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년 만에 다시 만난 내 친구들

[리뷰] 다시 보니 더 사랑스러운,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작은 아씨들'

등록 2018.09.06 17:44수정 2018.09.0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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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잊고 있던 이 소녀들이 보고 싶어졌는지 모르겠다.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작은 아씨들> 말이다. 다 커서 다시 만난 이 친구들, 지금 보니 꽤나 근사하다. 일찌감치 절교했던 친구를 다시 만난 기분이니, 사랑스러운 이들을 소개하고 싶다. 

오늘 이 책을 왜 집어 들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면서 당시의 내가 왜 좋아하지 않았는지는 생생하게 기억하니, 내 기억력도 요물이다. 어쨌건 말을 하자면, 어린 나로서는 가난하지만 함께 있어 행복하다,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좀처럼 와닿지가 않았다. 


나는 가난을 묘사하는 이국적 풍경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나 가난한지 우리집 '정원'은 볼품없고 초라해, 하는 것 말이다. 단칸방도 아닌데 다락방은 또 웬 말이며, 장작이 타오르는 벽난로는 해도 해도 너무 낭만적인 거다. 

뿐인가. 나에겐 어떤 말이든 해도 된단다 내 사랑하는 딸들아, 하는 소녀들의 엄마도, 하나같이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언제나 상냥한 목소리로 나는 널 이해해, 하며 웃어줄 것 같은 심성 좋은 소녀들도, 내겐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판타지는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현실에서, 엄마는 내 머리카락을 당장 잘라버리자고 성화였으며(가끔은 몰래 잘라버렸고), 깡패 같은 언니는 매일 같이 나를 볶아대는 것만이 삶의 낙으로 보였으니,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어이 아씨들! 왜 니들만 그렇게 행복하니, 가난하다면서 방도 있고, 침대도 있고, 세상에나 하녀까지 있어, 가질 거 다 가졌네 우리 그만 끝내, 뭐 이런 식. 지금 생각해 보면 앞뒤도 안 맞는다만. 

다시 보는 <작은 아씨들>은 달랐다. 지금의 나는 그녀들의 가난을 이해한다. 19세기 미국의 목가적 풍경에 대한 내 이해도가 늘어봤자 얼마나 늘었겠느냐마는(조금 늘긴 했고), 무엇보다 상대적 빈곤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바로 옆집에 부유한 로렌스 가(家)가 살고 있고, 초대받은 파티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봤자 어려운 집안 형편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꼴이었으니, 사춘기 소녀로서는 어찌 신경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가난을 말할 자격이 있었다(자격 같은 건 애초에 필요하지 않지만). 


생뚱맞은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빈부를 떠나서 모두가 함께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번 양보해 끼리끼리 만나는 것이 피차 속 편한 어른들이야 그렇다 쳐도, 아무런 공(功)도, 과(過)도 없는 아이들만큼은 편 가를 것 없이 함께 어우러질 기회가 도처에 널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야 서로가 외계인이 아니란 것을, 너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종종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갑질' 행태도 조금은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주인공 조와 로렌스 가의 로리는 진심어린 우정을 주고 받는다. 이들의 순수함이 사랑스럽다. 
"돈이 사람을 그런 유혹에 빠뜨린다고 하니까, 네가 차라리 가난했으면 싶을 때도 있긴 해. 그러면 걱정할 일은 없잖아."
"내가 걱정되니, 조?"
"조금은. 가끔 우울하거나 불만에 찬 네 표정을 볼 때면 그래. 워낙 고집이 세서 한번 잘못된 길에 발을 들여놓으면 널 붙잡지 못할 것만 같아서."(pp340-341)
 

<작은 아씨들> 책표지 ⓒ 인디고



<작은 아씨들>은 마치 가문의 네 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데, 그 중에서도 작가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조의 캐릭터가 단연 독보적이다. 책엔 조의 글솜씨에 대한 칭찬이 수두룩한데, 이 작가, 꽤 귀여운 구석이 있다. 
 
"조 언닌 어쩜 그렇게 글도 잘 쓰고, 연기도 잘 하는지 모르겠어. 셰익스피어가 따로 없다니까!"(p34)

말하자면 작가로선 소망적 글쓰기를 한 셈이고 <작은 아씨들> 덕분에 전세계의 사랑을 받았으니 그 소망은 이뤄진 것이다. 듣자하니 가수들은 노래 제목처럼 살게 된다는 속설도 있다던데, 나도 이 참에 비밀 일기장이라도 만들어 소망적 글쓰기나 한 판 벌여볼까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슨 소망을 담나. 

우리의 조는 다르다. 하고 싶은 것이 명확하다. 작가가 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길 원하는 그녀는, 스스로 그 길을 개척한다. 그런 그녀로선, 당시의 여성에게 씌어지는 굴레가 견디기 힘들다. 
 
"(중략) 미스 마치가 되는 것도, 치렁치렁한 드레스나 입고 꽃처럼 고고한 척하기도 싫어! 남자애처럼 놀고 일하고 행동하길 좋아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너무 끔찍해! 남자가 아니라는 게 실망스러워 미칠 지경이라구."(p28)

이런 조에게 동생 베스는 이름이라도 남자 같고, 우리한테 오빠 노릇하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위로하니, 웃음이 터져 나온다. 

여성으로서의 굴레가 싫었던 조를 보며 페미니즘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작은 아씨들(Little Women)>의 속편이 <좋은 아내들(Good Wives)>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멈칫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로선 이것이 시대를 극복하지 못한 한계라기보다, 세상은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한 걸음 후진하더라도, 두 걸음 전진하는 것. 또한, 삶의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완벽한 인간상으로 그려지는 마치 부인은, "여자에게 좋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것만큼 값지고 행복한 일은 없단다."(p225)라고 말해서 좀 섭섭하지만, 딸들을 부잣집에 시집보내려고 기쓰지는 않는다. 당시 여자에게 허락된 거의 유일무이한 신분 상승의 기회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돈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지 말라고, 불행한 아내보다는 행복한 노처녀 쪽이 훨씬 낫다고 말하는 마치 부인이니, 이만하면 괜찮지 않은가.

이들은 가난해도 다른 사람을 도울 줄 알고, 염치를 잃지도 않는다. 보답할 길 없는 로렌스씨의 호의를 불편하게 여기기도 하나, 늘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서로의 진심 어린 환대를 느끼고 난 뒤엔 더이상 잴 필요 없는 진짜 정을 주고 받는다.

<작은 아씨들>의 배배 꼬이지 않은 순수함 덕분에, 내 머릿속 마저 맑아지는 기분이다. 하녀인 것도 서러운데, 가난한 집안의 하녀인 해너는 그 등장 자체로 조금 눈물겹지만 그건 일단 넘어가자. 이참에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책들을 다시 읽어볼까 생각이 든다. 근 삼십 년의 세월 뒤에 다시 보는 이야기들은 얼마나 다른 감상으로 다가올지. 그들은 그대로인데 변한 건 나이니, 변치 않고 있어주는 이 친구들이 참 고마울 따름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작은 아씨들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김양미 옮김, 김지혁 그림,
인디고(글담), 2011


#작은 아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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