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실습생, 근로계약서 써서는 안 된다고?

근로기준법 배제되는 개정 현장실습 제도

등록 2018.09.11 09:32수정 2018.09.11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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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9일 특성화고권리연합회에 참여한 특성화고 학생과 현장실습생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권리선언 발표 기자회견을 통해 '차별과 무시당하지 않을 권리',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진로와 직업을 선택할 권리' 등을 요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근로계약서를 써서는 안 된다."
"4대보험에 가입해서는 안 된다."
"최저임금 이상 지급받아서는 안 된다."


요즘 같은 노동존중 세상에 대체 무슨 얘길까. 직업계고 학생들이 현장실습생 신분으로 기업에 첫발을 디딜 때 처음 듣게 되는 말이다. 직업계고 현장실습 제도가 올해 9월부터 변경됨에 따라, 기존의 현장실습 제도가 이른바 '학습중심' 현장실습으로 변경되면서 나타난 풍경이다.

변경된 제도는 기존의 '근로'와 '학습'(또는 실습)이 공존하던 현장실습에서 '근로'(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오로지 '학습' 중심으로만 운영할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직업계고 학습중심 현장실습 운영 안내자료'(교육부·한국직업능력개발원, 2018.5) ⓒ 교육부


위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 변경된 제도에서는 '근로'와 관련된 단어가 모두 사라졌다. 4대보험 가입도 제한된다. 급여 대신 지급받는 '현장실습지원비'는 교통비와 식비 명목으로 최저임금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형식'상 근로기준법으로부터의 도피

제도 변경 배경에 대해 교육부는 '직업계고 학습중심 현장실습 운영 안내자료'(교육부·한국직업능력개발원, 2018.5)에서 "안전사고 발생"과 "임금미지급 등 노동인권문제"를 들고 있다. 하지만 바뀐 제도에 따르면 안전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우선 현장실습생에게 지급되는 '현장실습지원비'의 수준부터가 법정 최저임금에 훨씬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문제에 대한 대책이 어딘가 크게 잘못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근로기준법 등이 노동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발생한 문제를 근로자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안일하게 도피하려 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지점이다.

바뀐 제도에 따르면 현장실습생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다. 따라서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등 개별적 노동관계를 규율하는 일체의 법 적용으로부터 현장실습생은 배제된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므로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고, 4대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으며, 최저임금도 보장받을 수 없다. 연차휴가도 사용할 수 없으며, 해고를 당해도 구제받을 수 없다. 형식상 현장실습생은 근로기준법 등의 보호를 사실상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실질'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근로자성

하지만 노무제공자가 근로자인지 아닌지의 판단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대법원은 오래 전부터 일관되게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계약의 형식이 고용계약인지 도급계약인지보다 그 실질에 있어 근로자가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였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하여야"(대판 1994.12.9., 94다22859) 한다며 실질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있다.

계약의 형식이나 명칭보다 '실제로' 사업장에서 종속 근로를 하는지 여부로 근로자성 판단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습중심 현장실습생에 대해 기업에서 제도의 취지에 맞게 '실제로' 학습이나 실습만을 시킨다면 실습생은 근로자로 인정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학습'이나 '현장실습'과 '근로'의 경계는 대단히 모호할 수밖에 없다. 기업 현장에서 잔심부름이나 전화 받기 등의 단순한 잡무를 수행하는 것은 실습과 무관한 엄연한 '근로'에 해당한다. 그런데 기업에서 현장실습생에게 이 정도의 잡무도 시키지 않을 것을 기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기업에서 현장실습생에게 학습이나 실습과 함께 근로를 병행시키면, 교육부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현장실습생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당연히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등의 적용과 함께 법 위반 문제도 발생한다.

과거에도 대법원에서 현장실습생에 대해 "고등학교 졸업예정자인 실습생이고 또 그 작업기간이 잠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바로 이러한 사유만으로 동인이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고, 사업주와 실습생 사이의 채용에 관한 계약내용, 작업의 성질과 내용, 보수의 여부 등 그 근로의 실질관계에 의하여 (구)근로기준법 제14조의 규정에 의한 사용종속관계가 있음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그 실습생은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근로자에 해당한다"(대판 1987.06.9., 86다카2920)라며 근로자성을 인정한 예도 있다.

최근 추세와도 맞지 않는 현장실습생에 대한 근로자성 부인

최근에는 과거 근로자성이 부인되던 백화점 위탁판매원, 텔레마케터, 어학원강사, 채권추심원, 웨딩플래너, 지입차주, 아이돌보미, 고시원 총무 등에 대해서도 법원에서 근로자성을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이다. 노동청에서 역시 대학원생 조교의 근로자성을 인정한 바 있다. 이처럼 산업구조가 다변화되며 근로자성 인정 추세도 확대일로를 걷고 있다. 현 정부의 노동존중 정책으로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 등에 대한 근로감독 역시 보다 엄격해지고 있다.

근로기준법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는 쟁점 중 하나가 근로자성에 대한 것이다. 일하는 사람이 근로자인 게 당연하지 근로자인지 아닌지가 뭣이 중하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법원이나 행정기관의 판단을 구하는 경우 얘기가 달라진다. 사업주 입장에서는 노무제공자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게 되면(!)' 근로기준법을 전혀 지키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근로자성 부인처럼 탐나는 이슈도 없다.

그래서 근로자성 쟁점은 노동사건에서 근로자가 넘어야 할 최초의 거대한 문턱이자, 동시에 사용자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제일 먼저 찾는 손쉬운 엄호이다. 이 쟁점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민감한 이유이다.

때문에 이번 현장실습생 제도 변경은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남는다. 필자도 이번에 서울시교육청 취업지원센터의 현장실습지원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어 현장실습생을 실습시키는 선도기업에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방문 일정을 잡기 위해 복잡한 심정을 뒤로 하고 해당 기업에 전화를 걸었다. 현장실습 제도가 잘 운영되는지 확인 차 기업 방문을 하려는데 언제가 일정이 괜찮으냐고 묻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 제가 현장실습생인데요. 전 잘 몰라서... 저희 대표님 번호로 돌려드릴게요."
#현장실습 #직업계고 #특성화고 #근로자성 #근로기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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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노무사. 반려견 '라떼' 아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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