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러 갔는데 적을 몰라? 참으로 성의 없는 군인

[서평] 러시아 정벌에 나선 장군 신류의 일기 '북정록'

등록 2018.09.23 11:34수정 2018.09.2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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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나선 정벌'이란 유명한 사건이 있었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나온다. 효종 임금 때인 1654년과 1658년, 청나라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여 조선군이 '러시아 정벌'에 참여한 사건이다. 두만강 북쪽의 송화강(쑹화강)과 흑룡강(헤이룽강) 일대에서 벌어진 두 차례 전투를 계기로, 조선 포수 부대의 실력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658년의 제2차 원정 때 약 250명을 이끈 장군이 정3품 북도병마우후 신류(申瀏)다. 광해군 때인 1619년 경상도 인동부(지금의 구미시)에서 태어나고, 인조 때인 1645년 26세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뒤 종2품 포도대장으로 퇴직했으며, 숙종 때인 1680년 6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제2차 원정 당시의 관직인 북도병마우후는 요즘 말로 바꾸면 함경도 부사령관 정도다.


신류는 이순신 장군과 닮은 데가 있었다. 멀리 원정 가는 그 와중에도 일기를 썼다. 원정 기간이 짧아 <난중일기>처럼 두껍지는 않지만, 약 4개월간의 일들을 차분하고 간명하게 써내려갔다. 그날그날의 날씨, 이동 경로, 각종 사건사고 등을 짤막하게 메모했다. 제2차 나선 정벌의 실상을 알려주는 이 일기는 <북정록>이란 제목으로 엮어졌다.

이순신에게 <난중일기>가 있다면, 신류에겐 <북정록> 
 

<북정록>. ⓒ 서해문집



<북정록>에 대한 최초의 번역서는 1980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박태근의 <국역 북정일기>이다. 이에 뒤이어 38년 만에 새롭게 나온 또 다른 번역서가 지난주 15일 발행됐다. 서해문집이 펴낸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의 <북정록>이다. 근 40년 만에 <북정록> 번역서가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책에서 계승범 교수는 '나선 정벌' 대신 '흑룡강 원정'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안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악행을 징치한다는 뉘앙스가 담긴 정벌이란 용어가 부적합하다는 이유다. 원정(遠征)에도 정벌(征伐)의 '征'이 들어 있지만, 정벌처럼 선악의 뉘앙스를 명확히 풍기지 않기 때문에 흑룡강 원정이란 용어를 선택한 듯하다.

<북정록>은 일기이지만, 이동 중에 작성한 것이라 기행문의 성격도 띠고 있다. 신류는 군영에서 벌어지는 일뿐 아니라, 지나가는 지역의 종족이나 풍습도 기록했다. 17세기 중반 두만강 북쪽 지역의 문화와 풍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기록을 남겨둔 것이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1개월 반 정도 지난 음력 효종 9년 5월 20일(양력 1658년 6월 20일)이었다. 부대는 송화강 유역에 체류 중이었다. 날씨는 맑았다. 이날 일기에서 신류는 '왈가 오랑캐'라는 종족에 관해 썼다. 달력도 없는 특이한 종족이라 관심이 갔던 모양이다.
 
"자기 나이도 모르고, 날짜가 몇 해, 몇 달, 며칠인지도 모르다. 성질은 매우 포악해 조금만 불만이 있어도 활을 당겨 쏴버린다. 심지어 부모형제에게도 손찌검과 칼질을 해대는 자들로서 거침이 없으므로 청나라 장수도 두려워 대비한다고 한다."

날씨가 맑았던 음력 7월 27일(양력 8월 25일) 일기에는 소인국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퍅가부락이란 종족에 관해 쓰다가 나온 이야기다.
 
"퍅가부락은 바로 견(犬)부락과 닿아 있는 오랑캐 마을로, 소인국(小人國)과 접경한 지역이다."
 
소인국 이야기는 옛날 문헌에 종종 나온다. 일례로,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1602년 베이징에서 제작한 <곤여만국전도>라는 지도에도 왜인국 즉 소인국이 등장한다. 지도에는 "이 나라 사람들은 키가 한 자 정도에 불과하며, 5세에 자식을 낳고 8세에 늙는다"라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해설이 붙어 있다.

남유럽 사람인 마테오 리치가 말한 왜인국은 북유럽에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남유럽과 북유럽의 교류가 적고 상호 이해도가 낮았기 때문에 저런 황당한 기록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북정록>에 소인국이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두만강에서 북쪽으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소인국이 있다고 믿었다는 것은 그 지역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적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신류가 두만강 북쪽을 다녀와 <북정록>을 남겼으니, 당시에는 꽤 신선한 기록이었을 것이다.

적이 누군지도 모른 채 싸우러 나간 군인
 

흑룡강과 송화강. ⓒ 위키백과



그런데 신류는 군인이다. 세계적 강국인 청나라의 요청을 받아 조선군을 이끌고 가는 원정 장군이었다. 또 예민한 사람이었다. 지나가는 마을의 풍습과 문화를 세밀히 관찰하고 부하들의 건강 상태를 꼼꼼히 체크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몇 군데 있다.

신유는 자기가 이끄는 조선군이 청나라를 도우러 가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당연하다. 그렇다면 조선군이 맞서 싸우게 될 적이 누군지도 알고 있었어야 한다. 이 역시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그는 몰랐다. 조선군과 청나라군이 연합해 누구랑 싸워야 하는지를 몰랐다. 그런 상태로 국경을 벗어나 진군한 뒤 러시아군과 교전했다. 함경도 부사령관 정도의 지위를 가진 장군이 누구랑 싸우는 줄도 모르고 원정군을 이끌었던 것이다. 아래 내용은 러시아군과 교전을 치룬 뒤에 작성한 음력 6월 12일자(양력 7월 12일자) 일기다. 보슬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게 분 날이다.
 
"적병의 얼굴 생김새와 머리카락은 남만인과 아주 닮았는데, 얼굴 생김새는 남만인보다 모질고 사나웠다. 남만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남만과 가까운 이웃의 오랑캐일 터다."
 
조선시대에 남만은 주로 동남아를 뜻했다. 신류는 적군의 외모가 남만인과 비슷한 점을 근거로 이들이 남만 근처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했다. 저 멀리 서북쪽 러시아를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신류는 적국의 국명도 몰랐다. 그래서 청나라 사람들에게 물어보곤 했다. 지휘관이 이랬으니 부하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신류는 매우 꼼꼼했다. 자상한 면도 있었다. 그렇게 세밀한 사람이 적군의 정체도 모른 채 먼 이국땅으로 행군을 했다. 러시아의 위치도 모르고 국명도 모른 채 원정에 참가했다. 한국사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 이렇게 성의 없이 싸웠던 것이다.

나선정벌에서 신류와 조선군은 러시아군 격파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 제1차 원정 때도 조선군의 기여가 있었기에 청나라가 러시아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조선군은 이렇게 몸으로는 열심히 싸우면서도 마음으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기본 정보조차 확인하지 않고 전투에 참가했던 것이다.
 

<북정록>. ⓒ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신류와 조선군이 그렇게 한 것은 그 전투가 남의 전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국익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몸으로는 열심히 하면서도 마음은 딴 데 두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남의 전쟁이라고 해서 항상 그러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 패전 뒤, 조선에서는 청나라에 대한 증오심이 확산됐다. 대외적으로는 청나라를 받들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청나라를 혐오했다. 일반 백성부터 임금까지 대체로 그랬다.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마지못해 파병 요구에 응하면서도 기본 정보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성의 없이 출병을 개시했을 것이다.

신류의 태도는 외국 군사력에 의존하는 것의 한계도 보여준다. 신류의 경우에는 좀 심하긴 했지만, 그의 사례는 외국 군대를 과도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충분하고도 충분하다.

만약 이 전쟁의 주체가 조선이었다면, 신류는 몸으로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열심히 싸웠을 것이다. 적군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열심히 얻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의 전쟁이었다. 이겨봤자 득 될 게 없는 전쟁이었다. 그래서 무성의하게 전투에 임했을 것이다.

신류와 조선군이 몸으로 열심히 싸운 것도 사실은 청나라를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조선에 모욕을 준 청나라를 위해서 마음은 물론이고 몸으로도 열심히 싸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북정록>은 17세기 중반의 두만강 북쪽 지역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당시 조선인들의 처지와 정서도 함께 알려준다. 그래서 이 시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에 참고가 될 만한 문헌이다.

북정록 - 조선군 사령관 신류의 흑룡강원정 참전기

신류 지음, 계승범 옮김,
서해문집, 2018


#북정록 #신류 #나선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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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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