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자본론' 읽었다고 기무사에 끌려갔습니다"

기무사, 학생운동 전력 이유로 집 압수수색... 이름 바꿔도 대공수사권 있는 한 재발 가능성

등록 2018.09.13 10:57수정 2018.09.1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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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육군 25사단에서 군 복무 중이던 신아무개씨는 자신의 부대로 찾아온 국군기무사령부(아래 기무사) 요원들에게 붙들려 기무부대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신씨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기무사의 조사를 받았다. 기무사는 군사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받아 신씨가 부대에서 갖고 있던 물건뿐만 아니라 자택의 책, 편지, 사진, 통장 등을 어머니를 통해 압수했다.

신씨를 상대로 한 기무사의 조사는 열흘 간 계속됐다. 신씨는 "오전 9시께 기무부대로 데려간 뒤 늦은 오후가 돼서야 다시 부대로 돌려보냈다"라며 "오후 10시가 다 돼 조사가 끝났던 날도 있었다"라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처음엔 유하게 조사를 진행했는데 본인들 뜻대로 안 따라주니 윽박지르고 욕설도 내뱉더라, 욕을 들었다고 진술서에 쓰자 그 다음부터 욕은 안 했다"라고 증언했다.

신씨를 더 힘들게 했던 건 조사 내용이었다. 그는 "기무사가 <자본론>(칼 마르크스)을 읽었다는 것을 자꾸 문제 삼았다"라고 토로했다.

"군대 있을 때 책을 100여권 정도 읽었고, 그래서 관물대에 항상 여러 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 그 중 <자본론> 등의 책이 몇 차례 뒤져진 흔적이 느껴져 혹시 몰라 폐기했다. 때문에 압수 물품 중엔 <자본론>이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기무사는 조사 과정에서 <자본론>을 걸고넘어졌다. 법적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이미 나를 사찰했다는 증거다. 사상검증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아 불쾌하면서도 매우 불안했다."

신씨는 "같은 생활관에 인사 관련 업무를 하는 병사가 있었는데 그 병사가 '너 학생운동한 것 때문에 기무사에서 지켜보는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귀띔을 해준 적도 있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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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군 복무 중이던 신아무개씨가 기무사로부터 압수 당한 물품 일부. 시중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 <김수영을 위하여>(강신주) 등의 서적과 6.15공동선언 배지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명목으로 압수 물품에 포함돼 있다. ⓒ 제보자 제공

  
기무사의 압수 물품 중에는 다소 의아한 물건도 포함됐다. 기무사는 신씨가 근무하던 부대에서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 <김수영을 위하여>(강신주), <깨어나라! 협동조합>(김기섭) 등의 서적을 압수했다. 또 자택에서 <자본론의 세계>(강신준), <철학 에세이>(조성오) 등의 서적과 반값등록금 집회 관련 유인물 및 사진, 6·15공동선언 배지 등을 압수했다.

신씨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서적을 조사 과정에서 문제 삼으니 뭔가 엮으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사 과정에서 '나 말고도 조사 받는 사람이 있냐'고 묻자 기무사에서 '여러 명 조사하고 있다'는 식으로 답했다"며 "광범위한 조사가 이뤄졌던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기무사 "첩보 입수해 영장 발부받아"


신씨는 입대 전인 2009년 서울 소재 대학의 총학생회장을 역임했고, 이듬해 10월 입대했다. <오마이뉴스>가 국회 국방위원회 간사인 민홍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군사안보지원사령부(기무사 후신, 아래 안보지원사)에 질의한 결과, 기무사는 학생운동 전력이 있는 장병들을 겨냥한 이른바 '백야사업'의 일환으로 신씨를 조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전직 기무사 요원이 백야사업이란 이름으로 학생운동 전력이 있는 장병을 사찰했다고 폭로해 문제가 된 바 있다. 앞서 <오마이뉴스>는 기무사로부터 휴가 중 이메일·통화 내역이 들춰진 김아무개씨의 사례를 보도했고(관련기사 : [단독] "저는 기무사 사찰 피해자입니다"), 2016년에도 비슷한 사례가 언론에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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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기무사가 작성한 ‘계엄령 검토 문건’ 관련 자료를 즉각 체출 할 것을 지시한 16일 오후 경기도 과천 기무사 정문에서 병사가 근무를 서고 있다. ⓒ 이희훈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측은 "신씨가 법원에서 판결한 이적단체에 가입·활동했다는 첩보를 입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5사단 보통군사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검증 영장을 발부받았다"라며 "수사 후 2012년 5월 30일 25사단 보통검찰부에 (사건을) 송치했다"라고 밝혔다. 또 "2016년 말 백야사업이 폐지돼 (학생운동 전력이 있는 장병을) 더 이상 수사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신씨는 "기무사가 조사 과정에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행사에 참석했다는 걸 문제 삼았는데, 당시 우리 대학 학생회는 한총련 소속도 아니었고 행사에는 참관 차 간 것이었다"라며 기무사의 이적단체 가입·활동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면서 "조사 받는 동안 멘탈이 탈탈 털리는 기분이었다,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었다"라며 "한동안 트라우마를 겪었고 학교생활을 같이 했던 친구들에게는 연락도 못했다"라고 토로했다. 군검찰에 송치된 이 사건은 2012년 9월 신씨가 전역한 후 민간검찰로 이송됐고, 같은 해 12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구체적인 혐의가 없는데도 입대 전 학생운동 경력을 문제 삼아 장병을 사찰하고 조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내놨다. 군 법무관 출신의 김정민 변호사는 "최소한의 혐의 사실도 입증이 안 된 상황에서 첩보만으로 군사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았다는 것은 기무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라며 "학생운동 전력이 범법 행위도 아닌데 이를 백야사업이란 이름으로 별도로 관리해 여차하면 압수수색을 진행하는 건 심각한 인권침해다"라고 지적했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정책기획팀장도 "학생운동 전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장병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것은 '한 번 털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식의 위법한 수사 방식이다"라며 "<자본론>을 문제 삼고, 6.15공동선언 배지를 압수한 것 보면 뭐든 털어 이른바 공안사건을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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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전 경기도 과천 군사안보지원사령부(옛 국군기무사령부)에서 열린 부대 창설식에서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남영신 초대 군사안보지원사령관에게 부대기를 전달하고 있다. 군사안보지원사령부는 국방부 직할 부대로 2900명 규모로 보인, 방첩에 중점을 두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특히 이들은 "대공수사권이 문제"라고 강조했다. 2016년 말 백야사업이 폐지됐고 계엄령 문건 작성 등의 문제로 기무사가 '해편(解編, 풀어서 다시 지음)'됐다고 하지만, 기무사의 후신인 안보지원사는 여전히 대공수사권을 쥐고 있다.

김형남 팀장은 "백야사업이 폐지됐을 뿐이지 기무사의 대공수사권이 사라진 건 아니다"라며 "상황에 따라 언제든 장병 사찰이 진행될 수 있다, 대공수사권을 헌병에 넘겨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정민 변호사도 "학생운동 전력의 장병이 입대하면 기무사에선 '좋은 먹잇감이 들어왔다'고 환호한다"며 "대공수사권이 있는 한 언제든 장병 사찰은 진행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국회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거론된 바 있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의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5일 보도자료를 통해 "기무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보기능과 수사기능을 모두 갖고 있는 것"이라며 "기무사에서 수사기능을 분리해 헌병이나 군 검찰로 이전해야 한다"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지난달 14일 대공수사권을 그대로 둔 '군사안보지원사령부령(대통령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했고, 이에 따라 지난 1일 안보지원사가 창설됐다. 다만 안보지원사의 수집·처리 업무 대상이 '첩보'에서 '정보'로 바뀌었는데, 국방부는 "확인된 정보만을 취급해 정보활동의 책임성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기무사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장병 #사찰 #자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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