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계약서 좀 봐주세요" 게시판에 올리는 프리랜서들

[대한민국 프리랜서 잔혹사 ③] 남들은 이 조건에도 한다? 뭔가 이상하지만 방법이 없다

등록 2018.09.13 15:10수정 2018.09.13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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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프리랜서가 전현무, 김은숙은 아니다. 아니 두 사람은 극소수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자의로든 타의로든 프리랜서가 됐지만, 대부분은 저소득의 늪에 빠져있다. '홀로'라서 더 '잔혹한' 프리랜서의 세계를 <오마이뉴스>가 네차례에 걸쳐 자세하게 들여다본다. 이 기사는 그 세번째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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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레진'이라고 적혀있는 웹툰 <나의 보람> ⓒ 레진코믹스 사이트



"<나의 보람>은 저 혼자 스토리 쓰고, 캐릭터 만들고, 콘티와 작화에 마무리 작업까지 다 한 데뷔작이었어요."

8월 13일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A(23)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그런 데뷔작을 뺏겼다"고 했다.

A씨가 자신의 데뷔작을 빼앗았다고 가리키는 사람은 유료 웹툰 플랫폼 1위, 레진엔터테인먼트(아래 레진) 대표다. 그는 대표가 자신의 저작권과 수익을 편취했다며 조만간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할 예정이다.

두 사람의 '잘못된 만남'은 2012년말에 시작됐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A씨는 레진 대표에게 데뷔 제안을 받고, 이듬해 1월쯤 작품 구상에 들어갔다. 이후 두 사람은 몇 차례 만나 작품 이야기를 나눴다. 대표는 캐릭터 이름과 장르를 제안한 것말고는 대부분 A씨가 준비해온 콘티를 보고 "좀 더 임팩트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좋다, 가자" 정도로 평가만 해줬다. A씨는 대표가 작품 세부 내용 등을 문서로 써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나마 자세했던 '조언'은 선정성을 강조하는 방향이었다.

"8화에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상대를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대표가 이 장면을 수음(신체 부위를 이용한 자위행위)하는 것으로 바꾸고 특정 신체 부위 쪽에 검은색 박스를 그려 가리라고 했다. 상상력을 자극해야 결제가 많이 된다는 것이다. 당시 미성년자였고 알몸에 가까운 여성 신체나 수음 표현 같은 것을 그려본 적도 없었는데 그려야 해서 너무 민망하고 숨고 싶었다."

그렇게 A씨 혼자 전체적인 줄거리, 콘티 등을 완성해 2013년 6월 연재에 들어갔다. 그런데 연재 시작 직후 대표가 갑자기 "같이 만든 것 아니냐"라며 글작가에 이름을 올리고 수익의 30%를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데뷔작을 뺏겼습니다"... 한 웹툰 작가의 절규

웹툰은 작가 한 명이 글·그림을 모두 작업하거나 글작가와 그림작가가 협업하는 경우로 나뉜다. 후자의 경우 작품 기여도 등에 따라 글작가와 그림작가가 수익을 나눠가진다. A씨가 회사와 연재 시작 직전에 쓴 계약서에는 글작가·그림작가 구분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표가 "원래 다들 이렇게 한다"라며 글작가에 이름을 올리고 수익을 가져간다고 한 것이다.

A씨는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따져 물을 수 없었다. 미성년자라 계약서 관련 지식이 없었고 프리랜서라 다른 작가들이 계약을 어떻게 하는지, 글작가와 그림작가는 어떻게 업무와 수익을 나누는지, 업계 표준은 무엇인지 등을 몰랐기 때문이다. 주변에 계약문제를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작가 표기란에 '글작가 레진(대표의 필명)'이 적혔고, 계약서 수정도 없이 수익 배분이 이뤄졌다. 당시 A씨는 미성년자였지만, 대표는 법정 대리인 동의도 받지 않았다. 회사는 "레진코믹스 대표인 레진이 만든 작품"이라는 홍보도 대대적으로 했다. 연재 내내 "레진, 글 잘 쓰네"같은 독자의 평가가 이어졌다. 참을 수 없었다.

3개월 동안 끙끙 앓던 A씨는 그해 9월말쯤 이 일에 문제 제기를 했다. 돌아온 대답은 '업계 관행'이라는 말뿐이었다.

A씨는 "대표가 '작가님이 어려서 아직 잘 모르는데, 이쪽은 물론 영화 쪽에서도 이 정도 참여하면 글작가가 20%~30%를 가져간다'고 했다"라며 "대표 자신에게 수익을 분배하지 않는 것은 '착취'라고도 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게 '마음을 풀라'며 '대신 15%만 가져가겠다'고 했다"라고 덧붙였다.

11월쯤 <나의 보람> 연재가 끝났다. 그 직후 작가 표기란이 바뀌었다. 글작가였던 레진이 원작자라고 쓰였다. 대표가 쓴 원작을 바탕으로 A씨가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다. 7일 현재까지도 이 작품의 원작은 레진으로 돼있다.

업계 관행? 웹툰작가들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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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가 자신의 기여도를 주장하며 일부 수익을 가져간 것은 정말 '업계 관행'일까? 웹툰작가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 Pixabay


대표가 자신의 기여도를 주장하며 일부 수익을 가져간 것은 정말 '업계 관행'일까? 웹툰작가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글작가와 5년째 작품을 하고 있는 웹툰작가 B씨는 "글작가가 스토리 대부분을 구성하고 회차마다 그림작가에게 콘티를 보내준다"라며 "거기에는 컷마다 어떤 장소에서 캐릭터가 어떻게 행동하고 무슨 대사를 하는지 등의 설명이 담겨있다"라고 말했다.

웹툰작가 C씨도 "시나리오든 대사든 대표가 쓴 문서가 한 장이라도 남아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웹툰작가 D씨도 "대표가 말한 것은 동료 작가들끼리 하는 수준이다"라고 했다.

A씨의 법률 대리인은 "창작 과정에서 아이디어나 소재 등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저작권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게 대법원의 일관된 판례"라고 했다. 또 "레진 대표가 저작권자가 아님에도 자신의 필명을 <나의 보람> 원작자에 표시한 것은 저작권법 제137조 벌칙 조항에 따라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레진 대표가 한 플랫폼을 운영하고, A씨와 계약·연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우월한 지위"였다고도 지적했다. "이 지위를 이용해 플랫폼의 대표가 계약 당시 미성년자였던 작가의 권리를 자신의 것마냥 게재하고 수익을 편취, 공정거래법과 예술인복지법을 위배했을 여지가 충분하다"는 얘기였다.

A씨는 2017년 12월 레진에 저작권 반환과 배상, 계약해지 등을 요구한 상태다. 9월 말쯤 공정거래위원회 신고도 계획 중이다.

레진 대표 "글-그림 나눠 계약 맺었다"

7일 레진 대표의 법률 대리인은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단순한 아이디어 제공 차원을 넘어섰다"라고 반박했다. 그는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 갈등 구조, 캐릭터 설정 등 실질적으로 상당한 기여가 있었다는 게 레진 대표의 입장"이라며 "대표가 현재 입증 자료를 찾는 중"이라고 말했다.

'플랫폼 대표'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했다는 지적에도 "대표가 작가로 올라가 있는 것은 이 작품 하나로 알고 있다"라고 답했다. 법률 대리인은 "만약 그 지위를 이용했다면 (대표가 작가인 작품이) 여러 건 있어야 하지 않겠냐"라며 "이 작품의 경우 본인이 기여했다고 생각하고 연재할 때도 글과 그림 작가를 나눠서 (명시)한 것에 별 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합의가 있었다고 본다"라고 답했다.

대표의 피드백이 선정성을 강조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법률 대리인은 "작품의 장르와 수위, 표현 등은 서로 합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며 "특별히 선정성을 강조하거나 요구한 적은 없다는 게 대표의 입장"이라고 했다.

레진 대표 쪽은 연재 초반에 나온 A의 항의도 다르게 해석했다. 애초에 글과 그림작가로 역할을 나눠 계약을 맺었다는 얘기였다. 법률 대리인은 "글과 그림으로 나눠 창작에 기여하는 계약이라 중간에 상대방 역할을 두고 서로 불만이 있을 수 있다"며 "그렇다고 (글작가·그림작가 구분한) 계약 자체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A씨가 가진 계약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다'는 질문에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한편 레진 측은 6일 <오마이뉴스>에 보낸 답변서에서 "현재 양측 주장이 달라 회사가 공식입장을 밝힐 수는 없다"라면서도 2013년 계약 당시 A씨의 법정 대리인 동의를 받지 않은 점 등은 인정했다. 이 때문에 레진은 지난 1월 A씨에게 글작가 수익분배금 전액과 충분한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며 합의안을 제시했으나 아직 합의가 이뤄지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원래 다 그렇다'는 말에 속수무책인 까닭

A씨처럼 홀로 계약하는 프리랜서들은 자신이 겪은 일이 불공정한지 아닌지를 아는 것조차 힘들다. 다른 사람이 맺는 계약의 형태, 조건 등을 알지 못하기에 '원래 다 그렇다'는 말에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다.

프리랜서 캘리그라퍼 E씨(23)도 비슷한 고충을 토로했다. 그는 "클라이언트가 '남들은 이 조건에도 한다'라고 말하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제시했다"라며 "혼자 작업하다보니 물어볼 사람이 없어 답답했다"라고 했다.

정규직·비정규직·프리랜서 등 IT업계 종사자들로 구성된 한국IT산업노동조합(아래 IT노조) '일터Q&A'란에는 '프리랜서 계약서 좀 봐달라'는 요청글을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다.

IT노조 관계자이자 자신도 프리랜서 IT개발자인 F씨는 "프리랜서들이 업체와 일대일로 계약을 하다보니 자신의 계약서에 문제가 있어도 알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게시판에서라도 업계 현황을 파악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게시판에서 부당한 계약 조항을 찾아내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기회조차 없어 저작권을 뺏기는 경우도 많다. E씨가 그랬다. 그는 "(내 작업물을) CD표지에만 사용하기로 했는데, 포스터에도 쓴 것을 봤다"라며 "항의하려고 보니 계약서에 '2차적 저작권'이 넘어가게 돼있더라"라고 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자 안 되겠다 싶었던 그는 스스로 계약서 관련 수업을 찾아들었다. E씨는 "교육을 들은 뒤, 책에만 쓴다고 계약한 작업물이 나도 모르게 팸플릿, 사보 등에도 변형·각색돼 사용된 걸 봤다"라며 "배운 것을 토대로 항의하고 2차적 저작권을 가져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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