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예술가가 겪어야 하는 숙명

[여름철 시베리아 그리고 바이칼 17] 레리히, 마야코프스키, 글린카

등록 2018.09.22 17:23수정 2018.09.22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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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리히박물관(Музей Н. К. Рериха)의 겉만 보다니 
 

레리히 박물관 ⓒ 이상기

  
마야코프스키 영화관으로 가기 전 우리는 레리히박물관을 찾아간다. 그것은 이 박물관이 예술가, 작가, 철학자, 여행가로 활동한 레리히 일가의 삶과 문학 그리고 예술작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박물관은 레리히 일가의 창조적인 유산을 연구한 스피리나(N. D. Spirina) 시베리아 레리히 연구재단 대표에 의해 2007년 세워졌다. 전시실에는 레리히의 예술작품, 철학과 과학에 대한 연구성과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자식들이 작성한 지도와 사진 등도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박물관에 도착하니 잘 꾸며진 정원이 우릴 맞이한다. 현관에는 '평화의 종(Колокол Мира)'이 걸려 있다. 세계평화를 추구했던 레리히의 뜻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출입구가 건물 반대편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동쪽 입구로 돌아간다. 박물관 정면 벽에는 러시아의 자연풍경을 모자이크식으로 표현한 그림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박물관 앞 남쪽에 소성당이 하나 위치한다.
 

소성당 ⓒ 이상기

  
소성당은 노보시비르스크 시내 한 가운데 있는 성 니콜라이 소성당과 비슷한 느낌이다. 이곳은 문이 닫혀 있다. 그런데 성당 벽에 그려진 그림이 레리히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우리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려 가운데 입구로 간다. 그런데 박물관 문이 닫혀 있다. 다행히 나오는 사람이 있어 입장을 부탁했으나 불가하단다. 레리히박물관은 화요일이 휴관이란다. 그걸 알았더라면 다른 날 들렀을 텐데 안타깝다. 박물관은 일반적으로 월요일에 휴관하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레리히(1874~1947)는 7000점의 그림, 30권의 문학작품을 남긴 예술가, 작가, 학자로, 문화탐구와 교류를 통해 세계평화를 추구한 행동주의자로 유명하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에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핀란드로 망명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스칸디나비아지역을 중심으로 예술과 문화활동을 벌였다.

1919년에는 영국 런던으로 이주해 러시아 예술을 소개하는 일에 앞장섰다. 1920년부터 3년 동안 그는 미국 30개 도시를 순회하며 그의 작품을 전시해 대단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 동안 그는 러시아 예술과 미학, 윤리와 도덕을 미국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평화의 종 ⓒ 이상기

  
1920년대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되었고, 1923년 파리를 거쳐 인도로 간다. 그것은 그의 아시아에 대한 관심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타고르와 친분 때문이다. 그는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인도에서 카시미르, 히말라야, 신장, 티베트, 몽골, 알타이와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연구와 교육 그리고 예술활동을 진행한다. 이를 통해 그는 공산주의와 불교를 결합(Fusion)시키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934년 레리히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공식화한다. "볼셰비즘은 어둡고 파괴적인 힘"이라고 말했다. 1935년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문화예술에 대한 파괴적 행동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그는 1934년부터 1935년까지 탐사를 목적으로 일본과 한반도를 지나 만주와 몽골로 들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를 위한 출발지는 하얼빈이고, 대흥안령산맥과 고비사막, 오르도스사막에 대한 인문학적 생물학적 연구와 스케치 등을 했다고 한다. 그러한 업적 때문에 1935년 노벨평화상의 유력한 후보가 되기도 했다.
 

한반도를 지나간 레리히의 흔적 ⓒ 이상기

  
레리히는 기본적으로 미(beauty)와 지식(knowledge)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상주의자였다. 미와 지식을 토대로 문화가 생겨나고, 미의 구현을 통해 세상이 구원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예술적인 이미지로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종교 예술 과학 교육 등 인간이 정신적인 영역에서 이룬 최고의 성취가 종합된 것이 문화라고 생각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인도에 살면서 러시아 서사문학과 종교 관련 그림을 그리며 만년을 보낸다. 인도의 정치지도자 네루(Jawaharlal Nehru)와 가까이 지냈고, 인도와 러시아의 문화연대와 협력이 새로운 시대의 숙명이라고 역설했다. 1942년 미국과 러시아 문화연대가 결성되었는데, 그곳에도 참여했다. 미국측 대표로는 헤밍웨이, 채플린 등이 있다.
 

레리히 작품 ⓒ 이상기

  
1947년 인도에서 세상을 떠난 레리히의 작품은 뉴욕, 모스크바, 노보시비르스크 박물관에 보존 전시되고 있다. 인도, 불가리아, 세르비아, 라트비아 박물관과 미술관에도 그의 작품이 있다.

2000년대 들어 러시아, 미국, 독일에서 그의 전기가 나오고, 그의 활동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티베트와 만주지역에 대한 연구결과가 주목받고 있다. 그가 이룬 업적의 일단이라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영화관 이름이 왜 마야코프스키인가? 
 

마야코프스키 영화관 ⓒ 이상기

  
노보시비르스크 마야코프스키 영화관은 러시아 작가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Vladimir Mayakovsky: 1893-1930)의 이름만 땄을 뿐 그와 직접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야코프스키가 시인, 극작가, 배우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영화관을 방문했을 때는 영화상연이 없고, 내부수리를 위해 8월 8일까지 문을 닫는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영화관이 낡아 관객들이 시설, 공간, 좌석 등을 불편하게 느낀 모양이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건물 앞에 즐비하게 세워진 마야코프스키 탄생 125주년을 기념하는 광고물들을 살펴본다. 온통 러시아어라 이해가 쉽지는 않지만 그림과 사진을 통해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야코프스키가 태어난 연도와 노보시비르스크라는 도시가 생겨난 연도가 같다는 사실이다. 그런 연유로 이 영화관의 이름에 마야코프스키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야코프스키 ⓒ 이상기

  
영화관 앞 광장에는 러시아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의 포스터와 상연연도가 표기된 정육면체 상자들이 널려 있다. 1901, 1920, 1938, 1964, 1991, 2009년이 눈에 띈다. 러시아에서 영화가 최초로 상연된 것은 18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다. 러시아 최초의 영화는 1908년 드란코프(Alexander Drankov)가 만든 <톨스토이(Leo Tolstoy)>다. 1918년에는 소비에트시대 최초의 영화 <아버지 세르기우스(Father Sergius)>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비에트시대 만들어진 러시아 영화로는 에이젠슈테인(Sergei Eisenstein) 감독의 <전함 포템킨>(1925)이 가장 유명하다. 1905년 오뎃사 항구에서 포템킨호의 수병과 시민들이 일으킨 반란을 혁신적인 기법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구시대 체제에 대한 민중의 항거라는 혁명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러시아 영화사 포스터 ⓒ 이상기

  
1930년에는 스탈린 독재체제가 시작되면서 예술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정책적으로 추구되었다. 그 때문에 예술성보다는 역사, 혁명 이데올로기 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에서도 칼라영화가 만들어졌고, 1950년대 후반부터 검열과 같은 제한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 때문에 1957년에 만들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과 사랑을 다룬 <학은 날아간다(Летят журавли)>(1957)가 1958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60/70년대 서방에서도 알아주는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 같은 영화감독이 나오게 되었다. 그는 역사, 심리, 공상과학 분야에서 소재를 택해 그만의 방식으로 형이상학적 주제를 보여주었다. 대표작이 <안드레이 류블로프(Andrei Rublev)>(1966), <북극성(Solaris)>(1972), <거울(Mirror)>(1975), <스토커(Stalker)>(1979)다. 그는 1980년대 들어 <노스탈지아(Nostalghia)>(1983)와 <희생(The Sacrifice)>(1986)으로 더 유명해졌다.

그리고 1990년대 뉴 러시안 시네마 시대가 시작된다. 이때 영화를 포스트 소비에트 영화라 부르며,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 로맨틱 코미디와 풍자적인 멜로드라마의 출현, 상업성의 추구라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제 러시아 영화는 역사, 전기, 코미디, 판타지, 사이언스 픽션, 공포, 애니메이션까지 다양한 장르가 시도되고 있다.

메이데이 공원 돌아보기 
 

메이데이 공원의 분수 ⓒ 이상기

  
박물관과 영화관을 제대로 보지 못해 시간이 남는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메이데이공원을 찾아 시간을 보낸다. 메이데이는 5월 1일 노동절을 말하는 것이니, 시민들을 위한 공원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 공원의 공식명칭은 페르바마이스키 광장(Pervomayskiy Skver)이다. 공원 안에는 아이들과 함께 한 부모들이 상당히 많다. 러시아에서 공원은 아이들의 놀이터로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공원에는 분수도 있고 예술작품도 있다. 분수에서는 아이들이 물장난을 하며 논다. 이곳에 설치된 예술작품의 수준이 높지는 않지만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다. 메이데이 공원은 조성된지가 오래 되어 나무들이 울창한 편이다. 자료를 보니 이곳이 처음에는 시장광장이었으나 1935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쉬어간다.
 

공원의 아이들 ⓒ 이상기

  
서쪽 소베츠카야 거리 쪽으로는 글린카 음악원(Konservatoriya Im. M.i. Glinki)이 있다. 그 때문에 정문 앞에는 미하일 글린카(1804-1857) 동상이 있다. 글린카는 러시아 국민악파 최초의 음악가로 여겨진다. 러시아 최초의 오페라 <이반 수사닌>(1836)을 작곡했고,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1842)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크게 인기를 얻지 못하고 스페인(9년), 파리(2년)를 거쳐 베를린(5개월)에서 활동하다 죽었다.
#레리히 박물관 #마야코프스키 영화관 #러시아 영화사 #메이데이 공원 #글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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