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책', 이게 경쟁력

[1인 출판 생존기] 영상번역가, 출판의 재미에 빠지다

등록 2018.09.29 15:17수정 2018.09.2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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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출판, 시작은 전자책

2000년대 초에 영상번역업계에 발을 들이고 10년 넘게 번역가로 살던 나는, 2015년에 덜컥 1인 출판사 '더라인북스'를 차렸다. 번역이 '제2의 창작'이라고 하지만 외국어 원문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들다. 거기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번역가라 업체에서 일을 주면 바쁘게 움직이고, 일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밥줄이 끊긴다.


주어지는 일만 수동적으로 해야 하는 상황이 한없이 갑갑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졌다. 그래서 콘텐츠를 만드는 출판에 자꾸 마음이 끌렸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기획해보고 싶었다.

출판사를 차리는 건 어렵지 않다. 구청에 가서 출판 등록만 하면 된다. 간단하다. 하지만 책을 실제로 내는 일은 다른 얘기다. 등록만 하고 책을 내지 않는 출판사도 많다. 열망만으로 새로운 분야에서 금방 자리를 잡길 바랄 수는 없는 일. 첫 1년은 전자책을 제작하며 감을 잡아가기로 했다. 제작비가 몇 십만 원밖에 들지 않으므로 부담이 덜했다.

우선은 '글 쓰는 번역가'를 발굴하는 데 몰두했다. 번역가들 중에도 글쓰기 능력은 기본이요, 특유의 상상력과 창의력 등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품은 이들이 많다. 그 능력을 펼칠 기회를 만나지 못할 뿐이다.

그런 이들에게 처음부터 종이책을 쓰라고 하면 엄두조차 못 낸다. 종이책은 A4 기준으로 150페이지 이상을 써야 한다면, 전자책은 그 절반 분량, 심지어 4분의 1 분량만 써도 출간할 수 있다. 가격을 무료부터 1만 원 이상까지 자유롭게 책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1년간 더라인북스에서 펴낸 전자책은 스무 종이 넘는데, 거의 다 번역가들이 기획하고 쓴 책이다. 전자책이 쌓이자 판매금이 누적되면서 매달 수입이 발생한다. 전자책을 한 권만 내고 만다면 별다른 성과가 없지만, 지속해서 콘텐츠를 생산하면 저자 브랜드도 생기고 새로운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다.


영상번역은 저작권료가 따로 없어서 번역 파일을 업체에 넘기면 거기서 끝이다. 부가가치라는 게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책은 한번 써내면 계속 부가가치를 창출해낸다(물론, 그 수명은 책마다 다르지만).

콘텐츠 만드는 재미를 맛보고 나니, 종이책도 내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하지만 종이책 제작은 전자책보다 훨씬 많은 자금이 필요하므로 섣불리 도전할 수 없었다. 출판계 관계자들을 몇몇 알고는 있지만 무턱대고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찾은 게 또 책이다. 어느 분야든 가장 만나기 쉬운 선배는 책 아닌가! 먼저 출판 관련 책들을 하나씩 찾아 읽어나갔다. 그중에서 내가 방향을 잡고 나아갈 수 있게 도와준 책 두 권이 있다.

출판의 방향을 잡아 준 <편집자로 산다는 것>
 

<편집자로 산다는 것>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종이책을 펴내려면 편집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 고른 책이다.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강주헌 출판번역가, 이홍 리더스북 대표, 변정수 출판컨설턴트, 정민영 아트북스 대표, 이렇게 출판계에 몸담고 있는 6인이 각자 경험을 바탕으로 편집론을 이야기한다.
 
"관리형 품목은 그 출판사가 손해볼 걸 뻔히 알면서 반드시 내야 되는 책이죠. 출판사의 철학과 부합하는 책, 존재 이유가 있는 책, 혹은 그 책을 냄으로써 이후에 관련된 시리즈로써 다른 책을 붙여 놓을 수 있는 책, 의미 부여를 해주는 책, 이런 책은 반드시 내야 되잖아요."
(65쪽)
 
바로 이 문장에 꽂혀 종이책 제작에 도전해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동안 나는 영어 번역을 주로 했지만, 사실 중문학을 전공했다. 영어 번역 관련서는 많지만 중국어 번역 관련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손해볼 걸 알면서 반드시 내야 하는 책, 출판사의 철학과 부합하는 책, 존재 이유가 있는 책' 이 세 가지 조건에 딱 부합하는 책을 첫 번째로 기획했다.

2016년 당시는 중국과 한국이 공동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이 급격하게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시나리오 번역' 수요도 급증했다. 출판번역과 영상번역과는 또 다른 새로운 분야라 그렇다 할 번역 매뉴얼이 없었다.

그래서 '중국어 시나리오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번역가에게 중국어 시나리오 번역을 중심으로 중국어 번역가의 삶을 보여주는 책을 쓰자고 제안했다. '중국어 번역'만 해도 독자 범위가 좁은데 '중국어 시나리오 번역'이라니, 독자층은 더욱 좁아졌다.

소수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책이라 생각했다. 판매 수입보다는 '존재 가치'에 의미를 두고 손익분기점도 계산하지 않고 일단 내기로 했다. 그러던 중 사드 문제로 중국과의 관계가 냉랭해지면서 시나리오 번역 시장은 직격탄을 맞았다. 출간 계획을 철회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중국과의 문화 교류가 완전히 단절될 리는 없으니 꼭 필요한 책을 내자며 작가와 함께 끝까지 힘을 냈다.

그렇게 나온 책이 <중국어 번역가로 산다는 것: 설레는 중국어 시나리오 번역>이다. 다행히 중국어 번역가의 삶을 궁금해하던 독자들이 반응을 해줬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하고싶은 일을 하며 자기만의 길을 개척한 저자의 이야기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중국어 번역가로 산다는 것 ⓒ 함혜숙

  
이 책은 출간된 지 6개월 만에 1쇄로 찍은 2천 부가 다 팔리면서 2쇄를 찍었다. 출판계 불황이 갈수록 악화되는 가운데 1인 출판사로서 아주 큰 성적을 거뒀다고 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만나던 독자들을 책을 통해 만난 경험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덕분에 두 번째 책을 낼 용기가 생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출판을 지속할 수 있을지 계속 의문이 들었다.

1인 출판을 지속할 힘을 준 <일본 1인 출판사가 일하는 방식>
 

일본 1인 출판사가 일하는 방식 ⓒ 유유

  
출판을 지속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일본 1인 출판사가 일하는 방식>에서 힌트를 얻었다. 일본에서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묶은 책이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도 혼자 출판사를 운영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 않다.

그러나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방식대로 즐겁고 유쾌하게 오래 일을 지속하는 방법을 찾아간다. '일도 육아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느긋하게', '1인 출판사는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는 수단이 될까?', '출판과 지속은 동의어' 등 목차만 봐도 긍정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이들이 현실 감각 없이 장밋빛 미래만 기대하는 건 아니다.

'미시마샤' 출판사 대표인 미시마 구니히로는 "본질적으로 재미있는 일을 한다거나 출판만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마치 곡예 같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1인 출판을 하는 이유가 뭘까.

1인 출판의 본질은 주체적으로 자기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진 요즘,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매력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하고싶은 일을 지속할 수 있다. "시대와 주변의 변화에 눈길을 주면서도 쉽게 추종하지 않고(61쪽)", 자신의 역량 안에서 하고싶은 일을 하면 된다.

<일본 1인 출판사가 일하는 방식>의 미덕은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지만,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는다.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용기가 생겼다. 나도 어쩌면 출판을 '즐겁게'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내가 번역가라서 낼 수 있는 책, 저자와 즐겁게 작업할 수 있는 책을 만들어보자 싶었다.

그렇게 <중국어 번역가로 산다는 것>을 시작으로 <영상번역가로 산다는 것: 프리랜서에서 1인 기업가로>와 <중국어 번역을 위한 공부법>까지 1년 동안 단행본 3권을 냈다.
 

영상번역가로 산다는 것: 프리랜서에서 1인 기업가로 ⓒ 함혜숙

  
세 책 모두 번역가를 꿈꾸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독자들에게 가 닿았다. 내가 1인 출판을 시작하며 책에서 길을 찾았듯이, 내가 만드는 책이 누군가에게 길을 보여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앞으로도 '나만의 방식'으로 출판을 지속할 생각이다. 불특정 다수와 연결되려고 애쓰기보다는 특정 소수와 연결되고 소통하길 희망하면서.
 

중국어 번역을 위한 공부법: 번역가 3인3색, 100일 번역마늘 프로젝트 ⓒ 함혜숙

 

편집자로 산다는 것

김학원.정은숙.강주헌 외 지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2


#1인출판사 #중국어번역가로산다는것 #영상번역가로산다는것 #중국어번역을위한공부법 #더라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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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며 글 쓰며 세상과 소통하는 영상번역가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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