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아이... 고꾸라진 나를 받아준 건 엄마였다

[일하는 여자들을 위한 그림책] 이지은 글·그림 '빨간 열매'

등록 2018.09.14 19:53수정 2018.09.14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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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일을 쉰 적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하면서 보고 느낀 그림책이 적지 않습니다. '어른이'의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 기자 말

'덕질(좋아하는 분야나 대상을 즐기는 행위)'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할머니 엄마>를 내 생에 그림책으로 꼽을 만큼 좋아했는데, <빨간 열매>를 몰라보다니. 페이스북에서 광고 및 동영상이 돌기도 했고, 종종 들르는 그림책 전문 서점에서 작가와의 대화도 열렸는데 작가 이름을 미처 보지 못했던 거다. 아니 나중에 작가 이름을 보았을 때도 이 이지은이 그 이지은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전 그림책과 느낌이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이지은 작가의 그림책. 그림 분위기가 전혀 달라졌다. ⓒ 사계절


 
나도 안다. 말도 안 되는 투정이라는 걸. 작가의 색깔을 어떻게 하나로 단정할 수 있냐고, 다양한 모습을 독자에게 선보이고 싶은 건 모든 작가의 바람이 아니겠냐고, 그런 면에서 이지은 작가는 성공한 게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인정, 인정한다. 그래서 더 놀랄 뿐이다. 이지은 작가의 변신이. 그런데 변하지 않은 게 있더라. 그림책 속에 깃든 따뜻한 마음, 그건 여전했다. 역시 이지은이구나 싶었다. 또 울어버렸다.

어느 날 배고픈 아기곰은 빨간 열매를 맛있게 먹는다. 너무 맛있어서 더 먹고 싶어진다. 그래서 의심 없이 나무를 오른다. 빨간 열매인가 싶은 것을 만나지만 아니다. 또 그런 것을 만나지만 역시 아니다. 나무 꼭대기 끝까지 다다랐지만 빨간 열매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뭐지? 엄청나게 큰 빨간 열매가 저 멀리 보이는 게 아닌가. 고민 없이 지체 없이 몸을 던지는 아기곰. 나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쿵 하고 떨어지는 아기곰을 '검고 푸진' 그 무엇이 받아 안을 것이라고는. 아기곰의 엄마였을까, 아빠였을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큰 곰이었을까.

엄마 없이 엄마로 살 수 있었을까
 

'빨간 열매' 속 그림 ⓒ 사계절

 
빨리 독립하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무렵부터 대학만 가면 집에서 나와야지 생각했다. 집은 고단한 마음을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아빠도, 엄마도, 오빠도 함께 있는 그 불편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대학엔 갔지만 집을 나올 수 없었다. 돈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장 빨리 졸업이란 걸 하고 싶었다.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그러려면 가능한 한 빨리 취업이란 걸 해야 했다. 대기업, 공무원, 높은 연봉? 처음부터 그런 목표 따윈 없었다. 그저 취재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곳이면 족했다. 기대치가 낮아서였을까. 생각보다 빨리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래도 독립할 수 없었다. 대학에 다니면서 은행에서 빌려 쓴 학자금을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턱없이 적은 월급으로는 저축은커녕 카드 돌려막기에 바빴다. 근근이 버텼다. 사방이 막힌 길을 걷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독립도 하지 못하고 그 집에 계속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 그랬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그 막막함에 힘들었고 순간순간 우울했다.

그때였다. 아빠가 교통사고가 난 건. 염치가 좀 없었지만 합의금으로 받은 돈 가운데 일부를 달라고 했다. 아빠는 노발대발했다. 그 돈을 빼내서 나에게 준 건 엄마였다. 빚부터 갚으라고 했다. 빚으로부터 탈출한 나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했다. 내 기준에서 '완벽한' 독립이었다. 오해 마시라. 도망이나 회피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같이 살고 싶었을 뿐.

그런 내가, 오매불망 집에서 독립하길 바랐던 내가, 엄마랑 다시 살게 될 줄 몰랐다. 아이 때문이었다. 아쉬운 건 나였는데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엄마랑 함께 있는 건 여전히 편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엄마가 없으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회사는 멀었고, 몸은 아팠다. 아픈 몸으로 일하러 가는 내가 엄마는 못마땅했다. "그만두라"는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왜? 이대로 경력단절되면 엄마가 취업시켜 줄 것도 아니면서." 내 맘을 몰라주는 엄마가 서운해서 아무 말이나 해댔다. 엄마는 당신 마음을 몰라주는 나 때문에 서운했을 거다.

그래도 지친 몸으로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엄마에게 "저녁으로 뭐 해줄까?"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으면 기운이 펄펄 났다. 5분 만에 때우는 찬밥이 아니라, 따습고 정갈한 밥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불맛이 나는 제육볶음, 양파가 떡보다 많은 떡볶이 같은 엄마만의 음식, 엄마만의 맛이 나는 음식을 먹을 때면 더 그랬다. 에너지가 가득 담긴 엄마 밥을 든든히 먹은 나는 틈틈이 글을 쓰고, 회사에 나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아이를 돌볼 수 있었다.

아기곰을 받아 준 큰 곰처럼...

맞다. 아기곰이 나였다. 세상을 향해 겁도 없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 오르기만 하던 내가 고꾸라질 때 나를 받아준 건 엄마였다. 붉은 열매를 먹여준 것도 엄마였다. 노란 열매를 생각하며 앞으로 계속 나아갈 힘을 준 것도 엄마였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빨간 열매>를 읽으면서 주책맞게 눈물이 났던 건 그 때문이었다. '엄마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다. 이지은 작가도 책 뒤에 썼다.
 
"아기곰을 받아 준 큰 곰처럼 든든한 존재가 있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 생각합니다. 내일의 노란 열매를 다시 꿈꾸기 위해서요."

나도 큰 곰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에게 정성스레 빨간 열매를 먹이고, 내일의 노란 열매를 꿈꾸게 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베이비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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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다다와 함께 읽은 그림책'을 연재하며,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펴냈습니다.

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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