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고 학생들의 찬란한 역사 vs. 설립자의 부끄러운 역사

[동작 민주올레⑥]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대방길⑨

등록 2018.09.29 16:34수정 2018.10.0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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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 기자 말

「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6회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숭의여중고를 나와 언덕길을 따라 오르면 성남고등학교가 보인다. 숭의여고가 용마산 동편 자락에 있다면 성남고는 용마산 서편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⑨ 3.17학생의거에 빛나는 성남고생들

자랑스러운 성남고 학생들 
 

성남고생들의 3.17의거 소식을 전하는 언론(동아일보, 1960. 3. 18) 성남고 학생들은 영등포로타리까지 진출하여 시위를 이어나갔다. 경찰은 공포까지 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의 사저의 분위기를 전하는 '당선축하 하객 쇄도'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 동아일보

성남고에는 성남의 자랑 '3.17 의거기념탑'이 있다. '3.17 의거기념탑'은 우리 사회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효시격인 4.19혁명과 관련이 있다.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의 3.15부정선거에 맞서 마산에서 3.15 의거가 일어났을 때, 불과 이틀 후에 서울에서 학교 단위로는 처음으로 항의 시위에 나선 곳이 성남이다.

이날 400여 성남고 학생들은 교문을 나서 영등포로터리까지 진출해 "경찰은 자숙하라!" "경찰은 학생 사살사건 책임지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선전물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공포까지 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킨다. 이 와중에 100여 명이 영등포경찰서에 연행되고 이중 3명의 학생은 구류 처분을 받았다. 4.19혁명의 역사에 성남고생들은 확실한 족적을 남긴 셈이다. 
  

3.17의거기념탑 성남고 교문을 들어가자마자 왼편에 있다. ⓒ 김학규

그런데 성남고 학생들의 의거는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시위 다음날 <동아일보>의 '오열 잠동 여부 지검서 내사 착수'라는 기사에는 "검찰은 이 데모 사건이 종래의 어떤 데모와도 달리 경찰을 비난하고 있기 때문에 오열의 잠동 여부를 조사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오열(五列)은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파시스트 부대인 프랑코 군의 장군 에밀리오 몰라 비달이 부대를 4열로 편성하여 마드리드로 진격하면서 마드리드 내부에 자신의 지지자들이 제5열로 있다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니까 성남고 학생들의 시위는 간첩이나 북한과 연계된 불순세력의 침투로 발생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근거는 "경찰을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경찰이 이틀 전 마산에서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발포하여 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의 부상자가 나왔는데, 그런 경찰을 비난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자칫 성남고 학생들은 간첩의 배후조종을 받아 시위에 나선 어리석은 학생들로 전락할 뻔했던 것이다. 이어진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몰락해서 망정이지 성남고 학생들은 자칫 치명적인 위기에 처할 뻔했다('동작 사람들, 4·19혁명에 앞장서다',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

4.19혁명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은 이후 1960년대 내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성남고생들을 중심에 세우는 역할을 한다. 
 

3.17 의거 기념비 1993년에 3.17 의거의 주역이었던 성남고18회 동문들이 기존 기념탑 옆에 세웠다. 그런데 최근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철거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남고 총동문회에서 김명수 이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규탄대회를 열기도 했다. ⓒ 김학규


성남고생들,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운동에도 앞장서다

성남고 학생들은 한일회담 반대 운동에도 선두에 선다. 1964년 5월 데모 학생들의 영장기각에 불만을 품은 공수단 소속 무장군인들의 법원 난입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재학생 1200여 명이 참석하여 '법원침입 군인에 대한 모의재판'을 여는 등 고교생들로서는 처음으로 규탄시위에 나선다.

1965년에는 6월에는 "한일협정 비준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노량진 삼거리와 한강대교 입구까지 진출해 경찰과 대치하기도 한다(이 이야기는 나중에 '노량진길'에서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1967년에는 500여 명의 학생들이 투석전을 벌이면서 6.8부정선거규탄 투쟁에 나서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영등포구청까지 진출했다가 1시간 만에 해산한다. 1969년에는 박정희의 장기집권 기도인 삼선개헌에 맞서 개헌반대운동을 벌이다 12일간 휴교령이 떨어지기도 한다.

"선생님들 힘내셔요!" 1980년대 교육민주화운동에도 앞장선 성남고생들

이러한 성남고생들의 민주화운동 전통은 1980년대에도 이어진다. 1989년 2월 성남고에서는 교사 2명에 대해 교사협의회 활동을 이유로 중학교로 전보발령을 내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3월 6일 1800명 성남고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하고 농성을 벌이면서까지 부당인사 조치 철회를 요구한다. 학생들의 시위는 8일까지 이어진다. 이에 앞서 '성남교육 교사협의회' 소속 교사 23명은 3월 1일부터 부당인사조치 철회와 김윤근 이사장의 퇴진 등 4개항을 요구하면서 여러 날 밤샘 농성을 벌였다. 결국 재단 측은 부당인사 조치를 철회하게 된다.
  

성남고 학생들의 시위 소식을 전하는 언론 기사(1989. 3. 7, 한겨레신문) 성남고 학생들은 교사협의회 활동을 이유로 2명의 교사가 성남중학교로 강제 전보되자 이에 항의하여 수업거부와 농성을 벌였고, 끝내 승리하였다. ⓒ 한겨레신문

성남고에는 "교육민주화의 의지를 다짐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성남교육 교사협의회 일동' 이름의 표석이 설치돼 있다.

부끄러운 성남고 설립자들, 원윤수와 김석원

그런데 이러한 자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성남고도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성남고의 설립자는 원윤수(1887~1940)와 김석원(1893~1978)이다. 원윤수는 텅스텐 광산에서 큰돈을 번 광산재벌로 일본군을 위해 쌀 3000석과 군용기 '경기호' 제작에 1000원을 헌납하기도 한 대표적인 친일기업인이다.

김석원은 일본육사를 나와 일제의 만주침략과 중일전쟁에 부역해 '전쟁영웅'으로 미화되면서 '일본군국주의의 화신'으로 불리기도 한 인물이다. 전쟁에서 돌아와서는 전국을 돌며 군사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들이 성남고보를 만든 이유를 동작구청은 <동작구지>(1994)를 통해 "광복의 원동력이 될 인재양성을 위해서는 민족학교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자각"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설립 당시 발행된 <매일신보>를 보면 성남의 교장은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한' 아베 요시오(安倍良夫) 일본군 소장이었고, "이 학교는 육군사관학교의 준비교가 되도록 하는 특성을 가지고 '데뷰'하게 되었다"라고 소개돼 있다.

실제로 성남 출신의 학생들은 일본 육사나 군사학교에 다수 진학하는데, 1943년 한 해만 해도 일본육사(예과)에 3명, 육군유년학교에 3명, 항공학교에 1명, 경리학교에 1명 등 총 8명이 지원한 실정이었다(<매일신보>, 1943. 6. 30). 1944년에 부임한 성남의 2대 교장도 일본인 우지에(氏江富雄)이었다.

지역의 유지와 지방자치단체와 야합하면 역사가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동작구청은 2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러한 역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개정판 발간 계획조차 세우지 않고 있다. 

성남고의 아픈 역사는 해방 73주년이 되는 지금에도 성남고 교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성남고 교가는 설립자인 친일파 원윤수와 김석원을 '원석두님'의 '크신 공덕'을 칭송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먼동이 터오니 온누리 환하도다'라는 가사가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을 칭송하는 뜻을 담고 있다는 의혹까지 나온 상황이다.
  

성남고 교가비 먼동이 트니이 온누리 환하도다 환한 이강산에 원석두님 나셔서 배움의 길 여시니 크신 공덕 가이 없네 성남 성남 무궁탄탄 할지어다 ⓒ 김학규

이렇듯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가사를 담은 '교가비'가 교정에 '당당히' 서 있는 것도 참으로 어색하다(관련 기사 : '일본 천황 찬양 교가, 한국 맞아?'). 성남고에는 2002년까지 설립자 김석원의 흉상이 설치돼 있었으며, 김석원의 무덤은 지금도 교정 안 뒤편에 있다.
 
성남고가 들어서 있는 자리는
성남고는 1938년 이태원에서 성남고등보통학교로 출발했다. 원래는 용산고보로 신청하였으나, 조선총독부에서 학교 명칭 정비방침에 따라 용산중학교가 이미 있는 상황이어서 성남고보로 바꿀 것을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성남고보는 곧 성남중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1941년에 대방동으로 이전했다. 

원래 성남고 운동장이 있던 자리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용마(龍馬)가 우물에서 나와 뒷산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성남고 뒷산의 이름이 용마산으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성남고 자리에는 공민왕 때 문신 서견의 무덤이 있었다. 서견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은거한 인물인데, 한양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서견의 무덤은 조선총독부의 경성부 정비 방침에 따라 1940년 경기도 의왕(내손동)으로 이장됐다. 인근에 있던 숙종의 여섯 번째 아들 연령군 묘와 연령군의 어머니 명빈(박씨) 묘도 있었는데, 마찬가지 이유로 충남 예산으로 이장됐다.

일제 강점기 성남고 일대는 군사훈련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1942년(5월 21일) 경성제대, 경성의학전문 등 11개 대학과 전문대 학생 5000명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모의 군사훈련을 한 곳이 바로 성남고 일대였다.

도림리(지금의 신도림동)에 결집하여 경성으로 항하는 서군과 한강인도교 아래 사장에 집결하여 서군의 진격을 저지하러 떠나는 동군은 성남고 뒷산 '83고지'(용마산 정상)를 둘러싸고 치열한 가상 전투를 벌이는데, 이 광경을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까지 나와 직접 참관했다(<매일신보>, 1942. 5. 22).

(* [동작 민주올레]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역사 탐방  기사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김학규씨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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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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