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하는 남편, 눈물 훔친 시어머니... 올 것이 왔다

[요즘 것들의 명절] '착한 며느리' 대신 '솔직한 며느리'를 선택하고 벌어진 일

등록 2018.09.24 13:21수정 2018.09.24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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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중심의 명절 문화를 21세기에 걸맞게 직접 고치고 바꿔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것들의 명절'에서 그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캐나다 밴쿠버에 머문 지 1년 남짓. 지난 봄 연재한 '나의 독박돌봄노동 탈출기'에 적었듯, 이곳에서 나는 가부장적 가정문화를 거부하고 육아와 가사에서 평등한 책임감을 지니는 부부관계를 추구해왔다. 

남편은 여성과 남성 모두 온전한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부장적인 성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만 10살인 아들도 우리의 변화에 함께했다. 우리 가족은 자신의 공간과 옷, 물건들을 각자 책임감 있게 정리하고, 식사 준비와 설거지를 다 함께 해나가면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가정을 돌보는 데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나의 독박돌봄노동 탈출기]

① 암투병 중에도 '독박돌봄'... 엄마처럼 살까 두려웠다
② 술 먹고 쓰러진 남편... 가부장제가 잘못했네
③ '남편만큼 돈도 못 버는데'... 늘 나만 아쉽고 미안했다
④ 나는 허락, 남편은 통보... 여기선 가정폭력이었다
⑤ 나의 갑작스런 '돌봄 파업', 남편도 힘들었겠구나
⑥ 독박육아 탈출을 가능케 한 이것(feat. 허탈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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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지난 8월 시어머니의 밴쿠버 방문이 결정됐다. (사진은 MBC 드라마 <백년의 유산> 스틸컷) ⓒ MBC

 
그런데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지난 8월 시어머니의 밴쿠버 방문이 결정됐다. '외국에 살 때 한 번쯤 여행은 시켜드리는 게 도리'라는 마음에 시어머니를 초대했지만, 막상 시어머니의 방문 날짜가 다가오자 부담스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한국에서 식사를 할 때면 함께 자리한 집안 남자들(시아버지, 남편, 아들)이 식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물을 떠다 주곤 하셨던 시어머니. 남편이 자신의 빨래를 스스로 개며, 식사준비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어머니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웠다.

동시에 내면에선 두 마음이 싸우기 시작했다. '어머님 앞에선 착한 며느리가 되자, 잠깐 계시는 거니 그냥 맞춰드리자'라는 마음과 '우리의 변화가 잘못된 것도 아닌데, 당당히 보여드리고 대화를 나눠봐'라는 상반된 마음이 충돌했다.

나는 고민 끝에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시어머니가 오실 때마다 '착한 며느리'인 척 행동한다면, 칭찬은 받을지 몰라도 내 마음은 점점 더 시댁과 멀어질 것 같았다. 나는 '착한 며느리' 대신 '솔직한 며느리'가 되기로 다짐하고 독박돌봄노동 탈출 후 처음으로 시어머니와 마주했다.


[에피소드1] 이 나간 그릇

시어머니는 점심 무렵 밴쿠버에 도착하셨다. 남편이 시어머니를 마중하러 공항에 간 사이 나는 아들과 함께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시어머니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식탁에 둘러앉았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조심스럽고 얌전하게 국과 밥을 담았다.

하지만, 집주인이 제공한 이가 나간 그릇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문제였다. 1년 반만 잠시 살다갈 터라 그릇을 바꾸지 않고 그냥 써왔다. 시어머니는 이가 나간 그릇에 음식을 담는 나를 보더니 한 말씀 건네셨다.

"아비랑 아이 것은 여기에 담지 마라."

순간,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싶었다. 좋은 것은 남자들의 몫이고, 흠이 있는 것들은 여자들이 사용해야 한다는, 자신을 낮추는 시어머니의 마음. 내게 그런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잠시 숨을 내쉰 후 최대한 웃으면서 "그럼 우리도 여기다 먹지 말아요"라고 말하며 음식을 새로 담아냈다. 그렇게 첫 위기는 지나갔다.

[에피소드2] 집안일 손도 안 대는 사위... 딸이 안됐어

다음 날. 남편은 출근을 하고 시어머니와 나는 오랜만에 둘이서 차 한 잔을 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시어머니의 화제는 시누네였다. 요지는 시누가 아이들 방학 때 시어머니댁에 오래도록 머물다 갔는데, 그 이유가 시누의 남편이 집안일을 거들지도, 아이를 봐주지도 않아서 힘들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시어머니는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해온 자신의 모습을 딸이 닮아가는 것 같아 내심 속상해하시는 눈치였다.

"엄마처럼 안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나를 닮아간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더라. 그래서 내가 일 시작하라고 했어. 일하면서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집안일은 가사도우미 도움받으라고 말이야."

시어머니의 이 말씀에 난 용기를 내어 그동안 우리 집에서 일어난 변화들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왜 가족 구성원들이 아내(엄마)의 희생에 의존하지 않고 함께 가정을 보살펴야 하는지, 왜 가정이 각자의 독립과 성장을 위한 곳이 돼야 하는지, 이를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남편이 집안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이런 모습을 배워가는 아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등을 전하며 함께 가정을 가꾸니 부부 사이도 더 좋아진 것 같다고 시어머니께 털어놓았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대화로 풀어가고 노력하는 거 보니 좋다, 아범이 집안일도 잘하고 그런다니 좋네"라고 답하셨다. 난 시어머니와 여자로서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아 무척 뿌듯했다.
 

나는 어머님과 솔직한 대화 후 같은 여자로서 연대감을 느꼈다. 사진은 지난 2012년 방영된 KBS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고부협정'을 맺는 장면. ⓒ KBS

 
[에피소드3] 내 아들이 설거지를 하다니

그런데 이건 성급한 판단이었다. 며칠 후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시어머니의 반응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여느 때처럼 식기세척기에 그릇들을 정리해 넣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기 위해 집을 나섰다.

늘 그랬듯, 내가 강아지의 저녁 산책을 시키는 동안 남편은 식기세척기를 사용할 수 없는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싱크대 정리를 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집안 분위기가 이상했다. 시어머니는 눈가에 약간 눈물이 고이신 것 같았고, 남편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었다. 내가 의아해하자 남편이 눈치를 줬다.

"내가 설거지 하고 있는 거 보니 엄마가 속상하신가 봐. 그래서 내가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씀드렸어."

남편의 설명은 고마웠지만, 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며칠 전 시누네 상황을 안타까워하시며 집안일에 관여하지 않는 사위를 나무라셨던 시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은 다른 기준으로 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 뒤로 시어머니는 남편이 집안일을 할세라 식사 후 자신이 늘 먼저 싱크대로 가셨고, 남편은 자연스레 소파로 가서 앉았다. 내게 전혀 집안일을 강요하지는 않으셨지만, 이런 시어머니의 자세는 내겐 무언의 압박으로 느껴졌다.

[에피소드4] 솔직하게 이야기하다

이날 이후 나는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가부장제 하에서 희생을 당연히 받아들인 채 살아오신 시어머니의 삶에 연민이 느껴지면서도, 이 멀리 여행을 오셔서도 그 삶을 내려놓지 못하는 모습에 답답함과 분노가 동시에 올라왔다.

시어머니는 내게 전통적인 며느리, 아내로서의 역할을 단 한 번도 언어로 강요하신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시어머니께서 보여주시는 삶 그 자체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내게 묘한 죄책감을 유발했다. 어쩌면, 이는 나 자신이 아직도 가부장적 성 역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고민 끝에 시어머니와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어머니가 밴쿠버를 떠나시기 며칠 전, 둘만 오붓이 있을 시간이 났다. 나는 시어머니께 속상한 일이 있으시냐고 넌지시 물었다. 시어머니의 답변은 솔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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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설거지해도 되는 걸 굳이 아범이 한다고 하는데, 퇴근해서 와서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니 좀 그렇더라고..." (사진은 tvN 드라마 <이번생은 처음이라> 스틸컷) ⓒ tvN

 
"내가 설거지해도 되는 걸 굳이 아범이 한다고 하는데, 퇴근해서 와서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니 좀 그렇더라고..."

"왜 어머님이랑 저는 해도 되고, 아이 아빤 하면 안 되는데요? 저희 집이니 어머님이 쉬시고 저희가 집안일 해야죠. 남편은 손님이 아니라 집주인이잖아요. 왜 여자들만 이런 일들을 감당해야 하는데요?"

나는 시어머니께 솔직하게 되물었다.

"그러게 말이야. 사위가 집안일 안 하는 건 보기 싫었으면서, 아들이 집안일 하는 거 보고서는 속상해하다니. 나도 내가 가식적이어서 놀랐어. 첨엔 좀 그랬는데, 며칠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네가 현명한 거 같아. 난 평생 그냥 이렇게 사나보다 하고 살았는데, 생각해보니 억울하고 그런 거 다 참고 살아온 게 맞아. 앞으로 살아가는 여자들이 이렇게 살지 않으려면, 너희처럼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좀 서운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생각 안 하려 노력하려고. (시)아버님이 이해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노력해볼게."

나는 시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일주일 전. 시어머니는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시어머니와의 시간을 돌아보면 보다 잘해드리지 못한 것들이 떠올라 죄송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착한 며느리'되기를 포기하고 '솔직한 며느리'로 행동하자, 시어머니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대화를 통해 자신이 이중 잣대를 가지고 행동했음을 깨달으셨고, 본인 역시 가부장제 문화에서 부당하게 살아오셨음을 처음으로 언어로 표현하셨다. 그리고 나는 시어머니와 같은 여자로서 동료애를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시어머니께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잘한다는 칭찬을 받지는 못했지만, 시어머니가 한층 친근하게 느껴지는 이 기분이 참 좋다. 앞으로는 시어머니와 여자 대 여자로서 더 진솔한 대화들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대화가 좀 더 잦아지고, 함께 실천 방안을 찾다보면, 나뿐 아니라 시어머니도 시누도 언젠간 독박돌봄노동을 탈출할 날이 오지 않을까. 나아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마음을 모아 개선점을 찾아가는 가족 단위가 많아진다면 가부장 문화의 끝판을 달리는 한국의 명절문화도 바꿔 갈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개인블로그에도 실립니다.
#가부장제 #시어머니 #며느리 #페미니즘 #고부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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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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