힐. 힐은 고용기회평등위원회에서 일할 당시 대법관 후보자인 클래런스 토머스가 상관으로 있었으며, 그가 자신을 지속적으로 성희롱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세상은 성범죄 피해자에게 그다지 온정적인 곳이 아니었다.

작가인 앤디 자이슬러는 자신의 책 <페미니즘을 팝니다>에서 '청문회 장소였던 의사당의 안과 밖을 감싸고 있었던 경멸의 기운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며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정치인, 방송 뉴스, 토크쇼, 신문 등 누구도 힐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자이슬러에 따르면 이들은 성희롱이라는 것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주장조차 받아들이기를 꺼려했다.

청문회 과정에서 아니타 힐이 걸어야 했던 가시밭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상원 의원인 하월 헤플린은 그녀에게 '당신은 매력 없는 여자 취급을 당했습니까?'라는 매우 모욕적인 질문을 던졌다. 대중매체는 힐이 클래런스를 유혹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여성들이 '지나치게 민감'하고 남자들은 '원래 그렇다(즉 성희롱은 본능이고 그러니 처벌할 수 없다)'는 이들의 말은 청문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아니타 힐이 고용기회평등위원회 사무실에서 음모와 성기의 크기에 관해 말하지 않겠다 선언한 것이 극단적 페미니즘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리고 힐의 핵심적인 증언은 상원 의장인 조 바이든에 의해 청취 거부당했다. 앤디 자이슬러는 이렇게 적었다.

"과연 힐에게 세상에 존재할 권리가 보장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아니타 힐에 대한 엄청난 공격과 떠들썩 했던 소란 이후, 클래런스 토머스는 결국 청문회를 통과해 대법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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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구 판사, 안희정 전 지사 사진에 낙서 14일 오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성폭행 혐의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가운데 페미당당, 불꽃페미액션, 한국여성단체연합, 녹색당 등 여성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오후 7시부터 서울 마포구 서부지법앞에 모여 '안희정이 무죄면, 법원은 공모자다' '한국남성들은 오늘 성폭행 면허를 발부 받았다'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집회 참가자들이 조병구 판사와 안희정 전 지사 사진에 낙서를 한 뒤 들고 있다. ⓒ 권우성


과정부터 결론까지 모든 것이 문제였던 재판

잊을만하면 그런 일을 다시 반복된다. 죄를 지은 사람은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피해를 고발한 사람만 추문과 비방에 시달리는 일. 2018년 한국에서 그런 일은 또 다시 반복됐다. 14일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아온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실 이 재판은 결과 이전에 과정부터 문제가 많았다. 안희정 쪽 변호인단은 저열한 전략을 사용했다. 이들은 안희정의 측근과 가족, 이해관계인을 증인으로 채택했으며 심문 내용을 모조리 공개했다(관련 기사 : 안희정은 부인을 꼭 법정에 세워야 했을까). 그리고 그들의 증언엔 사건과 무관한 악의적 비방과 인상비평이 상당했다.

도대체 '피해자가 피고인(안희정)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나 '피해자가 남성들에게 인기가 좋았다'는 증언이 이 재판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결혼 제도 밖의 부정한 여성', '남성들의 호감을 사 쉽게 유혹하는 여성', '지위가 높은 남성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여성'이라는 식의 묘사는 전형적인 '꽃뱀' 프레임을 만드는 데 더 효과적이다.

만일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이런 식의 얕은수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하고 안희정이 진정으로 소명해야 할 부분을 질문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뉴스와 신문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피고인 측 변호인과 장단을 맞추며 성폭력 사건을 '스캔들'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관련 기사 : 재판에 나오니 다 보도? 안희정 측 주장 받아쓴 언론들).

나는 아직도 수행비서가 상사의 숙박 업소를 예약한 것이 뭐가 그렇게 특별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수의 언론들은 '김지은, 호텔 잡았다', '본인이 직접 호텔 예약' 같은 자극적인 타이틀을 달며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굴었다. 이들이 직업 윤리 따위는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트래픽 장사에 열을 올리고 있음을 감안해도 이건 상상 이상으로 저질이었다.

변호인과 언론이 본분을 잊고 폭주하는 동안, 재판부는 자기의 일을 제대로 하고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피고측 변호인이 사건과 무관한 악의적 증언을 재판정에 올리는 것을 막았을 것이다. 특히나 그들의 말이 언론에 퍼지고 김지은씨에 대한 2차 가해로 돌아온다는 상황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말이다.

또한 판사가 '정조'를 운운하는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며, 재판 내내 피해자의 행동에 관해서만 묻고, 이를 의문에 부치는 짓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재판은 총체적 난국이었으며 불평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피해자에게 적대적이었다(관련 기사 : 법원은 왜 안희정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나).

앤디 자이슬러의 질문을 살짝 바꾸어 반복하고 싶다.

"과연 김지은씨에게 자신이 경험한 진실을 이야기하며 세상에 온전히 존재할 권리가 보장되었는가."

정의와 법률이 아니라 기득권 남성이 판결했다

"재판정에서 피해자다움과 정조를 말씀하실 때, 결과는 이미 예견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희정의 무죄 판결 이후 변호인을 통해 발표한 입장문에서 김지은씨는 이렇게 말했다. 공감한다. 이번 판결에는 지극히 남성·기득권중심적인 시선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피고인이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유력 대권 주자로 거론되며,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를 좌지우지할 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힘이 행사된 적은 없다? 위력에 대한 재판부의 이러한 해석은 철저히 권력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힘을 가진 사람은 상대방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파악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모르거나 그런 것처럼 보일수록 유리하다. 그들은 자신의 지위와 존재만으로 부당한 요구를 관철할 수 있지만, 이를 무시하거나 부러 망각하고 '상대방도 원했다, 강요하지 않았다, (거절이 없었으니) 합의한 것이다'라고 항변한다. 판결문에는 권력자의 입장만 등장할 뿐 반대편에 놓인 사람의 위치는 고려되지 않았다. 과연 피해자는 가해자의 위력을 오직 판결문이 설명하는 방식으로만 경험했을까?

또한 판결문은 피해자가 사건이 일어난 지 몇 시간 이후 '러시아에서 피고인이 좋아하는 순두부를 하는 식당을 찾아 아침식사를 하려고 애쓴 점', '피해 당일 저녁에 피고인과 와인바에 간 점'을 볼 때 '위력에 의한 간음'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피해자 측에서 재판에서 자신이 한 모든 행동이 '간음 피해를 잊고 수행비서의 일로서 피고인을 열심히 수행하려 한 것'이라고 해명했음에도 말이다. 왜 재판부는 이를 납득하지 못할까. 만일 남성 비서가 같은 일을 했더라도 그들은 똑같이 반응했을까?

우리는 뉴스에서 상급자의 기상천외한 갑질이나 심지어 폭행까지 견디면서 그들을 위해 일한 남성 수행원들을 자주 봐왔다. 하지만 그들이 너무 열심히 일한 나머지 피해 사실을 의심받거나 부정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해봐야 그들은 '순진하다'거나 '멍청하다'는 정도의 평가나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재판부가 피해자의 성별과 범죄의 유형에 따라 이미 특정한 '피해자상'을 그려놓고 판단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즉 여성이 겪은 성범죄이기에 피해자다움을 의심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묻고 싶다. 그 '피해자다움'이란 주로 누가 보이는 시선이며 누가 가지는 편견인가. 바로 이번 판결을 보고 박수를 보내는 남성들이 아닌가.

아니타 힐은 실패했는가?

그래서 감히 주장하고 싶다. 안희정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의 판사석에는 정의는커녕 기계적 중립조차 없었다. 이미 그들은 남성과 기득권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그들의 머리로 판단을 내리고 그들의 입으로 판결문을 읊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피해자의 시각과 위치, 입장이 한치도 반영되지 않은 이 결과를 납득하기 어렵다.

여기에 김지은씨에게 끝까지 '부정한 여성' 혹은 '꽃뱀'이라는 악의적 프레임을 씌우기를 유도한 안희정과 변호인들이나 여기에 동조한 언론들도 재판부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재판 과정에서부터 판결까지 우리가 본 것은 남성중심사회가 만들어낸 거대한 카르텔과 부조리였다. 그들은 또 다른 안희정을 그리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김지은씨의 피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겪은 여성들이 침묵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직 2심과 3심이 남았다지만 패배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많은 수의 남성들이 재판 과정과 판결문의 한계를 면밀히 알아보려 하지도 않은 채,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를 하거나 결과를 받아들이라고만 말한다. 무력감과 암담함을 느낄만 하다. 확실히 우리 앞에는 심각할 정도로 부정의한 결과가 놓여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이 결과를 우리는 홀로 보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마주했다.

다시 서두에서 언급한 아니타 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녀는 실패했을까? 1991년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들과 힐의 청문회 발언을 보던 앤디 자이즐러는 세간의 거짓말과 달리 아직 세상에 페미니즘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이후 1995년 그녀는 페미니즘 문화비평지인 <비치>를 창간하고 여성주의 연구저술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후 <비치>는 영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페미니즘 잡지로 등극한다. 변화한 것이 단지 자이즐러 개인뿐일까?

청문회 이듬해인 1992년 봄 워싱턴에서는 대규모 임신중절권 찬성 집회가 성사된다. 임신중절권 보장에 찬성하는 민주당 의원을 당선시키기 위한 캠페인도 전개되었다. 이 때문인지 같은 해 선거에서는 페미니즘적 의제를 내건 여성 의원들이 대거 상원에 진출했으며, 하원에서는 스물여덟 명이던 여성 의원 수가 마흔일곱 명으로 훌쩍 늘어난다. 심지어 당이 여성의 자유를 공격하자 분노한 공화당 여성 당원의 28%가 다른 당에 투표하는 초유의 사태도 발생했다(이 사실을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에게 누가 전달해주었으면 좋겠다, 당신들의 지지자들은 호구도 바보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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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여성행진의 SNS에 업로드 된 월페이퍼 ⓒ Women's March


그들이 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소기의 진전이 있었던 후에도 세상은 다시 뒷걸음질 치고 조금씩 전진하기를 반복했다. 때문에 나는 허황된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식으로 지금의 절망스러움을 위로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당장의 좌절을 분노로 전환시키고, 그 분노를 동력으로 행동하여 조금이라도 변화를 이끌어낸 사례가 분명히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바다 건너의 그들이 해냈다면 우리라고 못 할 법은 없다.

판결 후 안희정은 인터뷰에서 '다시 태어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정계 복귀를 염두에 둔 말일까? 나는 그가 다시 태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죗값을 치르고 정치의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희정이 그럴 의지가 없다면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여러 조직 내부의 위력을 가진 무수한 안희정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내기 위해서라도 그가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필요하다.

안희정 재판뿐일까. 미투 운동으로 시작된 또 다른 재판들이 앞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또한 우리가 앞으로 연대해야 할 중요한 싸움들이다. 그러니 사법부가 움찔할만큼  지금 제대로 항의의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당신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기득권 남성 중심의 판결을 내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입법의 영역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폭행'과 '협박'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거부 의사에 반하는 경우'와 '명백한 동의의 표시가 없었던 경우'도 성폭력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 이런 식의 법의 변화가 없다면 불평등한 관계에서 위력에 의해 발생한 성폭력을 완벽히 처벌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번과 같이 재판부가 입법부에 공을 넘기며 빠져나가는 상황이 또다시 발생할 것이다. 이미 관련 법안은 여러 건이 제출되어 있다. 그 법안들이 제대로 처리되는지 감시하고, 압박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물론 이 목표들이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사회가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줄 때보다 무시하고, 퇴보하고, 부조리를 반복할 때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나는 그 순간순간이 우리에게 그저 절망과 상처로 남기보다는 하나하나의 계기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전미여성행진의 SNS에서 인용되었던 문장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다.

"이 일은 마라톤이지 단거리 질주가 아니다."
#안희정 #위력에의한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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