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 껍데기는 가라!

[잊혀지는 것들]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키

등록 2018.09.28 10:16수정 2018.09.28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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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훈희

 

ⓒ 이훈희


고향집에 가면 도시에선 보기 힘들어진 물건들을 종종 만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고향집엔 절구와 지게가 있었다. 아버지는 요즘에도 마당 한켠에 댑싸리가 자라게 두고 가을이 되면 그걸 말리고 묶어서 싸리빗자루를 만드신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덮힌 마당이지만 싸리빗자루로 마당을 쓸면 흙마당을 쓸던 어린 시절로 돌아갈 것만 같다.

추석 연휴에도 아버지는 매일 마당에서 일을 하셨다. 어머니께서 주워 오신 도토리를 말려 껍데기를 까고 계셨다. 도토리묵을 쑬 수 있는 도토리 가루를 얻기 위한 첫 작업이다. 산에 가서 도토리 줍는 걸 좋아 하시지만 그 이후 작업에는 그리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지령을 내리셨다. 재료는 준비되었으니 작업을 시작하라고.

도토리를 얼른 말려서 껍데기를 까고, 알맹이를 또 말려놓아야 도토리가 썩지 않기 때문에 지령을 받은 아버지는 명절에도 매일 작업을 쉬지 않으셨다. 따가운 가을 햇살에 잘 마른 도토리에 운동화 신은 발을 살짝 올려 비비면 도토리 껍데기가 벗겨진다. 어느 정도 양이 차면 도토리 알맹이와 껍데기가 합쳐진 무더기에서 알맹이를 골라내야 한다.

이 때 오래간만에 눈에 띄는 도구, '키'가 등장했다. 곡식 같은 걸 까불러서 알곡과 쭉정이 혹은 껍데기를 분리하는데 사용하는 도구다. 아버지는 도토리 알맹이와 껍데기가 한데 뭉쳐진 무더기를 키에 담고 키질을 하셨다. 수십 년 농사를 지은 전문가답게 키질 몇 번에 벗겨진 도토리 껍데기들을 모두 날리고 도토리 알맹이만 키 위에 남기는 아버지.

키는 이렇게 농삿일에 사용하기도 했지만 다른 용도도 있었다. 내가 어느 정도 커서 오줌을 가릴 줄 알게 된 후에도 밤에 자다 이불에 실수를 하곤 했다. 간밤에 실수를 하고 난 다음 날 아침에 어머니는 내 머리에 키를 씌우고 빈그릇 하나를 손에 들려주고 윗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오라 하셨다. 키를 쓰고 이웃집 앞에 가 있으면 아주머니께서 소금을 퍼 가지고 오셨다.


아주머니는 굵은 소금을 한 웅큼 움켜쥐시곤 내게 신나게 뿌리셨다. 소금으로 얻어 맞고 눈물을 닦던 기억이 희미하게 난다. 이렇게 창피를 줘야 다시는 밤에 실수를 하지 않는다나? 하하. 당시엔 꽤나 부끄러웠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니 그 또한 재미있는 추억이다. 하지만 그런 부끄럼을 당한 이후에도 가끔씩 실수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업을 잇지 않고 농촌을 떠나 살고 있는 난 마당에 놓인 키와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키질이 반갑고 신기하다. 알맹이는 키 안쪽으로 모아주고 껍데기는 바깥으로 날려버린다. 도토리 껍데기를 가을 바람에 날려버리는 아버지의 키질을 보다가 문득 평화를 이루려는 소식에 재를 뿌리는 이들이 떠올랐다. 껍데기처럼 혹은 쭉정이처럼 우리 사회에 섞여 있는 정치인들.

우리 시민들도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낼 수 있는 키를 쥐고 키질을 배워 진정으로 제 국민을 생각하며 위하는 정치인들을 골라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껍데기는 가라!

#키 #키질

#모이 #키질 #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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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 지치지 말기를. 제발 그러하기를. 모든 것이 유한하다면 무의미 또한 끝이 있을 터이니. -마르틴 발저, 호수와 바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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