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조차 없는 대방동 '여성 인권유린' 현장

[동작 민주올레③]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대방길⑤⑥

등록 2018.09.23 18:33수정 2019.03.14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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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 기자말

「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3회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 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자랑스러움과 아픔의 역사가 한 자리에 서려 있는 유한양행 앞을 떠나 이제 대방역 건너편으로 가야 한다. 노량진에서 영등포로 향하는 대로를 따라 가다가 횡단보도를 하나 건넌 후 대방역까지 마저 가면 우리의 새로운 목적지 미군기지 '캠프 그레이' 터가 기다리고 있다.

⑤ '캠프 그레이' 미군기지터 <대방동 수용소>
 

'스페이스 살림' 조감도 미군기지 '캠프 그레이'가 있던 자리(대방역 맞은편)는 서울시의 '스페이스 살림'이 들어서기 위한 공사가 한 참 진행 중이다. ⓒ 서울시

 
막상 도착해보면 미군기지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한때 동작구민들의 텃밭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이곳은 '여성‧가족의 메카'를 지향하는 '스페이스 살림'이 들어서기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바로 그 공사 현장이 2007년까지 미군기지 '캠프 그레이'가 있던 곳이다.

1952년 이곳에 처음 들어선 '캠프 그레이'는 표면상 물류기지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미군 '502 군사정보단'의 비밀스러운 첩보활동 공간이었다. '502 군사정보단'에서 일한 마이클 리가 쓴 < CIA요원 마이클 리 >(조갑제닷컴, 2015)에 따르면, 해당 부대는 "A(알파), B(브라보), C(찰리), 3개 중대로 편성"돼 있었는데, 마이클 리가 속해 있던 "알파중대는 한미 합동으로 북한 귀순병, 귀순민간인, 자수간첩, 체포간첩, 송환어부들을 상대로 심문 작업을 했"고, "브라보중대는 미군 단독으로 방첩활동을 했으며, 찰리 중대는 미군 단독으로 대북공작 활동을 주 임무로 했"다고 한다.

당시 미군은 <한미양해각서 미8군 G2 정보훈령 I-65>에 따라 대공 수사, 대공 정보활동을 주도적으로 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활동에 따른 비용도 미국 정부가 지출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미군이 주도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돼 있었는데, 이 같은 상황은 1974년 미국이 한국 정부에 권한을 이양할 때까지 계속됐던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 리의 증언에 따르면 '502 군사정보단'은 김일성 밀사 황태성 사건, 실미도 사건 등 크고 작은 대공 사건에 개입했다고 한다. 황태성은 '박정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로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친구이기도 했다. 5.16 쿠데타 직후 김일성의 밀사로 내려와 흑석동에 거처를 만들고 박정희와 접촉을 시도하던 중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그런데 미국에 즉시 알리지 않아 한미간에 갈등요인으로 작용하는데, 중앙정보부가 신변 인도를 거부하면서 결국 시내 반도호텔로 출장 가서 조사했다고 한다. '실미도 사건'은 실미도 부대원들이 마침 대방동까지 진출한 관계로 이를 직접 파악한 마이클 리가 곧바로 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월남자와 귀순자 그리고 간첩의 숙소 <대방동 수용소>

한편,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누르기 위해 기획된 김만철씨 일가 귀순사건(1987)의 김만철 가족과 대한항공 폭파사건(1987)의 김현희도 <대방동 수용소>를 거쳐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모아 진행된 '2.7 범국민추도회' 다음날인 1987년 2월 8일 늦은 밤에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김만철씨 일가를 태운 차량이 취재 기자들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도착한 곳도, 다음날 시내 관광을 위해 출발한 곳도 바로 이곳 <대방동 수용소>였다.
  

김만철씨 일가 '귀순'을 알리는 언론보도(동아일보, 1987. 2. 9)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고 싶다던 김만철씨 일가 11명은 당국의 설득이 주효해 1987년 2월 8일 김포공항으로 입국하여 기자회견을 한 후 <대방동 수용소>로 이동하였다. 이들의 '귀순' 소식은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국민적 항의와 관련된 기사를 덮어버렸다. 신문 왼편 구석에 몰린 "추도회관련 40명선 구속방침"이라는 기사가 보인다. ⓒ 동아일보

 
1955년 귀순한 유기향씨 일가족 8명도 대방동에 있던 '월남자 및 귀순자 수용소'에 수용됐다는 증언(<귀순가족 인정받고 싶어오>, 동아일보, 1994. 5. 9)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방동 수용소> 역시 (언제까지인지 알 수 없으나) 미군 '502 군사정보단'이 개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적 국제질서가 새롭게 형성되는 국면에서 자주적인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힘 있게 밀고 나갈 주체역량 형성에 실패한 우리는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아픈 현대사를 감내해야 했다. 그 부산물의 하나가 주한미군과 미군기지라고 할 수 있는데, '캠프 그레이'는 단순한 미군기지를 넘어 미군의 비밀 첩보활동 공간이었던 셈이다.

'캠프 그레이'는 2002년 11월 '살인미군 한국법정 처벌을 요구하는 대한민국 대학생들' 30여 명의 화염병(40여 개)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해 6월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기소된 두 미군 병사(운전병과 관제병)가 미군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데 따른 항의의 뜻이었다.

⑥ 여성인권의 아픈 역사 '서울시립 부녀보호소' 터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이 운영하는 서울여성플라자는 "여성·가족의 소통과 공유 공간"으로 2002년에 개관했다. 2층에는 성평등도서관 여기(여성이 기록하고 여성을 기억하는 공간)도 있다.
  

서울여성플라자(대방동) '서울시립 부녀보호소'가 있던 자리에는 서울여성플라자가 들어서 있다. ⓒ 김학규

 
그런데 이곳은 여성플라자가 들어서기 전 오갈 데 없는 부랑 여성, 성매매 여성을 일시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시가 설치·운영하는 '서울시립 부녀보호소'가 있던 자리였다.

5.16군사쿠데타 직후인 1961년 '사회정화' 차원에서 중구 주자동 남산자락에 처음 들어선 '서울시립 부녀보호소'가 대방동으로 이사 온 것은 군사정권의 '교외이전 방침'에 따른 1963년의 일이었다. 1998년에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전하면서 대방동 시대를 마감한다.

'서울시립 부녀보호소'는 군사정권 시절 여성 인권침해의 대표적 공간으로 악명을 떨친다. 1968년에는 속칭 '종삼'으로 불리던 종로3가 일대의 홍등가를 철거하는 일명 '나비작전'이 벌어지면서 72명의 성매매 여성들이 대방동 시립부녀보호소에 수용된 것이 대표적이다.

거처가 없다는 이유로 무조건 강제 수용하는 것 자체부터 인권침해였다. 더군다나 한 번 수용되면 "6개월 동안 면회도 되지 않고 일체 외출도 못한 채 기술교육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교도소에 가는 것보다 더 싫어"했다(<교도소보다 싫어>, 경향신문, 1977. 8. 13).

1970년 전후에는 정원 300명의 두 배가 넘는 600여 명이 수용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대방동 시립부녀보호소 입소생들이 시설을 탈출하려고 집단으로 소동을 일으켰다'는 언론 기사가 거의 매년 등장한다.

가령, 시립부녀보호소가 대방동으로 이전해 온 1963년 11월에 "152명의 입소생 중 131명이 밤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틈을 타서 건물 벽을 뚫고 4미터 높이 철조망에 담요를 덮은 뒤 넘어가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1970년에도 235명이 집단탈출을 시도하는데, 주동자 9명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는 언론 보도도 보인다.

영화 <서산 개척단>과 '서울시립 부녀보호소'

대방동 '서울시립 부녀보호소'는 최근 상영된 영화 <서산 개척단>으로 다시 한 번 관심의 대상이 된다. '서산 개척단'(대한청소년개척단) 역시 쿠데타 세력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전국의 청년들을 강제 동원하여 충남 서산에서 간척사업을 벌이던 기관이다.

그런데 수용된 젊은이들의 탈출 시도가 잇따르자 '결혼을 통한 안착'을 추진하면서 대방동 시립 부녀보호소의 젊은 여성들이 그 상대로 강제 동원된다. 물론 당시 언론은 "새 삶의 터전"을 만드는 젊은이들의 미담으로 기사화한다(<큰 절로 고독과 결별 – 서산 개척단의 60쌍 합동결혼식>, 동아일보, 1963. 5. 1).

하지만 이들 젊은 여성들은 서산에 도착하자마자 운동장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 옆에 설 것을 요구받아 짝을 이룬 후 얼마 후 합동결혼식의 신부가 됐다고 한다. 이것이 미담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었다.
  

시민회관에서 치러진 합동결혼식<2차>(경향신문, 1964. 11. 24) '서울 시립부녀보호소' 수용 여성들이 '서산개척단' 젊은이들과 한 강제 합동결혼식을 당시 언론에서는 '갱생'으로 미화해서 보도했다. 시립 부녀보호소 출신 여성 225명이 신부로 참석한 이날의 합동결혼식은 당시 서울시장 윤치영의 주례로 치러졌다. ⓒ 경향신문

이렇듯 여성 인권 유린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서울여성플라자에 이곳이 '서울시립 부녀보호소'가 있던 곳임을 알리는 표석하나 설치돼 있지 않은 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 [동작 민주올레]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역사 탐방 ④ 기사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시민기자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으로 있습니다.
#동작 민주올레 #대방길 #서울시립 부녀보호소 #여성플라자 #캠프 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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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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