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역사 왜곡... 12.12-5.18 관련자들의 민낯

특별사면·복권 이후 오히려 '우리는 정당했다'고 외치는 그들의 행적

등록 2018.10.01 14:01수정 2018.10.0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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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5.18 관련자 1심 선고 1996년 8월 27일 자 한겨레.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형사합의 30부는 반란수괴죄 등으로 기소된 전두환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12.12와 5.18 관련 ▲ 노태우 피고인 징역 22년 6월 ▲ 황영시.허화평.이학봉.정호용 피고인 각각 징역 10년 ▲ 유학성.최세창.허삼수.이희성 피고인 각각 8년 ▲ 차규헌.장세동.주영복 피고인 각각 징역 7년 ▲ 박종규.신윤희 피고인 각각 징역 4년을 선고했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좌절시켰던 12·12 쿠데타와 5·17 내란은 우리 헌정사를 질곡과 갈등의 악순환으로 몰아넣었던 출발점이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전두환 피고인 등 주요 피고인들에게 원심과 마찬가지로 반란 및 내란죄를 적용, 성공한 쿠데타라 할지라도 처벌할 수 있다는 판례를 남겼다.

대법원의 선고는 12·12는 군사반란으로, 5·17 비상계엄 확대와 5·18 광주 유혈 진압은 국헌 문란 목적의 연속된 폭동으로 규정했던 원심 판결의 뼈대를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사상 처음으로 쿠데타 관련자들을 법정에 세웠고 폭력과 불법으로 세워진 군사정권의 불법성을 심판했다는 의미가 있었지만, 전두환씨를 제외한 반란 가담자들에게 너무 가벼운 선고를 내렸다는 목소리는 판결 직후부터 제기됐다.

그마저도 대법원 확정 판결 이후 2년이 채 되지 않아 관련자 전원에게 특별사면·복권이 이뤄짐으로써 정치적 거래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군사반란 관련자들을 사면한 것은 국민의 법 감정을 거스르는 것이며 법의 권위도 훼손했다는 지적이었다.

당시는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진 직후로, 김영삼 정부는 국민적 화합을 통한 국난극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또 관련자들이 석방 뒤 근신해왔다는 점도 사면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특사를 통해 잔여 형기를 면제받고 공무담임권과 피선거권까지 회복한 반란가담자들의 이후 행적을 보면,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자들에게 정치적 부활의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사면 당시의 우려가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쿠데타 관련자들, 특별사면·복권 이후 무슨 일을 했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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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씨. 사진은 2015년 11월 25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는 모습. ⓒ 사진공동취재단


이들 중 다수는 법원의 판결을 부인하면서 끊임없이 역사 왜곡에 앞장서 왔다. 그 정점은 단연 반란의 수괴로 한때 사형을 언도받았던 전두환씨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12·12 군사반란을 정당화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 '5·18사태' 등으로 폄하하면서 자신을 '씻김굿의 재물'로 비유했다.

지난해 출판된 <전두환 회고록>에서 전씨는 12·12에 대해 "김재규 내란에 동조한 혐의가 명백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조사하고자 연행하던 중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라고 강변하면서 권력을 잡기 위한 하극상 반란이라는 법원의 판결을 부정했다. 그는 또 "(1979년) 10월 27일 새벽 국무회의가 계엄사령관이 될 수 없는 사람,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함으로써 12·12는 피해갈 수 없는 일이 됐다"라면서 반란을 정당화했다.


또 전씨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했다. 그는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계엄군은 죽음 앞에 내몰리기 직전까지 결코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고 하거나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며 계엄군의 발포를 정당화했다. 여기 그치지 않고 전씨는 "5·18사태 때에는 북한의 특수요원들 다수가 무장하고 있는 시위대 속에서 시민으로 위장해 있을 터였다"라는 등 북한군 특수부대의 개입도 주장했다.

결국 최근 법원은 조영대 신부 등이 전두환씨와 <전두환 회고록>을 출판한 전씨의 아들 전재국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전씨에게 5월 단체 등에게 총 7000만 원을 배상하라면서, 그의 회고록에 대해선 5월 단체 등이 요구한 70개 표현 중 69개 표현을 삭제하지 않고는 출판과 배포 등을 금지한다고 선고했다.

이와는 별개로 전씨는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기총소사 사실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비난하고 헬기 사격 사실을 부정해 조 신부와 유가족, 5·18 희생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형사재판에 출석해야 할 처지가 됐다.

전두환에 버금가는 박희도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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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총 박희도 회장 2016년 3월 4일 서울 종로구 프레스센터에서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주최로 열린 '불교계 일부 승려들의 일탈된 정치·사회활동' 서적 발간 기자회견에서 박희도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12·12 반란 당시 1공수여단장으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무력으로 점거했던 박희도씨 역시 현대사를 왜곡하는 활동에 앞장서 왔다. 반란에 참가한 후 군단장,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박씨는 김영삼 대통령이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한 직후인 1995년 11월 27일 "LA에 있는 아들을 보러 간다"면서 출국해 미국으로 도피했다. 3년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기소중지 상태였던 그는 뒤늦게 귀국해 재판을 받았다. 1999년 7월 9일 재판부는 그에게 반란지휘죄를 적용해 징역 5년을 선고했지만, 공범들이 이미 사면·복권된 후여서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

이후 박씨는 2006년 10월 반(反)대한민국 세력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구국의 선봉에 서서 반미친북세력과 북한의 핵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면서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아래 대불총)을 결성했다. 박씨가 상임공동회장으로 있는 대불총은 제주 4.3사건과 12·12쿠데타,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사건에 대한 재평가를 한다면서 전국을 돌며 강연회를 열어왔다.

2010년 6월 대불총은 자유북한군인연합과 함께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라는 출판기념회를 열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대불총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북한 김정일이 원하는 사람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시장으로 뽑을 수 있느냐"라며 나경원 새누리당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을, 2012년 대선 당시에는 "위기관리 능력을 갖추고 도덕적이며 원칙 있는 국가 지도자가 절실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라면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지지선언을 했다.

대불총은 2016년 '불교계 일부 승려들의 일탈된 정치 사회 활동'을 고발한다면서 <친북 반국가 승려 백서>를 발간했다. 같은 해 행정자치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2009~2015년 사이 2억3200만 원의 예산을 대불총에 지원했던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

지난해 1월 21일 탄핵 국면에서 열린 태극기집회에서 연단에 오른 박씨는 "죄도 없는 대통령을 무너트리고 촛불 세력이 연합해서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한다"며 "빨갱이들에게 넘어가서야 되겠는가"라고 주장했다. 최근까지 대불총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죄 석방을 요구하는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박씨도 지난달 13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변희재 석방하고, 즉각 태블릿PC 정밀감정하라!'는 광고에 '전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육군참모총장 재임 때인 지난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는 의혹이 최근 불거졌다. 이로 인해 그는 시민단체와 군 예비역들에 의해 내란미수죄로 전두환씨와 함께 지난 달 검찰에 고발된 상태다. 검찰이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하게 되면 이들은 내란(반란)과 관련, 12·12 쿠데타에 이어 두 번째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될 전망이다.

'12·12 쿠데타 - 5·18 유혈진압은 정당했다'고 말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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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희씨. 사진은 1996년 4월 1일 12.12 쿠데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4차 공판에 출석하는 모습. ⓒ 연합뉴스


박씨가 만든 대불총에서 감사를 맡고 있는 신윤희 전 육군본부 헌병감(예비역 육군 소장)도 군사반란 정당화에 앞장서고 있는 인물이다. 12·12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부단장이었던 신씨는 조홍 헌병단장의 명령을 받고 휘하 헌병을 동원, 수경사령관실에 진입해서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에게 총격을 가해 부상을 입히고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문홍구 합참 대간첩대책본부장,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

이후 육군본부 헌병감을 지내고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신씨는 1996년 반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 2심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 받았다.

신씨는 대불총 홈페이지에 올린 '12·12사건은 군사반란이 아니다' '12·12특별법은 위헌적 법률이다' 등의 글을 통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여 수사하겠다는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계획은 당시 계엄법에 의한 것으로 전혀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고 정당하고 합법적인 수사 행위"라고 강변했다.

그는 또 "'역사 바로세우기 재판'은 정치 보복적 재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12·12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며, 12·12사건은 재심의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012년 <12·12는 군사반란인가>는 단행본을 내고 예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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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26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을 맡았던 허화평 전 의원(2005년 9월 오마이뉴스 인터뷰 당시 자료사진). ⓒ 남소연

 
반란중요임무종사 혐의가 인정돼 대법원에서 징역 8년형이 확정됐던 허화평(12·12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미래한국재단 이사장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12·12는 정당한 임무 수행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 강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올해 초 <우리 시대 모순과 상식>이란 책에서는 지난해 탄핵국면에서 촛불을 들었던 국민을 좌파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권력 장악으로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체제를 그들이 바라는 평등주의 체제로 변혁시키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유도하고 6·15 선언에 입각하여 북한과 손을 잡는 자주민족통일의 달성을 도모하려는 데 있음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군사반란을 정당화하고 민주화운동을 폄훼하려는 12·12와 5·18 관련자들의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극우 사이트와 종편 채널을 중심으로 12·12와 5·18과 관련된 왜곡된 주장이 넘쳐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아무런 반성도 없는 자들에게 정치적 논리에 따라 사면을 남발해서는 절대로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은 요원할 뿐이란 사실을 반란 관련자들의 현재 모습에서 깨닫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역사 바로세우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12·12 쿠데타 당시 반란군에 맞서다 순직한 고(故) 김오랑 중령(당시 소령)의 평전 <역사의 하늘에 뜬 별 김오랑>을 쓴 김준철(예비역 육군 대위, 대한민국 ROTC 민주포럼 공동대표 겸 운영위원장)씨는 "사면이란 죄를 용서해준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 전제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개전의 정'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라면서 "하지만 군사반란에 가담했던 전력을 가진 사람들이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태극기 집회에서 민주주의를 폄훼하는 발언을 일삼는 것을 보면 군사반란에 대해 우리 사회가 역사적·정치적으로 제대로 단죄했는지 의문이 든다"라고 지적했다.
#군사반란 #12.12 #5.18 #역사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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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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