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연료 제로' 밀어붙이는 '주민의 힘'

[에너지 대전환, 내일을 위한 선택 26] 스웨덴의 경험 (상)

등록 2018.09.14 08:42수정 2018.11.0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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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석유 등 화석연료로 인한 지구온난화와 미세먼지 오염, 그리고 후쿠시마 참사가 보여 준 원전재난의 가능성은 '더 이상 위험한 에너지에 기댈 수 없다'는 깨달음을 확산시키고 있다. 지난해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중단으로 본격화한 탈핵 논쟁은 우리 사회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에너지체제를 전환할 수 있을 것인지 가늠할 시험대가 되고 있다. <단비뉴스>는 기후변화와 원전사고의 재앙을 막고 '안전하며 지속가능한 에너지구조'를 만들기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모색하는 심층기획을 연재한다. - 기자 말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 Commission)는 지난해 6월 2일 독일 에센에서 열린 녹색도시 시상식에서 스웨덴 벡셰(Växjö)를 벨기에 루벤(Leuven)과 함께 '2018 유럽 그린 리프(European Green Leaf)'로 선정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매년 자연보호와 녹색성장을 선도해 온 도시를 뽑는데, 인구 10만 이상 도시에는 '유럽 그린 캐피탈', 인구 2만~10만 사이 소도시에는 유럽 그린 리프 상을 준다.

위원회는 "벡셰의 꾸준한 화석연료 퇴출 정책과 바이오매스 활용 등을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벡셰는 지난 2007년 유럽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지속가능에너지 유럽'의 커뮤니티 부문에서도 상을 받았고, 발트도시연합(UBC)이 주최한 '발틱 시티 어워드(Baltic Cities Award)'에서는 환경 모범사례로 선정되기도 했다.

호수 정화 작업으로 시작된 녹색도시 벡셰
        

자전거 타는 벡셰 시민들. ⓒ 벡셰시(市) 홈페이지


벡셰는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서 남서쪽으로 약 450km 떨어진 인구 9만의 작은 도시로,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벡셰시 홈페이지 자료에 따르면 2015년 기준 벡셰 전체 에너지 공급원 중 64.4%가 목재와 바이오연료 등 재생에너지다.

시내 한가운데에는 시 전역에 열과 전기를 공급하는 샌드빅 열병합발전소(Sandviksverket)가 자리 잡고 있다. 1887년 세워진 이 발전소는 1970년대 말까지 석유를 연료로 전기를 생산했지만, 지금은 바이오매스가 주 연료다. 발전소를 운영하는 시영 에너지회사 VEAB(벡셰에너지)는 우드칩(목재 부산물로 만든 연료)과 벌목과정에서 나온 나무껍질, 톱밥 등을 많이 쓴다고 홈페이지에서 설명했다.
 

벡셰시 트루멘 호수 일대 모습. 1970년대의 복원 작업 후 호수 가장자리로 조깅 코스가 생겼고, 벡셰 시민들은 호수에서 수영과 일광욕을 즐길 수 있게 됐다. ⓒ 벡셰시 홈페이지

 
"도시는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숲에서 샌드빅 발전소까지의 거리는 100km 미만입니다. 또 스웨덴에는 나무를 자르면 그만큼 새 나무를 심어야한다는 법이 있습니다. 이런 지리적, 법적 여건이 우리에게 재생가능 에너지원이 영원히 지속가능한 상황을 제공합니다."

벡셰시의 환경정책을 총괄하는 지속가능발전부 에너지담당관 얀 요한손(51)씨는 지난 7월 5일 <단비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바이오매스가 가장 적합한 재생가능 에너지원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요한손 담당관에 따르면 벡셰 시민들이 지금과 같은 에너지 전환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수십 년 전의 '호수정화'와 '석유파동'이었다.
 

벡셰시 지속가능발전부 에너지담당관 얀 요한손 씨. <단비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시의 에너지전환 역사 등을 설명했다. ⓒ Jan Johansson

 
샌드빅 발전소 옆에 자리 잡은 75ha, 축구장 약 102개 크기의 트루멘 호수는 오랫동안 공업 폐수와 생활하수가 쌓이면서 심각하게 오염됐다. 벡셰시는 1970년대 초 호수 퇴적물을 제거하는 등의 복원작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악취와 쓰레기로 가득했던 호수가 사람이 수영을 할 수 있을 만큼 맑아지는 과정을 지켜본 시민들은 환경 보호의 가치를 절감하게 됐다.

에너지 전환의 방아쇠를 당긴 석유파동 


트루멘 호수가 복원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제4차 중동전쟁(1973~74년)과 이란혁명(1978~80년)이 두 차례의 호된 석유파동을 일으켰다.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 수출을 줄이고 가격을 올리자 스웨덴을 포함한 석유수입국들은 물가급등을 포함한 홍역을 심각하게 치렀다. 벡셰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요한손 담당관은 "1970년대 두 차례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벡셰 시민들은 주변 세계에 의존하고 있는 구조가 에너지 비용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했다"며 "석유파동은 백셰 에너지 전환의 방아쇠"라고 표현했다. VEAB는 석유파동 직후인 1980년부터 샌드빅 발전소 연료를 석유에서 바이오매스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우리는 환경 문제에서 미래를 위한 현명한 조치가 무엇인지 알고자 환경 비정부기구(NGO)와 협력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지식을 쌓았죠. 여러 번의 회의 끝에 벡셰 정치인들은 '화석연료 제로'를 만장일치로 결정했습니다."

벡셰 의회가 '석유·석탄 등 화석연료를 전혀 쓰지 않는 도시'를 추구하기로 선언한 것은 선진국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규정한 교토의정서(1997)가 나오기 1년 전인 1996년이다. 요한손씨가 말한 환경 NGO는 '스웨덴 자연보호협회(SSNC)'다. 1909년 설립된 SSNC는 2016년 기준 회원 수가 22만명에 이르는 스웨덴 최대, 최고령의 환경보호단체다. 벡셰시는 1995년부터 2년간 SSNC와 함께 '환경 지자체 벡셰'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시민단체와 지자체가 손잡고 '환경 도시' 박차

요한손 담당관에 따르면 벡셰와 NGO의 협업이 잘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의제 21(Agenda 21)'이다. 의제21은 1992년 리우 유엔환경개발회의에서 채택된 '리우선언'의 실천계획으로, 환경문제를 사회의 여러 주체가 협력해서 해결한다는 원칙을 담았다. 의제21은 특히 지방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요한손 담당관은 "1992년 스웨덴 중앙정부가 의제 21에 서명한 후, 몇 년에 걸쳐 지자체 절반 이상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스웨덴 지방자치단체연합회 보고서에 따르면 4년 뒤인 1996년에는 벡셰와 같은 기초자치단체(코뮌, Kommun) 288곳의 참가율이 100%에 이르렀다.
 

벡셰시의 이산화탄소 배출량 변화 추이를 보여주는 그래프. 2015년 기준으로 시 전체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1993년에 비해 43%나 줄었다. ⓒ 벡셰시, 박진홍

 
벡셰는 1995년에 시의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집행위원회 아래 '의제 21 위원회'를 설치했다. 또 '의제 21 코디네이터'를 고용해 업무추진을 맡겼다. 코디네이터들은 각 분야 전문가나 SSNC에서 파견한 활동가 등 NGO 출신으로 구성됐다. '환경 지자체 벡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벡셰 시민이 참여하는 환경정책 세미나가 십여 차례 열렸고 세미나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코디네이터들을 통해 정책에 반영됐다.

이런 주민참여가 바탕이 돼 1999년에는 '시의 모든 부서와 회사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책임을 진다'는 내용을 담은 '의제 21 전략(Agenda 21 Strategy)'이 시의회에서 채택됐다.

일본 환경‧에너지 전문가 이이다 데츠나리(59)는 저서 <에너지 민주주의>에서 환경도시 벡셰의 성공 비결로 중앙정부의 선도적 환경정책과 함께 '지방자치'를 꼽았다. 스웨덴 중앙정부는 1991년 석유 등에 탄소배출량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탄소세를 도입하는 등  각종 환경세를 부과해 화석연료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또 2003년에는 풍력, 바이오매스 등으로 전기를 만드는 생산자에게 인증서를 발급,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전력인증제를 도입하는 등 재생에너지 장려 정책을 폈다.

강력한 지방분권국가인 스웨덴에서는 중앙정부가 이런 식으로 환경정책의 큰 틀을 정하면 실질적 추진은 기초자치단체인 코뮌이 맡는다. 코뮌은 세금징수권을 갖고 있고, 폐기물‧상하수도‧공공교통 정책을 관장하는 동시에 지역 환경보전과 시민 건강유지 책임을 진다.

이이다씨는 저서에서 "스웨덴의 모든 코뮌은 의제 21을 담당하는 직원과 예산을 갖추고 있다"며 "이런 열성적인 추진 배경에는 높은 자치성을 가진 코뮌의 역사가 있다"고 분석했다.

탄소배출 팍팍 줄여도 경제 쑥쑥 성장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이렇게 탄소배출 감소에 열을 올리면 경제성장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우리나라 산업계가 정부의 기후변화대응 정책에 반대하는 논리가 바로 '기업 비용이 늘어 경제성장에 불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웨덴과 벡셰시의 경험은 이런 우려에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벡셰시 자료에 따르면 1993년에서 2015년까지 스웨덴의 1인당 이산화탄소배출량이 약 33% 줄어드는 동안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약 130% 증가했다. 벡셰시의 경우도 같은 기간 1인당 이산화탄소배출량이 약 50% 줄었지만 1인당 GDP는 90% 가까이 증가했다.

이 기간 중 스웨덴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선진국 중에서도 높은 수준으로 꼽힌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22년간 스웨덴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95%로, 주요 선진국들이 모인 OECD 연평균 경제성장률 3.76%를 상회한다.
 

스웨덴과 벡셰의 1인당 GDP 상승과 이산화탄소 배출량 변화 비교 그래프. 1인당 국내총생산(GDP), 즉 경제 규모가 커졌어도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은 줄어들었다. ⓒ 벡셰시, 박진홍

 
벡셰시는 2006년 '환경 프로그램'을 통해 생활, 연료, 교통 등 각 영역에서 달성해야 할 세부적 배출량 감축목표와 담당 부서를 명시했다. 2030년까지는 화석 연료를 축출하고,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020년까지 1993년 기준 65% 이하로 줄이기로 했다. 시는 이 목표에 차근차근 다가가고 있다.

요한손 담당관은 벡셰시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2015년 유엔에서 채택된 '2030 지속가능개발의제'에 맞는 새로운 환경 프로그램인 '지속가능한 벡셰(Sustainable Växjö)'를 내년까지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스웨덴의 경험 (하)에 계속)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만드는 비영리 대안매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벡셰 #스웨덴 #에너지 대전환 #단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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