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다, 자소서야" 나는 언제쯤 버릴 수 있을까

[비혼일기] 잃고 싶지 않은 것을 잃고 얻은 것들

등록 2018.09.29 20:19수정 2018.09.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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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비혼, 돌아온 비혼, 자발적 비혼 등 비혼들이 많아진 요즘, 그동안 '비혼'이라는 이유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조금 더 또렷하고 친절하게 비혼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낸 40대 비혼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취업사이트 광고 화면 캡처

  
"수고했다, 자소서야."
"잘 가라, 면접아."


어느 취업사이트 광고 문구다. 내게 소박한 소망 하나가 있다면 더이상 이력서와 자소서를 쓰지 않는 삶이다. 사십대 후반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구직 활동을 했고 프리랜서 활동을 하면서도 기관마다 이력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서 내 노트북엔 이력서 폴더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력서를 쓸 때마다 생각한다.


'이게 나의 마지막 이력서이길... 플리즈.'

하지만 현실은 늘 바람을 배신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력서가 있다. 잡지사에서 나름 팀장으로 일하다가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고 1년간 쉬었다가 다시 구직 활동을 할 때였다. 금세 취직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순진한 낙관이었다. 그때가 39살이었으니 나이 제한으로 걸리는 곳도 많았고, 이력서를 수십 개 썼지만 연락 오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력서

백수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꽤 당황했다. 통장의 잔고가 이미 바닥을 드러난 상황이었다. 나도 초조해 죽겠는데 걱정하는 엄마의 얼굴까지 보는 것은 괴로울 정도로 죄송하고 민망했다.


더 이상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는 아니라는 생각에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고깃집 불판 닦는 아르바이트에서부터 패스트푸드점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그마저도 연락이 오지 않았고, 몇 주 뒤에 겨우 연결된 곳이 작은 프랜차이즈 도너츠 가게였다.

사장님이 이력서를 갖고 오라고 하셨는데, 내 경력을 있는 그대로 쓸 수가 없어서 그냥 다 지워버렸다. 결혼 안 했냐에서부터 왜 경력직으로 취직 안 하고 여기서 일하려고 하냐 등등 쓸 데 없는 질문을 받는 게 싫어서였던 것 같다. 매장으로 가서 사장님 면접을 볼 때였다. 과거를 다 지운 내 이력서가 이상했던지 사장님께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그런데 전에 무슨 일 하셨어요? 이런 일 하게 안 생겼는데..."

착하지도 않은 주제에 거짓말은 잘 못해서 얼굴이 빨개진 채로 우물거리다 "이런 일 하게 생긴 얼굴이 따로 있나요?"라고 얼버무렸다. 순간, 면접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장님은 나를 잘 봐주셨고, 덕분에 난 경험 없고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매니저로 취업했다. 일하게 되었으니 기뻐야 하는데, 첫 출근을 하던 날, 내 마음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신세한탄과 푸념들이 내 속에서 용암처럼 흘러나왔다.

'잡지사 편집장까지 했던 내가 왜 취직도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을까.'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은 곳에 와버린 것 같은 서러움이 차올랐다. '내가 왕년에~' 하는 생각도 후졌거니와 내가 했던 일과 프랜차이즈 아르바이트 일을 급으로 나누는 생각도 교만하고 어이없는 우월의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그때는 쓸데없는 자존심에 스스로를 괴롭히고 자책하면서 얼마간을 보냈다.

폭풍 같은 감정이 잦아들자 이성이 돌아왔다. 냉철하게 생각해 보니 나한테 나쁜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고, 39살 나이에 이런 일을 할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별 일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일 뿐, 나도 하루아침에 내가 서 있었던 곳에서 굴러 떨어져서 낯선 곳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졌다.

한편으론 '언젠가 이 상황이 끝날 것이고 그 뒤에는 꽃길이 나타날 거야'라는 근거 없는 희망고문 따위도 끊어내자 했다. 그저 이 일이, 그리고 이렇게 변한 내 일상이 영원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오늘'이라는 하루가 꽃길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결심했다.

일찍 결혼했으면 딸 뻘인 아르바이트생들의 무시와 갈굼을 당할 땐 천불이 나기도 했지만, 다행히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주었다. 적응이 되자 놀랍게도 '이게 내 적성인가' 싶을 정도로 일이 재밌었다.

사장님도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정도 나와서 정산만 10분 정도 하실 뿐, 일체 매장 일에 간섭하지 않으셨고, 회사가 많은 곳에 있는 매장이어서 손님들도 점잖았다. 또 알바생과 나 딱 두 명만 근무하는 아담한 규모였기 때문에 일이 많지도 않았다.

시간이 쫓기지도 않고, 머리 쓸 일도 없고, 좋아하는 커피 향도 하루 종일 맡고.. 정해진 시간만큼 육체 노동만 하면 되니까 오히려 삶이 단순하고 가벼워졌다. 쓸데없는 자존심, 내 스스로 매겨놓은 삶의 등급, 내가 원했던 꽃길을 잃고 나서 얻은 평화였다.

꽃길을 잃고 나서 얻은 평화

그렇게 10개월 정도 지났을까. 다른 일이 하게 되면서 그곳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나중에서야 그때의 시간과 경험이 해석되었다. 남들이 볼 때 '쟤는 왜 저리 안 풀릴까?' '나는 쟤처럼 되면 안 될 텐데'하는 그런 삶이 나에게도 올 수 있다는 것. 삶은 때로 내 노력과 최선, 성실을 배반하기도 하고, 그래서 인생 앞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체득했다.

다른 사람의 노동과 삶을 내 노동과 삶만큼 존중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돌고 돌아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또 다시 비슷한 결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그동안 나는 노력하면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었고, 팔팔하던 젊음을 잃었다.

"내가 만일 내 인생의 전환기를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얻은 바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잃은 그 무엇 때문이다." - 까뮈

어디 잃은 것이 자신감, 기대, 젊음뿐이랴. 정말 잃고 싶지 않아 하던 것들을 결국 수없이 잃었지만 감사하게도 난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잘 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상실은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진화하는 쪽으로 나를 이끌었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줬기 때문에. 내가 실망해 주저앉지 않는 한 언제나.
#비혼일기 #중년 취업 #중년 알바 #이력서 그만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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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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