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도, 커피도 못 먹는데 시를 쓸 수 있을까?

[노동시간 읽어주는 사람] 시 쓰는 버스기사, 영화 <패터슨>

등록 2018.09.15 19:06수정 2018.09.15 19:06
0
a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주)

 
사무실 창 밖을 넌지시 바라본다. 익숙한 풍경이 곧 선명하게 들어온다. 4차선 도로 위를 무심히 달리는 자동차 중 버스가 보인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사무실 출근을 위해 기다란 파란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재빨리 내리기 위해 뒷문에 가까이 앉은 내 자리에서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맨 앞자리에 앉아 운전대를 잡은 버스운전 노동자다. 빨노초 신호에 맞춰 적절한 때 브레이크를 밟고 다시 속도를 내는 그 덕분에 오늘도 무사히 사무실에 도착했다.

2017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패터슨>이 불현듯 떠올랐다.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이야기다.

스크린 속 패터슨의 삶은 단조롭고, 평온하다. 매일 아침 6시10분과 15분 사이에 기상한다. 침대에서 일으킨 몸을 끌고나와 식탁 의자에 앉아 시리얼을 먹는다.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정해진 출근 시간에 맞춰 직장까지 걸어가 PATERSON(패터슨)이라 쓰여있는, 그가 담당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자기가 사는 도시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설정도 독특하지만, 정작 내 눈길을 끈 건 그가 입고 있는 푸른색의 유니폼이다. 패터슨은 버스 운전기사다. 그런데 그에게는 운전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행위가 있다. 시 쓰기다.
  
꽤 단조롭고 단순 반복처럼 보이는 패터슨의 일상에서 꿈틀대며 조금씩 나아가는 것은 그가 비밀수첩에 적는 시다. 주변의 모든 것이 그에게 영감을 준다. 출근해 동료에게 듣는 비슷한 푸념, 운전석 뒤로 오가는 버스 승객들의 다양한 이야기, 반려견 마빈을 데리고 산책하러 나갔다 항상 들르는 단골 바(bar)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 패터슨이 가장 사랑하는 동반자 아내 로라의 이야기 등 무궁무진하다.

이렇듯 패터슨의 반복되는 매일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패터슨을 오로지 패터슨으로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힘은 바로 매일 써내려가는 시이자, 그 시를 쓰는 시간이다. 패터슨은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라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버스 운전 노동자인 것이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순간 '한국의 버스 운전 노동자들도 패터슨처럼 시를 쓸 수 있을까?'라는 다소 엉뚱하지만, 마음이 묵직해지는 생각이 들었다.
 
a

아내에게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읽어주는 패터슨 ⓒ 그린나래미디어(주)

  
한국 버스 운전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문제의 심각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한국노총과 가톨릭대학교, 사회건강연구소가 함께 한 2015년 '버스운전노동자의 과로 실태와 기준 연구'에 따르면 경기 시내버스 노동자들은 하루 15시간 이상 운전하는 경우가 전체의 95.7%, 경기 광역버스는 70.1%였다.


장시간 노동을 가중하는 격일제, 복격일제 등 교대제 근무제도 문제다. 격일제란 하루 일하고 하루를 쉬는 것, 복격일제는 이틀 일하고 하루를 쉬는 것을 말한다. 격일제의 경우 하루 평균 17~19시간 근무한다.

이들이 호소하는 노동, 건강문제는 심각하다. 기본적 욕구 해결을 위한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황이 한국 버스 운전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우리가 국물을 잘 안 먹어요. 소변 때문에. 2~3시간 가는데 소변 마려우면 고속도로에서 어떡할 거야. 기사들이 그런 거 다 감안해서 물도 잘 안 마시려 해. 딱 맞춰서 가서 소변 볼 거 생각하고. 커피도 이뇨작용 땜에 안 마시는 사람들 많아요. 그만큼 힘들고, 우리가 다 모든 걸 신경 써서 해야 되고."
- 2018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과로 없는 안전한 버스 교통 복지 확대 완전공영제 시행 경기공동행동, '경기도 버스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향 연구' 중에서)

작년 노동시간을 둘러싼 싸움이 크게 벌어졌다. 무제한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로기준법 59조 폐지에 대한 노동계의 요구가 뜨거웠다. 노동자들은 정말 '죽지 않기' 위해 장시간 노동 근절을 요구했다.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시민들도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2월 28일 특례업종이 26개에서 5개로 줄었다. 시내버스로 대표되는 노선여객자동차운송사업도 특례업종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버스업체와 정부는 대규모 인력채용과 근무체계 개편이 당장 어렵다는 이유로 '노선버스 근로시간 단축 연착륙을 위한 노사정 선언문'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버스 운전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중노동, 과로사 위험이 1년 연장됐다. 버스기사들은 지금도 하루 10시간, 20시간 가까운 장시간 운전을 하고 있다.

만약 패터슨이 한국에서 일하는 버스 운전 노동자였다면 그 주옥같은 시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매일 반복되는 장시간 노동 속에서 그의 푸른색 유니폼은 언제나 반짝였을까? 캄캄한 새벽에 출근해 5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식판에 겨우 배고픔을 잊을 만큼만 밥을 먹으며 다시 버스에 올라타는 한국의 버스 운전 노동자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그런 시간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나래님은 노동시간센터 회원이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에도 실립니다.
#패터슨 #노동시간 #버스운전기사 #장시간노동 #근로기준법
댓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모든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안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