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은 정약용 유배지? 우리가 몰랐던 이것

[김천령의 한국 정원 이야기20] 강진 다산초당(상)

등록 2018.09.06 17:56수정 2018.09.0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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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의 천일각에서 바라본 구강포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의 별서 정원으로 강진의 서남쪽 바닷가 가까이 만덕산 중턱에 있다. ⓒ 김종길


다산초당이 조선을 대표하는 정원 중의 하나라고 말하면 누구든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다산초당을 찾지만, 대개는 그곳을 다산의 유적지 정도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약용이 당대의 대정원가였고 다산초당은 그의 원림관이 반영된 정원이라는 걸 알고 나면 단순한 유적지 이상으로 다가올 것이다. 다행히 다산이 남긴 수많은 시문집과 초의선사가 다산초당을 그린 <다산초당도>가 남아 있어 다산초당의 원래 모습을 알 수 있고, 다산초당을 구성하는 정원적 요소가 무엇인지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다산초당 입구 민가의 가을 풍경 다산은 1801년 신유박해로 강진에 유배 왔고, 다산초당으로 옮긴 건 유배 후 8년이 지났을 때였다. ⓒ 김종길


강진 유배와 다산초당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별서 정원으로 강진의 서남쪽 바닷가 가까이에 있는 만덕산 중턱에 있다. 다산은 1801년 신유박해로 강진에 유배 왔을 때 곧장 이곳 초당으로 오지 않았다.

처음 5년 동안은 강진 동문 밖에 있던 주막을 거처로 삼았고, 그 뒤에는 백련산 혜장선사의 주선으로 고성암 보은산방과 제자 이학래의 집 등에서 3년을 지냈다. 다산초당으로 옮긴 건 유배 후 8년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가정 신유년(1801년) 겨울에 강진에 도착해 동문 밖 주막집에 우거했다. 을축년(1805년) 겨울에는 보은산방에서 기식했고, 병인년(1806년) 가을에 학래 집에서 이사가 있다가 무진년(1808년) 봄에야 다산에서 살았다. - <다산신계> 중에서
 

뿌리의 길 다산초당 오르는 길에 있는 일명 '뿌리의 길'은 역설적이게도 상처투성이다. ⓒ 김종길


다산은 처음 유배를 살았던 강진 읍내 주막의 뒷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붙였다. 마땅히 지녀야 할 네 가지(四宜)로 '담백한 생각(사의담, 思宜澹), 장엄한 용모(모의장, 貌宜莊), 과묵한 언어(언의인, 言宜認) 신중한 행동(동의중, 動宜重)'을 선비다운 덕목으로 꼽았다. 이때 가르친 제자 중 대표적인 인물이 황상(黃裳, 1788~1870)과 이학래(李學來)였다. 이 두 사람은 나중에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도 출입하게 되어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두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행운아였다.

다산은 47세이던 1808년 봄에 윤단(尹慱, 1744~1821)의 산정(山亭)인 귤동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을 초당으로 초빙한 이는 윤단의 아들인 윤규로(尹奎魯, 1769~1837)였다. 윤규로는 자신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다산에게 배우게 했다. 다산은 18년(1801~1818)의 유배 기간 동안 다산초당에서 11년가량(1808~1818)을 머물렀다.

다산이 윤단의 산정으로 오게 된 것은 어머니가 해남 윤씨였기 때문이다. 외가 쪽 친척의 소유였던 산정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다산의 외가는 해남윤씨로 고산 윤선도의 가문이다. 다산초당의 원래 주인인 윤단은 윤복의 6대손이고, 윤복의 형인 윤형의 5대손이 인물화에 탁월했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이다.

공재는 윤선도의 증손자이기도 한데, 공재의 셋째 아들 윤덕렬의 딸이 다산의 어머니이니, 공재의 손녀이다. 결국 산정의 주인인 윤단은 다산에게 먼 외가 친척인 셈이다. 윤단의 묘는 다산초당을 오르는 길가에 있다.
 

다산초당 가는 길 다산초당을 오르는 길가에 있는 윤단의 묘소 인근 단풍 풍경 ⓒ 김종길

 

다산초당 다산은 외척인 윤단의 산정에 본격적으로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 ⓒ 김종길


원림 조성


다산은 외척의 산정에 본격적으로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 연못을 파고 골짜기의 물을 끌어들여 폭포(비폭飛瀑)을 만들었다. 그 주위에는 화계를 조성하여 꽃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석가산을 꾸몄다. 1808년에 시작된 정원 조성은 그가 유배를 마친 1819년까지 11년간 계속됐다.
 
"무진년 봄에 다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축대를 쌓고 연못을 파기도 하고 꽃나무를 벌여 심고 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기도 했다."- <자찬묘지명> 중에서
 
 

다산초당 1808년에 시작된 정원 조성은 다산이 유배를 마친 1819년까지 11년간 계속됐다. ⓒ 김종길


다산은 산정의 차나무가 마음에 들었고, 윤단의 장서를 볼 수 있는 데다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강진 포구의 경치와 담장 안에 핀 꽃들에 마음이 흡족했다고 한다. 다산은 초당 주위에 매화·복숭아·모란·차·작약·수국·석류·치자 등을 가꾸고 세심하게 감상하며 '다산화사(茶山花史)'를 지었다. 이듬해 다산은 초당 주변을 새롭게 꾸미면서 비탈에는 돌로 단을 쌓아 화계를 만들었다. 이어서 연못을 넓히고 꽃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동쪽의 연못은 원래 협소하기가 절구 같아서 이를 확장했다." - <만춘>
"연지 석가산은 바닷가에서 돌을 주어 와서 봉우리를 만들었다." - <다산사경첩>
"세 봉우리 석가산이 솟아 있네." - <다산화사>

 
 

다산초당의 화단(화오) 다산은 연못의 위쪽 경사면과 동쪽에는 각각 6단과 2단의 화단을 만들었고 초당의 서쪽 경사면에는 6단을 만들었다. ⓒ 김종길



다산초당을 찾는다면 누구나 연못은 쉽게 발견하지만 연못 북쪽의 비탈면과 초당 옆에 화계가 조성되어 있다는 걸 눈치 채는 이는 의외로 적다. 다산초당을 정원으로 볼 때 화계는 큰 의미를 차지한다. 초당 서쪽에는 약초와 채소를 심었고, 연못 뒤쪽으로는 관상수와 꽃나무를 심었다. 연못의 위쪽 경사면과 동쪽에는 각각 6단과 2단의 화오를 만들었고 초당의 서쪽 경사면에는 6단을 만들었다.

역시 <만춘>에 "매화나무 아래에 우거져 있는 잡초를 베어내고 차례로 단을 쌓아 9급의 채포(菜圃)를 만들고 새롭게 꾸민 화오에는 이름난 꽃과 아름다운 초목을 심었다"고 했다. 다산은 원포(園圃)를 이야기하면서 "진귀한 과일나무를 심은 곳을 원(園)이라 하고, 맛 좋은 채소를 심은 곳을 포(圃)라 한다"고 했다.
 

다조 차 끓이던 부뚜막 바윗돌로 초당 앞마당에 놓인 평평한 바위를 가리킨다. 다산은 이 바위에서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다고 한다. ⓒ 김종길


다산사경(茶山四景)

다산초당에는 지금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네 가지 경물이 있다. '다산사경(茶山四景)'이라 부르는 다조(茶竈)ㆍ약천(藥泉)ㆍ정석(丁石)ㆍ석가산(石假山)이다. '다조'는 차 끓이던 부뚜막 바윗돌로 초당 앞마당에 놓인 평평한 바위를 가리킨다. 다산은 이 바위에서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다고 한다. '약천'은 다산이 평소 물을 떠 마시거나 차를 끓일 때 사용하던 샘으로 초당 뒤에 있다.

'정석'은 다산이 초당의 주인이 자신임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성인 정(丁)을 새긴 초당 서편에 있는 바위다. 다산은 하늘도 깜박 잊고 이름을 짓지 않았다며 초당 서쪽의 이끼 낀 바위에 정석이라고 두 글자를 새겼다. '석가산'은 초당 오른쪽 연못 중앙에 산 모양으로 돌을 쌓아 조성한 곳을 말한다.

초당으로 옮긴 다음 해에 윤문거와 바닷가에서 수십 개의 괴석을 배에 싣고 가져와서 석가산을 쌓았다고 했다. 연못에는 산비탈의 맑은 물을 홈대로 끌어들여 폭포가 되어 떨어지게 했다. 다산은 이것을 '비폭(飛瀑)'이라고 했다.
 

정석 다산이 초당의 주인이 자신임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성인 정(丁)을 새긴 초당 서편에 있는 바위다. ⓒ 김종길

 

약천 다산이 평소 물을 떠 마시거나 차를 끓일 때 사용하던 샘으로 초당 뒤에 있다. ⓒ 김종길


다산초당, 초당에선 시를 짓고, 바위엔 글씨가 있고, 연못은 그림이 된다. 그리하여 다산초당은 시(詩), 서(書), 화(畵)가 핵심요소인 정원이 됐다. 다산초당은 차 생활을 하는 다원이기도 했다. 다산은 백련사에 있던 혜장선사(惠藏, 1772~1811)와 초의선사(草衣, 1786~1866)와 차를 마시며 깊이 교유했다. 초당에서 동쪽으로 산길을 넘어가면 백련사가 있다.

다산은 초당 주위 숲에 무성한 차나무에서 찻잎을 따서 끓여 마셨으니 다산이라는 호가 거기에서 비롯됐다. 다산은 다인으로 차 생활을 만끽하는 '끽다' 생활을 즐겼다. 그리하여 해남 윤씨의 산속 정자로 그저 산정(山亭)으로만 불리던 곳이 '다산초당'이라는 담백한 이름을 갖게 됐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는 산길 그 옛날 다산과 혜장선사는 이 산길을 오가며 교유했을 것이다. ⓒ 김종길

#다산초당 #정약용 #다산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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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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