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뛰어넘은 유럽, 겨우 200년 전 일

[서평] 로버트 B. 마르크스 '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가'

등록 2018.09.13 13:20수정 2018.09.1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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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궁금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것이 어디서 출발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 것이다. 냉장고와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 컴퓨터와 스마트폰 같은 전자제품,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운송수단, 아파트와 연립주택 같은 주거형태.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 초중등학교와 대학, 자유와 평등, 형제애로 대표되는 혁명이념과 천부인권사상.

이런 본보기를 들자면 끝이 없을 듯하다. 그래서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하는 제약광고를 들었을 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리 것이란 게 무엇이며, 어디까지를 말하는 걸까?" 21세기를 살면서 우리와 그들의 경계를 긋는 일은 쉽지 않다. 현대차와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율이 50% 내외이고, 국민은행의 그것은 70% 전후다.


<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가>는 흥미롭고 도전적인 책이다. 이 서책은 미국 휘티어 대학에서 동양사와 세계사를 가르치는 로버트 B. 마르크스 교수의 날카로운 분석을 담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유럽과 일본, 미국에서 장구한 세월 통용된 '선진서양 후진동양' 도식을 보기 좋게 파기한다. 나아가 유럽 (미국) 중심주의를 정면 반박한다.

마르크스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제국건설에 나선 유럽의 힘이 500년 유지됐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1800년 전후 100년 만에 어떻게 아시아가 유럽에 역전 당했는지,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왜 제3세계로 전락했는지 천착한다. 서구의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오리엔탈리즘'에도 반대한다.

통계로 보는 유럽과 아시아

마르크스의 서책에는 통계가 빼곡하다. 숫자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는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숫자와 통계를 제외한 역사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예컨대 9600만 평방킬로미터의 지구 육지면적 가운데 7% 남짓한 680만 평방킬로미터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70%에 달하는 인간이 같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 고도로 발달한 15개 문명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문명은 일본,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인도, 이슬람 계열의 서아시아, 유럽, 아스텍, 잉카였다. 중국과 유럽은 오랜 기간 비슷한 인구규모를 유지했다. 세계 인구에서 중국이 25-40%, 유럽이 25%, 인도가 20%를 차지했다." (35~36쪽)
 
1400년대 3억 5천만이었던 세계 인구는 1800년대에 7억 2천만이 된다. 인구의 80%는 농부였다. 1750년 세계인구의 66%가 아시아에 거주했고, 1775년 아시아는 세계생산의 80%를 점했다. 그런데 1800년대 초반 유럽의 총생산비중이 급증한다. 1900년 제조업에서 인도 2%, 중국 7%, 일본 10%, 유럽 60%, 미국 20%로 역전된다.

이렇게 보면 유럽이 경제생산에서 아시아를 능가하기 시작한 시점은 지금부터 불과 200년도 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함께 들여다보자.


1300년부터 1750년까지 아시아와 유럽
 

10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식량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는 농업혁명이 발생한다. 잉여작물이 생겨남에 따라 지배자와 사제, 전사(戰士)와 유목민이 부상하였고, 도시와 문자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그와 함께 60진법 같은 계산체계와 달력, 종교의식이 성행하고, 지배계급과 피지배집단이 형성된다. 일컬어 문명의 발생이다.

하지만 당시 문명은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농업에 의존했다. 마르크스는 농업혁명 이후 1만년 지속된 이런 생활방식을 '생물학적 구제도'라 규정한다.
 
"지배계층은 농민계층을 핍박하며 살아가고, 여러 문명은 유목민 침략자들과 싸우거나 패배하고, 병균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번식하다가 유목민과 시민들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형태를 생물학적 구제도라 불러왔다." (60쪽)
 
생물학적 구제도가 변하기 전까지 유라시아에는 중국과 인도, 아바스왕조의 이슬람 그리고 유럽으로 세력균형이 이루어졌다. 라틴아메리카에는 잉카와 아스텍이 수천만 인민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군림하고, 아프리카는 세계교역의 일정부분을 담당한다. 하되 신대륙 발견이후 라틴아메리카 제국은 붕괴하고, 아프리카는 노예공급처로 전락한다.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말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3대 133년 전성기를 맞은 청나라가 동아시아 체제의 중심에 선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뒤를 이은 영국이 식민지 경쟁에서 선두에 섬으로써 영국 중심의 유럽-아메리카 체제가 동아시아 체제와 대립한다. 이것이 18세기 후반의 세계다. 그러다가 19세기에 균형추가 영국으로 이동한다.

산업혁명과 유럽 중심주의
 

유라시아의 동과 서를 대표하는 중국과 영국이 생물학적 구제도의 포로였던 시기가 1750년을 기점으로 변화한다. 영국이 석탄과 열에너지로 증기기관을 사용하면서 급변양상이 전개된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증기기관차가 질주하는 철도가 건설되면서 구체화한다. 맨체스터와 리버풀 구간을 상업용 증기기관차가 1830년에 질주한 것이다. 석탄과 증기기관이 야기한 산업혁명의 의미를 마르크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바람과 물, 동물에 의존하던 동력을 증기로 대체하면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농업혁명보다 훨씬 중요하다. 농업혁명은 태양 에너지를 활용하여 인구증대와 문명의 번영을 인도했지만, 생물학적 구제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산업혁명은 그것을 벗어나 석탄과 석유로 대표되는 광물 에너지를 기초로 전혀 새로운 경제체제와 생활방식을 구축하도록 인도한다. 산업세계의 역사는 불과 200년에 지나지 않는다." (156~195쪽)
 
 
석탄과 식민지 경영으로 영국이 시작한 산업화를 프랑스, 미국, 도이칠란트, 러시아가 뒤따르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선두주자로 부상한다. 산업혁명으로 대규모 노동자계층이 등장하고,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된다. 프랑스 대혁명과 혁명사상은 인간을 더 이상 백성이 아니라, 시민으로 탄생시키는 정치적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 영향으로 만들어진 민족과 민족주의는 1830~1380년까지 유럽의 근대국가 형성에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1871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이후 1914년까지 유럽은 전쟁을 중지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에 혈안이 된다. 그리하여 영국, 프랑스, 도이칠란트, 벨기에가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전역을 분할하기에 이른다. 서구의 부상과 여타지역의 퇴보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적 근거로 제시된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이 유럽을 석권한다. 백인의 서유럽이 세계를 선도하고, 여타지역은 복종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유럽 중심주의가 대두한 것이다.

아시아가 돌아오고 있다?!
 

1900년에는 문명과 야만의 20세기를 예비하는 주요 요소들이 제국주의 국가들 내부에 견고하게 자리 잡는다. 그것은 민족국가, 산업화, 제국주의 군대, 인종주의, 사회진화론, 기독교적 문명화, 일본의 탈아입구론 (脫亞入歐論) 등이다. 이것들은 1914년~1918년의 제1차 섹대전과 1939년~1945년의 제2차 대전까지 위력을 유지한다.

마르크스가 간명하게 정리하는 20세기의 빛과 그림자를 보자.
 
"1차 대전은 19세기 후반에 성립된 제국주의 체제를 흔들었고, 20세기를 전쟁과 폭력의 세기로 이끄는데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식민체제와 일본의 신제국을 무너뜨리고 미국과 소련이 지배하는 양분된 세계를 탄생시킨 것은 2차 대전이었다. 20세기에는 2억에 달하는 사람이 전쟁, 혁명, 대량학살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20세기에 인간이 사용한 에너지는 농업혁명부터 산업혁명에 이르는 1만년 동안의 에너지보다 많다." (250쪽)
 
 
지난 세기 70년대 이후 가속화된 전자혁명으로 인류는 과학기술문명의 신기원을 경험하고 있다. 20세기에는 세계의 부와 권력이 서구의 핵심국가들로부터 미국으로 이전되었다. 미국과 겨루던 소련제국이 1991년 허망하게 무너져 내림으로써 미국의 단극체제가 성립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아시아의 부상이 현저하게 감촉된다.

전후폐허의 잿더미에서 일본이 일어서고, 영원한 제국 중국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며,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 등이 신흥공업국 위상을 차지한다. 이런 양상은 2017년 통계가 선명하게 보여준다. 유럽과 미국이 세계 총생산의 각각 25%, 중국이 15%, 일본이 7%, 인도가 3%를 점유한다. 아시아의 세계 총생산 비중이 4분의 1을 넘는 것이다.

21세기 세계에서 중국과 인도, 일본과 한국 등이 선도하는 아시아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만큼 지난 200년 동안 유지돼온 유럽 (미국) 중심주의 내지 유럽적 보편주의는 종언을 고할 때가 되었다. 인류가 하나라는 세계적 보편주의 혹은 보편적 보편주의(임마누엘 월러스틴)로 선회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가 - 세계 경제를 장악했던 동양은 어떻게 불과 2백 년 사이에 서양에게 역전당했는가

로버트 B. 마르크스 지음, 윤영호 옮김,
사이, 2014


#마르크스 #생물학적 구제도 #농업혁명 #산업혁명 #유럽중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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