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에 폭탄을'...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 배출한 학교

[동작 민주올레⑤]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대방길⑧

등록 2018.09.28 09:46수정 2019.10.20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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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 기자말

'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5회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공군기념탑을 지나 남쪽으로 더 가면 도로로 끊어진 산등성이를 잇는 오작교가 나온다. 숭의여중고로 가기 위해서는 도로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게 좋다(오작교를 지나 산등성이를 타고 계속 가도 숭의여중고 정문으로 갈 수 있다). 길을 따라 남도학숙을 지나면 숭의여중고가 나온다.

⑧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낸 숭의여중고
   

숭의 역사관 숭의여고 교정에 있는 '숭의 역사관'에는 권기옥 선생 등 숭의 출신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도 전시되어 있다. ⓒ 최서희


    
1903년 평양에서 미국 북장로회가 건립한 미션스쿨 숭의여학교로 출발한 숭의는 말 그대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다. 그런 숭의가 대방동에 자리 잡은 것은 개교 100주년에 즈음한 2003년이다.

송죽회 그리고 조선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

숭의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다. 송죽회(1913, 松竹會)는 숭의여학교 교사와 학생으로 이뤄진 비밀결사조직이었다. 교사 김경희와 황에스터를 비롯하여 졸업생 안정석, 재학생 황신덕, 박현숙, 채광덕, 이마대, 이효덕, 송복신, 김옥석, 최자혜, 서매물 등이 조직원이었다.


송죽회는 망명 지사의 가족을 돕고 독립군의 자금 지원 활동은 물론, 참여자들의 실력함양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중 박현숙은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한 학교를 해방 후 재건한 인물이다.

숭의가 낳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권기옥(1901~1988)은 영화 <암살>의 주인공 안옥윤의 역할 모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녀 역시 송죽회의 조직원이었으며, 조선인 최초의 여성비행사이기도 했다. 숭의여학교 재학 당시 동료들과 함께 3.1혁명에 참여하여 3주간 구류를 살았고, 평양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 체포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권기옥은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1923년 임정의 추천을 받아 윈난 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해 비행사의 꿈을 가꾼다. 권기옥이 비행사가 되기로 한 것은 '비행기술을 배워 조선총독부와 일본에 폭탄을 투하하겠다'는 포부 때문이었다. 그녀는 1925년 중국군의 펑위샹 부대 휘하 공군에서 비행사로 복무한다.

권기옥은 1928년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결혼했는데, 이상정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이상화 시인의 친형이기도 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충칭에 있는 장개석의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한다. 1943년에는 김순애, 방순희, 최선엽, 최애림, 최형록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직할 한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해 사교부장(社交部長) 등으로 활동한다.

어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이끌림이 있었던 걸까? 한국 공군의 어머니라고 불릴만한 인물을 배출한 숭의여중고가 33년간 공군본부로 있던 대방동으로 이전한 것은 단순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신기하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권기옥의 묘 묘비 하단의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라"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보훈처는 영화 <암살>이 나온 이후 묘비명문을 교체하였다. 새삼 영화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 김학규



강경애, 식민지 시대 하층 여성을 대변하다

식민지 시대 하층 여성의 대변자 역할을 한 당대 최고의 소설가 강경애(1906~1944)는 숭의여학교에 다니다 중퇴했다.

강경애는 숭의여학교에 다니던 1923년 10월 기숙사 학생들이 주축이 되는 동맹휴교를 주도한다. 추석을 맞아 기숙사 사감이 동료의 묘소 참배마저 우상숭배라며 가로막았다. 학교 측의 지나친 통제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이 "기숙사는 감옥이 아니다"라고 반발하며 동맹휴교로 맞선다. 한 달간 지속된 이 동맹휴교로 기숙사 사감 라진경이 물러나는 대신 강경애 등 4명은 퇴학당한다.

강경애는 식민지 시대 뛰어난 작품 활동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친일 문학인 노천명의 '고상한 작품'인 <사슴>은 교과서에 등장할 수 있을지언정, 강경애의 식민지 하층 여성이 일제에 맞선 노동운동에 나서는 이야기를 다룬 <인간 문제>나 만주에서 생계를 위해 소금 장수에 나선 한 여성이 겪는 고난과 그 가까이에 있는 항일 독립운동가 이야기가 담긴 <소금> 등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강경애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김좌진 장군(1889~1930)의 암살범 박상실의 배후 인물로 알려진 김봉환(일명 김일성)과 내연관계였다는 소문 때문이 더 컸다. 

문제의 승려 출신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김봉환은 김좌진 암살 사건 직후 김좌진 측의 이붕해에게 살해당한다. 하지만 소문 여부를 떠나 최근 조선족 출신 작가 유순호의 심층 취재에 의하면 김좌진을 암살한 인물 박상실은 김봉환과 무관하며, 박상실은 공산주의자 이복림(본명 공도진, 1907~1937)과 동일 인물이었다고 한다. 민족주의계 독립운동 진영과 사회주의계 독립운동 진영간의 갈등 과정에서 완고한 반공주의자였던 김좌진이 암살당했고, 김봉환 역시 그 희생양이 됐다는 것이다(<만주 항일 파르티잔-잊혀진 독립운동가 허형식>, 선인, 2009).

이복림은 이후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는데,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37년 전사한다. 강경애는 애시당초 김좌진 암살 사건과는 무관했던 것이다.  

만주에서 주로 작품 활동을 한 강경애는 <인간문제> <지하촌> <소금> <원고료 이백원> <어둠> 등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겼다.
   

숭의여교생 맹휴 숭의여고생의 맹휴 소식을 알리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1923. 10. 18) 맹휴를 주도한 강경애는 동료 학생 3명과 함께 제적당한다. ⓒ 동아일보


     
해방 이후에도 민족운동에 나선 숭의여고생들 

해방 이후에도 숭의 학생들은 선배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운동에 나섰다.
 

숭의여고의 한일회담비준반대 투쟁 기사 (경향신문, 1965. 6. 26) ⓒ 경향신문



   
숭의여고학생들은 1965년 한일회담반대운동이 계속될 당시 휴교령이 철폐된 6월 26일에 학교 강당에서 1500여 명이 참석해 비준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한다('숭의여고생들 성토', <경향신문>, 1965. 6. 26).
   
1974년 8월 29일 국치일을 맞아서는 시내 경복, 휘문, 중앙 등 11개 학교 학생들과 함께 일본규탄대회를 추진한다. 장충공원과 서울운동장 앞에서 진행하려던 이날의 시위는 경찰과 학교 측의 제지로 1800여 학생들이 뿔뿔히 흩어져 장충체육관 앞에 300명, 퇴계로6가에 200명 정도가 모였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되고, 1천여 학생들은 남산순환도로를 통해 국립극장 쪽으로 나가다가 경찰의 제지망을 뚫지 못하고 학교로 되돌아온다.('중고생 데모 유산', <경향신문>, 1974. 8. 29).

숭의여고에는 숭의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숭의 역사관'이 있는데, 독립운동의 역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함께 한 숭의여고의 역사는 담겨 있지 않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번대방정에 살던 보통 사람 평전영은....
일제 강점기 철도국 직원으로 번대방정에 살던 평전영(平田榮, 1923년생)은 1945년 3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징역 10월에 처해진다. 평전영의 죄목은 "대동아 전쟁 시기에 사람들의 마음에 혹란을 유발하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안녕 질서에 관한 죄>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당시 판결문(소화19년 형공 제3755호)을 보면 구속되기 5개월 전인 1944년 7월 중순에 경성역 구내 남원 방향 전철수 대기소에서 동료들과 잡담를 나누다가 "우연히 이야기가 큐수 폭격에 미치자"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장개석의 부하로 조선인 중에 김일성이라는 위대한 사람이 있다. 김일성은 일본인, 중국인, 러시아인, 미국인 등 상당수 부하들을 거느리고 옛 의적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김일성은 학력도 있고 덕망도 있다. 김일성은 소련과 연락하면서 일본에 대항하고 있다. 김일성 말에 의하면 미국 비행기는 일본 본토를 폭격하더라도 조선은 폭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조선인은 안심하고 살아도 괜찮다."
 
당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조차 폐간된 상황이었고, 민심이 흉흉한 속에서 오로지 풍문으로 듣는 이야기가 은밀하게 전해지던 시기였다. 당연히 내용은 100% 정확한 정보를 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평전영이 전한 김일성은 장개석 부대에 있던 김홍일 장군의 이미지와 중첩되어 있다.
 
보통 사람 평전영은 이미 창씨개명까지 한 총독부 철도국 직원이었지만, 민족의식은 결코 죽지 않고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민중들은 위와 같은 이야기를 동료에게 전하면서 조선의 해방에 대한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평전영으로부터 이 말을 전해들은 백천흥식(白川興植)은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또 이야기했던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퍼져나가던 끝에 구체적인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어느 시점에 일제 경찰의 귀에도 들어갔다. 결국 평전영과 백천흥식은 일경에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신세가 되었고, 함께 직역 10월에 처해졌다.
 
일제 강점기 막판 1940년대는 마치 1980년대 '유언비어 유포죄'로 구류도 살고 구속도 되고 하던 상황과 대단히 유사했던 것이다.

(* [동작 민주올레]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역사 탐방 ⑥ 기사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김학규씨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
#동작 민주올레 #숭의여고 #대방길 #강경애 #권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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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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