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노량진삼거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동작 민주올레⑧]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노량진길①

등록 2018.10.01 18:11수정 2018.10.0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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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노량진길>이다. - 기자 말

'동작 민주올레' – <노량진길> 1회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동작경찰서 - ⑤컵밥 거리 - ⑥가톨릭노동청년회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노량진 삼거리노량진역 7번출구 앞에서 바라본 노량진 삼거리. 멀리 장승배기가 보인다. 왼쪽에는 1호선 노량진역이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영등포가 나온다. ⓒ 김학규

오늘은 '노량진길'을 걸으며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시간이다. '노량진길'에는 노들나루 이래 경인선 철도 개통, 한강인도교 개통 등과 맞물려 교통의 요지 역할을 해온 노량진의 역사가 그대로 반영돼 있다.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라는 이 지역의 특성은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풍부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① 노량진 삼거리에서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다

1. 밤깊은 인도교 비내리는 노량진에
사랑을 아로새긴 그 거리는 여전한데
그 사람은 어디갔나 노량진 삼거리
내마음 우는 이밤 영등포로 떠날까

2. 쓸쓸한 외등도 비에 젖는 삼거리에
사랑을 못잊어서 헤매도는 삼거리에
다시 한번 찾아왔다 노량진 삼거리
내사랑 잠든 이밤 인천으로 떠날까


가수 박일남은 1968년부터 <노량진 삼거리>를 이렇게 노래했지만, 노량진 삼거리는 사랑의 아픔만 있는 곳은 아니다. 노량진 삼거리는 한국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

노량진 삼거리는 한강대교 남단에서 노량진역을 지나 영등포로 가는 길과 장승배기에서 내려오는 길이 만나는 곳을 일컫는다. 1982년 상도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한강 인도교를 넘은 사람들은 이 곳 노량진 삼거리까지 와서 장승배기로 방향을 틀 것인가, 아니면 영등포 방향으로 직진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챔피언의 산실, 동아체육관을 기억하시나요?
'노량진길'을 함께 탐방하기 위해서는 노량진역 7번 출구 앞에서 만나는 게 좋다. 일행을 기다리는 중에 바로 뒤편 건물을 주목해보는 것도 좋다. 가구점이 있는 3층 건물인데, 1970, 1980년대 이 건물 2층에는 '동아체육관'이 있었다.
 
동아체육관은 박종팔, 김득구, 유명우를 비롯하여 1970, 1980년대 국민의 사람을 받던 유명 프로권투 선수를 배출한 말 그대로 '챔피언의 산실'이었다. 동아체육관의 관장은 아마추어 국가대표를 거쳐 동양챔피언을 지낸 김현치였다.
 
당시 프로권투는 국민의 사랑을 받는 최고의 스포츠 중 하나였다. 맨몸으로 인생역전을 노리는 가난한 젊은이들은 꿈과 희망을 안고 이곳 동아체육관으로 몰려들었다.
 
한편, 박일남은 <노량진 삼거리>(1968)만이 아니라, 노량진 이야기를 담은 대중가요 <노량진의 밤>(1973)이 인기를 끌었다. <노량진 삼거리>만으로는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1. 이슬비가 소리없이 내리던 노량진의 밤
가로 등불도 비에 젖는 한강교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속삭이던
내사랑 순이가 말없이 가버렸네
영원히 잊지 못할 노량진의 밤이여
 
2. 옛 추억을 달래려고 찾아온 노량진의 밤
그때처럼 한강교에 비는 오는데
마음을 주고 받던 주고 받던
내사랑 순이가 다시는 오지 않네
영원히 잊지 못할 노량진의 밤이여

성남고생들 노량진 삼거리로 진출하다

1965년 6월 22일 박정희 군사정권이 일본과 굴욕적 한일협정을 조인하자 성남고 학생들이 "한일협정 비준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다시 시위에 나선 곳이 바로 노량진 삼거리였다.

1964년부터 시작된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시위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이 시작되면서 잠시 주춤했지만, 다음해 6월 22일 한국의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일본의 시이나(椎名) 외상 사이에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한일간에 협정이 조인된 마당에 이제 국회에서 비준이 되지 않도록 막아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문교부가 학생들의 시위를 대비해 이미 휴교령을 내려놓은 상황이었만, 그게 학생들의 시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일협정이 조인되는 날인 6월 22일부터 시작된 3일 간의 휴교령이 끝나고 등교한 성남고 학생들은 이틀째인 26일 곧바로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은 이날 오전과 오후에 걸쳐 두 차례 시위를 벌였다.

이날 오전 삼삼오오 학교를 빠져나온 2학년 학생 400명은 용마산을 넘어 장승배기 아래쪽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곧바로 노량진 삼거리 방면으로 행진을 시작해 출동한 경찰과 대치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1차 시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노량진 삼거리 쪽에 친 경찰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최루탄을 발사하면서 진압에 나선 경찰에 10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고 시위대는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연행을 피한 학생들은 다시 용마산을 넘어 학교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다수의 학생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은 3학년과 1학년을 포함한 1200여 학생들은 오후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남고 학생들의 2차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다시 장승배기 아래로 진출했고, 이번에는 경찰의 방어선을 뚫고 노량진 삼거리를 지나 한강인도교(한강대교) 입구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위로 문교부는 성남고에 대해 7월 3일까지 휴교 기간을 연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일협정 비준반대에 나선 성남고 학생들(1965. 6. 26, 동아일보)4일 전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성남고 학생들은 교내시위로는 한계를 느끼고 이날 노량진 삼거리 일대에서 두 차례에 걸쳐 시위를 벌였다. ⓒ 동아일보

4.19혁명 전야에 일어났던 3.17의거 때는 학교 정문을 나와 지금의 대방역 앞을 거쳐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했던 성남고 학생들이 한일회담 반대운동 때는 반대편인 노량진으로 진출했다는 점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시위 구경하던 한 어린이의 안타까운 죽음

그런데 이날 한 어린이가 시위 진압 차량에 치어 숨지는 안타까운 일도 벌어졌다. 오전의 1차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던 군용트럭이 시위 진압을 끝낸 경찰을 태우고 돌아가던 중 시위를 구경하던 한 어린이를 치어 숨지게 한 것이다.

더군다나 숨진 어린이는 '농아학교'에 다니던 장애인 학생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이 군용트럭은 그것도 모자라 노량진 주민의 우마차까지 반파시키고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당시 시위를 구경하던 인근 주민 600여 명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당 군용트럭은 이미 달아난 뒤였지만, 뒤따라가던 다른 군용트럭을 둘러싸고 욕설과 돌까지 던지며 강력히 항의하게 됐다. 일부 주민들은 그래도 분이 가시지 않자 근처에 있던 교통순경을 상대로 사고 군용트럭을 그대로 보내줬다며 집단폭행하는 일로까지 비화했다.  
 

옥숙희 어린이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 기사(1965. 6. 26)성남고 학생들의 시위를 구경하다 군용트럭에 치어 사망한 옥숙희 어린이(당시 11세)는 서울농아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 동아일보


노량진 삼거리, '4.19혁명'과 '80년 서울의 봄'이 담겨 있는 곳

노량진 삼거리에 서려 있는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비단 성남고 학생들의 시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남고 학생들의 시위보다 무려 5년이 앞선 1960년 4.19혁명 당일에도 숭실대 학생 40여 명이 노량진 삼거리를 거쳐 시내로 진출했다.

당시에는 상도터널이 개통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출발한 숭실대 학생들은 장승배기를 거쳐 이곳 노량진 삼거리에서 오른쪽을 발향을 틀어 노량진역을 지나 한강대교를 건넜다.

1980년 '서울의 봄' 때도 노량진 삼거리는 다시 한 번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등장한다. 그해 5월 14일, 영등포역을 거쳐 마포대교를 건너 광화문에 진출한 중앙대와 숭실대 학생들이 '계엄해제와 민주화 실현'의 열망을 안은 채 스크럼을 짜고 "계엄령을 해제하라!" "유신잔당 물러가라!" "전두환은 물러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이곳 노량진 삼거리를 휩쓸고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했다. 
 

1980년 민주화의 봄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1980. 5. 15)5월 14일 중앙대와 숭실대 학생들도 노량진 삼거리를 지나 사진 속의 영등포 시장과 영등포역으로 진출했다. 영등포에서 서울대생과 합류한 시위대는 여의도와 마포를 거쳐 광화문과 서울역까지 진출했다. ⓒ 동아일보

(*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역사 탐방⑨(노량진길 2회)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김학규씨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도대표 겸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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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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