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갈 날이 더 적은 나이... 그래도 나는 썼다

[책이 나왔습니다] 장편소설 <용서>를 펴내면서

등록 2018.10.07 17:16수정 2018.10.0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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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책이 나왔습니다'는 저자가 된 시민기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된 시민기자라면 누구나 출간 후기를 쓸 수 있습니다. [편집자말]

『용서』 표지 ⓒ 푸른사상사

  
누에가 실을 뽑듯이 쓰다

그 누구도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다. 해방둥이인 나는 이제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적게 남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 작품 첫 문장부터는 옷깃을 여미며 누에가 실을 뽑듯 온 정성을 다해 참회하는 마음으로 썼다.


이 작품을 기필하는데 문득 한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몇 해 전에 만난 그 스님은 이따금 교도소에 법문을 강론하러 간다고 했다. 막 강론을 시작할 때면 교도소 측에서 강당에 일방으로 데려온 죄수들은 당신의 법문을 처음부터 아예 듣지 않고자 돌아앉거나 딴청만 부린다고 한다. 그때 스님이 하신다는 말씀이다.
 

이 작품의 배경인 미국 버지니아주 세난도 국립공원 ⓒ 박도

  
"사실은 나도 죄인이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현실의 법망을 요리조리 메기처럼 잘도 헤집고 나왔기에 지금은 교도소 밖에 있다. 곰곰 생각해보면, 나는 여러분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지은 채 이 세상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내 스스로 그 죄를 깨닫고 부처님 앞에 속죄하고자 여러분처럼 머리를 박박 깎았다. 그리고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과 비슷한 빛깔의 먹장삼을 입고 지낸다. 또 여러분과 같은 신발을 신고 다니며, 매끼마다 거친 밥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그 말이 떨어지면 애초부터 돌아앉았던 이들이 슬그머니 정좌하거나, 딴청을 부리던 이들도 하나둘 귀담아 듣기 시작한다는 말씀이다.

"사실 나도 죄인이다. 돌이켜보면 내 젊은 날은 인생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바른 삶이 뭔지도 모른 채 무명 무지한 탐욕의 세월을 살아온 느낌이다. 온통 얼룩들이다. 성능 좋은 지우개나 세탁기로 그 얼룩들을 모조리 지우고 싶다."

하지만 그 누구나 한 번만 사는 인생으로, 그 얼룩을 쉽사리 지울 수 없다. 이제 나의 남은 인생은 그 얼룩에 대한 참회의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저자가 작품의 주인공인 장지수가 생전에 다녔던 미국 뉴저지의 한 한인교회에 찾아가서 그가 평소 앉았던 단골 자리에서 그의 명복을 빌다. ⓒ 박도

 
친구의 영전에 드리는 헌사


이 작품은 내가 교단에서 물러나 강원도 산골로 내려온 뒤 첫 번째로 쓴 장편소설이다. 원래 <제비꽃>이란 제목으로 책을 낸 바, 내 역량 부족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오류와 오자도 많았고, 작품의 얼개와 문장도 탄탄치 못했다. 그런데도 재일동포 원로시인 김두권 선생은 장문의 편지로 격려해주셨다.

"주인공이 옛 친구를 찾아 미국에까지 간 여정은 감동적이었습니다. 특히 영혼과 대화 장면은 특이한 설정으로 소설을 흥미롭게, 깊이 있게 하는데 좋은 착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형님, 명작은 그리 쉽게 탄생치 않습니다."

강 건너 여강마을 홍일선 농사꾼 시인은 여러 차례 간곡한 말로 다시 쓰기를 권했다. 그리고 내가 멘토로 삼고 있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한 작품을 수십 번 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말에 나도 용기백배해 오랫동안 이 원고를 곁에 두고 다시 깁고 가다듬어 또다시 세상에 내보낸다.

첫 작품에서는 '우정'에 방점을 찍고 썼다면, 이 작품에서는 '용서'에 방점을 두고서 썼다. 지난 내 삶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자판을 두들겼다. 나는 한 문단, 한 문장, 단어 하나 선택에도 최선을 다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말이다.
 
"독자는 저자가 피와 눈물로써 쓴 글만을 좋아한다."
 
나는 이 작품을 쓰고 가다듬는 동안, 나이에 걸맞지 않게 여러 차례 눈물을 쏟았다. 아울러 이 작품을 다시 구상하고, 취재하고, 집필하는 동안 내내 행복했다. 장지수, 그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이다.

그는 고교 시절 가난한 친구를 감싸주었던, 그야말로 목숨이 아깝지 않은 문경지우(刎頸之友)였다. 하지만 나는 이승에서 그에게 빚만 잔뜩 졌다. 그래서 이 작품은 그의 영혼 앞에 생전의 빚을 갚는 헌사다.

먼 미국 땅에서 그의 영혼을 만나, 피차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심중에 담긴 말을 여러 날 동안 밤이 이슥도록 실컷 쏟아놓았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내 마음 속의 번뇌와 갈등, 반목들이 죄다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이를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모양이다. 독자들도 이 작품을 읽고 가슴 속 깊이 쌓인 걸 한 방에 해소하는 '카타르시스'를 체험했으면 좋겠다.

조금 쉬었다가 건강에 무리가 없다면 다시 새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작가는 쓰는 시간이 가장 기쁘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나에게 구원이요, 삶의 의의다.

하지만 책이 어느 정도 팔려야 작가는 계속 글을 쓸 수 있고, 출판사에서도 책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출판계는 단군 이래 최대의 위기라고 한다. 지하철, 버스, 열차를 타도 책을 읽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열이면 예닐곱은 손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나의 팬이시여! 늙은 말이 계속 달릴 수 있도록  당근을 주시라. 이번에 펴낸 <용서>는 결코 책값이 아깝지 않게 썼고,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고 자부한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글을 쓰는 이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고향 구미 금오산을 바라보며 한국 제일의 문사가 되겠다고 정성을 다해 온, 그리하여 워싱턴 D. C. 백악관 앞에서도 미국 지도자에게 한반도의 분단을 풀어달라는 기사도 쓴 문사다(관련기사: 워싱턴 D.C. 백악관 앞에서).
 
한국의 한 작가가 미 지도자에게 정문일침을 가한다.

진정한 세계 평화와 자유를 위한다면 남의 주권도 존중해 달라. 당신 나라의 한 주보다 작은 한반도를 '결자해지' 곧 묶은 자가 풀어주듯이, 이제는 지구상의 하나뿐인 한반도의 분단을 풀어주는 게 정녕 대국다운 아량이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길이 아닐까?

지나가는 나그네가 무심코 장난 삼아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가 치명상을 입듯이, 강대국들이 자기네 맘대로 그어 놓은 삼팔선, 휴전선 때문에 우리 겨레는 그동안 얼마나 서로 반목, 시기, 갈등, 저주의 나날을 보냈던가.
  

이 작품 배경으로 나오는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 박도

 
   
책 속으로

다음은 책의 일부 내용이다.
 
사실 현은 그 워커를 몹시 신고 싶었다. 배달 초기 고무신을 신고 다니자 발뒤꿈치에 물집이 생겨나 가래톳이 부었다. 그래서 절름거리던 것을 지수가 본 모양이었다. 지수가 준 워커를 신자 조금 헐렁했지만 끈을 꽉 조이자 생각보다 훨씬 가볍고 가뿐했다.  - (82쪽)

"지난번 만났을 때 네가 고무신을 신은 채 절름거린다는 얘기를 하니까 어머니가 남대문시장 헌 구둣가게에서 구해주신 거다."

옷도, 신발도 무척 귀하던 시절이었다. 군부대 철조망 밖으로 흘러나오는 군복이나 워커는 그대로 입거나 신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군복은 검정 물을 들였고, 워커는 목을 뭉텅 잘라 신었다. 서울 아이들은 그 시절 목 자른 워커를 신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다. 신문 배달원들도 대부분 목 자른 워커를 신고 다녔다.

"니 와 이카노."
"너 가져다가 신어."

그날 오후 돌아오려는데 지수가 신발장에서 워커를 한 켤레 꺼냈다. 그 워커는 약간 낡은 것으로 목이 뭉텅 잘려 있었다.
내 머리숱에 어느새 흰 머리카락이 더 많아졌다. "청춘은 희망에 살고 노년은 추억에 산다"고 하더니, 나이가 들수록 지난날의 추억들이 더욱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그러면서 살아생전에 꼭 만나고 싶은 이들의 얼굴들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떠오른다. 고1 때 짝 장지수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잉그리드 버그만을 무척 좋아했다. 그는 쉬는 시간이나 수업 시간에 틈틈이 노트에다가 그 배우들의 캐리커처를 그리면서 시골 사람인 나에게 애써 그들의 얘기를 들려줬다.

1975년 내가 모교 교단에 서 있을 때,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그가 불쑥 엽서를 보낸 뒤 여태 더 이상 소식을 모른 채 지내고 있다. …… 그가 보고 싶다. 죽기 전에 그를 꼭 만나서 부둥켜안고 포옹하고 싶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이제 흔적도 없는 모교 옛터 수송동 골목을 거닐며 지난 추억을 얘기하고 싶다. 그는 나에게 포숙(鮑叔)과 같은 친구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 (94~95쪽)
"하지만 맹목적인 용서는 곤란합니다. 그 용서의 대전제는 가해자의 참회입니다. 가해자가 먼저 회개해야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용서는 참회한 자에 뒤따르는 화답이지요. '정의가 없는 용서' '회개하지 않은 용서' '대가 없는 용서'는 값싼 용서로 잘못이 계속 되풀이될 수도, 더 큰 재앙을 낳을 수 있습니다."
"참 '용서'란 어려운 화두로군요. 그렇다고 상대의 잘못을 용서치 않고 마음속에 쌓인 원한으로 스스로 불행해진다면 오히려 상대에게 지는 게 아닐까요?"  - (189~190쪽)
"가보지 못한 곳이 그립듯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더 아름답지요."
"글쎄요. 그건 제3자의 얘기겠지요. 당사자들의 아픔이란……. 아까 말씀 중 '사랑은 궁지에 몰린 상대를 구해주고, 실수한 상대를 용서해주며, 자기를 버리는' 거라는 말씀을 들을 때, 솔직히 찔리는 데가 많더군요. 하지만 지수 씨의 이야기를 통해서 새삼 인생을 배웠어요. '용서하라'는……. 누구나 '용서하라'는 말은 쉽게 하지만, 실천은 잘 안 되지요. 그리고 '내가 살아서 남을 용서한 것만큼 하늘나라에서 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도 감동이네요." - (314쪽)
 

이 작품 배경으로 워싱턴 D. C. 내셔널 몰에 있는 한국전쟁 전몰자 위령비의 부조상. ⓒ 박도

 
덧붙이는 글 장편소설 <용서> 발간 기념 귀향 북 콘서트
일시 : 2018년 10월 20일 오후 3시
장소 : 구미시 금오시장로 삼일문고 (054-453-0031)

용서

박도 지음,
푸른사상, 2018


#장편소설 『용서』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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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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