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차별과 외모 집착주의의 경계

'깜둥이' '흰둥이'는 인종차별일까

등록 2018.08.22 14:20수정 2018.08.22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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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우리 반에는 유독 피부가 검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초중학교를 다 같이 나왔는데, 줄곧 별명이 같았습니다. '아프리카 쌔깜둥이'였습니다. 고등학교 땐 여러 지역의 중학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 알게 된 게 있는데, '아프리카 쌔깜둥이'라는 별명은 우리 중학교에만 있던 게 아니라 어디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무튼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로 피부가 유독 검은 친구는 있었고, 어쩌면 자연히 그의 별명은 '깜씨'가 되었습니다.

그런 별명을 받는 사람은 또 있었습니다. 반면 그들은 한국인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살던 곳은 워낙 시골이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텔레비전 같은 데서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나올 때였습니다. 말하자면 흑인. 시골의 어른들은 대체로 화면 너머의 그들을 '깜둥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는 그 별명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중세 이후 유럽과 미주 등에서 행해졌던, 아프리카 사람 및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의 역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프리카' 어쩌고 하며 그 피부색을 특정하는 별명을 써선 안 됐던 겁니다. 어쩌면 그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의 연장이었으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스무 살을 넘겼고, 그런 줄만 알며 쭉 살아왔습니다.

얼마 전 아프리카에 갔을 때, 말라위라는 나라에 한 달 머문 적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아프리카 나라와 마찬가지로 그 나라에도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나라 사람들이 늘 제게 했던 말입니다. 현지의 아이들은 언제나 저와 한국인 일행에게 "므중구!" 하고 불렀습니다. 처음엔, 외국인 또는 친구 정도의 뜻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피부가 흰 사람을 뜻하는 단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낄낄웃고 따라다니며 우리에게 그 말을 했으니, 그 맥락으로 의역하자면 '흰둥이' 정도의 뜻이었던 겁니다.

그때, 저는 까마득히 의아해졌습니다. 아니, 우리보고는 그것이 인종차별이라며 '깜둥이'라는 말, '깜씨'라는 말, 나아가 '니거'라는 말 절대 쓰지 말라고 해놓고, 쓰면 거의 엄청난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가 놓고, 왜 오히려 이 검은 아이들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우리를 '흰둥이'라 부르는 건지. 게다가 비웃는 모습까지 보이고. 그 모습은 정확히 어렸을 제가 친구를 '아프리카 쌔깜둥이'라 부르던 그것. 그러니까 나중에 어른들이 인종차별이니까 하지 말라던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저를 그렇게 부른다고 그걸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사에서 황인종이 흑인으로부터 인종차별을 받았던 역사는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사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고 보면 '아프리카 쌔깜둥이'라는 친구가 있었을 때, 우리도 딱 그 정도 나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저들처럼 세계사 속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 친구가 물리적으로 다른 친구들과 달리 유독 검길래 그렇게 불렀던 겁니다.


말라위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 아이들도 '다른 흑인은 안 하지만 우리는 너희를 인종차별하겠다'라는 대단한 저의로 저를 그렇게 부른 건 아닐 겁니다. 그냥, 모두가 피부가 검은 동네에 좀 하얀 놈이 왔으니 그게 유독 두드러져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들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닙니다. 따라서 동일한 이유를 가졌던 어렸을 때의 우리도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더불어, 그렇다면 오늘날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프리카 사람을 보고 "깜둥이"라 부르는 시골의 어른들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분들은 유럽의 어떤 이들처럼 흑인을 무시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어렸을 때의 우리처럼 바다 건너에 그런 역사가 있는 줄도 모를 경우가 허다할 겁니다. 그냥, 우리 마을 사람들 다 노란데 혼자 검길래 그렇게 부른 걸겁니다. 그들은 노예니 뭐 어쩌구니 그런 것은 상상조차 못했을 겁니다. 게다가 그 분들은 백인이 나오면 '깜둥이'란 말과 거의 동등한 레벨로 '코쟁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부르면 안 됩니다. 상처는 무릇 의도와는 관계 없이 생길 때가 있는 법이고, 흑인은 수용자로서 그런 아픔을 품고 있는 법이니까요. 하여 우리가 아무리 나쁘지 않은 의도로 '깜둥이'라 부른다고 한들, 그들은 거기에서 레이시즘의 악취를 맡을 수 있는 거니까요.

모든 문제는 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따지고 보면, 사실 우리가 흑인을 '깜둥이'라고 부른 데에는 인종차별의 맥락은 거의 없던 겁니다. 그게 아니라, 사실 우리에겐 '외모집착주의'가 있던 것입니다. 이는 '외모지상주의'와는 좀 다릅니다.

어쨌든 오늘날까지도 한국인은 참 남의 외모를 갖고 떠들길 좋아하는 민족 같습니다. 후진국의 문화적 전형입니다. 잘생겼네 못생겼네, 너는 얼굴의 여기가 어떻네 저기가 어떻네, 눈이 좀 찢어졌네 코가 좀 낮네, 안경을 썼네 안 썼네, 피부색이 검네 희네 어쩌구저쩌구 하며. 심지어 어린 아이들을 보고도 그러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는 지금은 별로지만 나중에 크면 예쁠 얼굴이네 어쩌구저쩌구.

뭐 도대체 그렇게 말해서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외모가 내가 원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그러니까, 사실 한국에서 '깜둥이' 혹은 '깜씨'라는 말은 유럽과 같이 인종차별이 아니라, 이러한 외모집착주의의 맥락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입니다. 굳이 그것을 거론할 필요가 없는데, 워낙 타인의 외모에만 관심이 많다 보니 그렇게 불러버리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라위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니 도대체 그냥 오랜만에 밥먹으러 만났는데 왜 당신들에게 내 코가 어쩌구 저쩌구 소리를 들어야 하고, 그냥 텔레비전에 나왔을 뿐인데 왜 피부색이 어쩌고 저쩌고 소리를 들어야 한답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말을 따라 흑인을 '깜둥이'라고 부르는 것이 인종차별이라고 한다면, 지금 타인의 외모를 갖고 왈가불가 하는 사람들도 모두 인종차별입니다. 혹은, 그것이 당사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에 '깜둥이'란 말을 쓰는 걸 멈춰야 한다면, 흑인이 아니더라도 지금 내 주변의 이들의 외모를 언급하던 행위 역시 멈춰야 합니다.

물론 인종차별도 정말 나쁜 거긴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역사와는 무관한 우리 한국 사회에서 더욱 정확히 사라져야 할 것은, 타인의 외모를 갖고 왈가불가하는 그 '외모집착주의'가 아닐까 합니다.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다분히 폭력적입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마음에 안든다고 한들, 그건 우리가 노력으로 바꾸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남의 외모 가지고 함부로 이야기 하지 말아요 우리.

그러고 보면, 사실 저는 제 어릴 적 친구에게 사과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것의 맥락이 인종차별인 줄 알았으므로, '아프리카 쌔깜둥이'라는 말로 상처를 받는 당사자는 그 친구가 아니라 흑인들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사과를 하더라도 친구가 아니라 흑인 당사자들에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야 생각해 보니 그건 '인종차별'이 아니라 그 친구의 피부를 갖고 놀리는 '외모집착주의'의 일종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늦었더라도,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친구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 너의 외모를 가지고 별명을 만들어 정말 미안했다고. 
#인종차별 #외모지상주의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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