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남친을 허락한다" 그 남편들의 요상한 문화

[서평] 로베르토 비조키 <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

등록 2018.10.03 19:12수정 2018.10.03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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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남성들은 부인의 투기심을 규제했다. 칠거지악 중 하나로 규정했을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질투심을 표출했다는 이유로 법적 처벌을 가한 사례는 거의 없지만, 여성의 투기심을 형식상으로나마 죄악시한 것은 사실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질투심은 남성한테도 있다. 아내를 남남처럼 대하고 각방을 쓰는 남성도 자기 부인이 다른 남성과 가까이 지내는 '꼴'은 눈 뜨고 보기 힘들 것이다. 헤어진 옛 애인이 다른 남성과 사귀는 걸 지켜보기 힘들어 하는 남성도 적지 않다.


아내의 '공식 이성친구'
 

이런 인간 심리를 감안할 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관습이 18세기 이탈리아에 존재했다. 아내의 남자를 남편이 공인하는 관습이 그 나라 귀족사회에 있었다. 이로 인해 아내와 아내의 남자 그리고 남편이 공식적 삼각관계를 이루는 일이 많았다. 소수 귀족들의 문화이기는 했어도 엄연히 지배층의 문화였으니, 이것이 18세기 이탈리아 문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세기면 조선에서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에 의해 탕평책이 추구되던 때였다. 왕이 각 당파를 골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은 왕권이 강력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양반 귀족들이 탕평책에 맞서 활로를 모색하던 그 시기에, 저 서쪽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공식적 삼각관계라는 '요상한' 문화에 푹 빠져 있었다.

여성 못지않은 남성의 질투심과 충돌할 수 있는 이 같은 문화 현상을 분석한 책이 오는 5일자로 발행되는 <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서해문집)다.

책 제목에 들어간 치치스베오(cicisbeo)는 부부관계에 끼어든 제3의 남성을 가리킨다. 부인이 치치스베오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고 남편이 고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떤 경우든 상대방 배우자의 동의를 거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 ⓒ 서해문집

  
저자는 이탈리아 역사학자 로베르토 비조키(Roberto Bizzocchi)다. 피사대학 역사학과 교수이며 교회·지성·문화·여성 문제를 전공한다. 번역자는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임동현이다. 비조키와 같거나 비슷한 분야를 연구한다.

6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치치스베오의 개념 및 유사 현상과 더불어 구체적 실태를 보여주는 광범위한 사례들을 다루고 있다. 이 관습이 생긴 원인과 함께 소멸하는 과정도 역사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저자는 18세기 유럽인들의 편지·일기·기행문 등을 통해 치치스베오의 실상이나 이에 대한 당대인들의 시각을 포착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책은 치치스베오의 개념에 관한 설명부터 다룬다. 제1장 '치치스베오는 누구였는가?'에 따르면, <이탈리아 대사전>은 치치스베오를 "18세기에 발달했던 관습에 따라 남편이 부재중일 때 귀부인을 따라다니며 그녀의 모든 활동을 챙기고 돕는 시종기사(cavaliere servente)"라고 정의헀다. 이에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인다.
 
"치치스베오 혹은 시종기사는 18세기에 의도적으로 계획된 삼각관계의 틀 안에서 다른 누군가의 아내를 곁에서 수행하는 공인된 임무를 맡은 남성이었다."
 
이탈리아의 치치스베오, 신라의 근친혼

귀족 부부뿐 아니라 치치스베오 역시 귀족이었다. 다른 남성한테 아내를 맡겨야 한다면 하층 신분보다는 같은 신분한테 맡겨야 마음도 편해지고 자존심도 상하지 않는 귀족 남성들의 심리가 치치스베오의 신분에서 표출된다고 볼 수 있겠다.

치치스베오들은 주로 연하남이었다. 대개는 동생 아니면 조카뻘이었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다 그렇지는 않았다. 제2장 '계몽주의 세계 안에서'에 소개된 독신남 피에트로 베리는 40세 나이로 10대 귀부인인 마달레나 베카리오의 치치스베오가 됐다. 남편인 굴리오 체사레 이심바르디는 아내보다 다섯살 많았다. 40세 된 독신 남성이 10대 아내와 20대 남편의 사이에 끼어들어 삼각관계를 형성했던 것이다.

나이 사십에 어린 부부의 치치스베오가 되다니? 참 할 일 없는 귀족이었구나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피에트로 베리는 밀라노에서 계몽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선구자적 지식인이었다. 오늘날 우리 눈에는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당시 삼각관계에 그만한 지식인이 끼어들었다는 것은 18세기 이탈리아 귀족 사회에서 치치스베오 문화가 자연스럽고 보편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자연스러움이나 보편성은 귀족사회 내부에 국한된 것이다.

치치스베오들은 대체로 미혼이었지만, 전부 다 그렇지는 않았다. 개중엔 유부남도 있었다. 한 여성의 남편이 다른 여성의 치치스베오가 되는 사례들이 있었던 것은 귀족의 숫자가 유한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왕조나 초기 고려왕조에서 근친혼이 성행한 것은, 결혼을 통해 왕실 일원이 되는 사람의 숫자를 규제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권력의 분산을 막기 위한 풍습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제한된 왕족 내에서만 배우자를 찾다보니, 한 사람이 여러 명과 이성관계를 갖는 일이 불가피했다. 18세기 이탈리아에서 귀족 남성 하나가 이 집에서는 정식 남편이 되고 저 집에서는 치치스베오가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문화는 귀족 사회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귀족이 아닌 평민이나 외국인의 눈에는 해괴하게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제3자의 눈에 비친 이 풍습을 보여주고자, 저자는 1765년부터 이듬해까지 이탈리아를 여행한 프랑스 천문학자 제롬 랄랑드의 기행문을 소개했다. 제1장에 인용된 기행문의 한 대목은 이렇다.
 
"로마에서 귀부인은 그녀를 도와주는 종자 혹은 시종기사 없이 사람들 앞에 거의 나서지 않는다. 귀부인은 저마다 자신의 기사를 거느리고 있고, 거의 항상 그들과 함께 연회에 모습을 드러낸다. (···) 시종기사는 아침부터 그녀의 집으로 가서 귀부인을 챙겨야 한다. 그는 귀부인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살롱에서 기다리다가 그녀의 몸치장을 돕고 미사에 데려간다. (···) 저녁이 되면 다시 그녀를 집에 바래다준다."
 
아내의 공식 이성친구

이처럼 귀족 부인의 바깥 활동을 수행하는 게 치치스베오의 공식 임무였지만, 귀족 부인과 치치스베오가 그런 틀을 벗어나 '사적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도 당연히 없지 않았다. 하지만 사적 관계가 치치스베오 문화의 지배적 현상이 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귀족 남편들이 치치스베오 문화를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치치스베오는 아내의 공식 이성친구이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남편의 대리인이었다. 이들은 집 밖에서 남편을 대리해 아내를 감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치치스베오도 그렇고 귀족 부인도 그렇고 서로를 향해 인간 욕망을 그대로 분출할 수는 없었다. 치치스베오는 부인의 옆자리는 몰라도 남편의 '침대'까지 침범해서는 안 되었다.

이처럼 애인으로 만들지 말아야 할 남성과 함께 바깥 활동을 하다보니, 치치스베오가 도리어 족쇄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치치스베오가 남편의 '제3의 눈'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일탈'을 원하는 여성들은 치치스베오가 아닌 또 다른 남성과 은밀한 만남을 갖기도 했다.
 

치치스베오와 동행하는 이탈리아 귀족 부부의 모습. 지오바니 도메니코 티에폴로의 1727년 작품. ⓒ 위키백화

  
이런 특이한 문화가 18세기 이탈리아에 퍼진 데는 새로운 철학사상의 확산이 하나의 원인이 됐다. 이 책은 이를 유럽 근대화에 대한 이탈리아식 대응으로 풀이한다. 계몽주의의 발달에 따라 구습 타파 운동, 요즘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적폐청산 운동이 벌어지던 18세기 유럽의 새로운 풍조에 대한 이탈리아식 대응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계몽주의가 퍼지기 이전에 이탈리아 귀족 여성들은 조선시대 양반가 여성들처럼 외출의 제약을 받았다. 혼자서는 대문을 열고 나서기가 힘들었다. 이러다 보니 여성의 사교 활동도 극도로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구습 타파 운동이 벌어지면서, 더 이상 여성을 집안에만 가둬두기 힘들어졌다. 책 제2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아래 인용문 속의 치치스베이스모(cicisbeismo)는 '치치스베오 관습'이란 의미다.
 
"사교 문화의 틀 안에서, 치치스베이스모의 출현을 가능케 했던 주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귀부인은 혼자 외출할 수 없었다. 이는 사교 문화가 확산되기 이전이나 이후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계몽주의와 함께 사교 문화의 발달은 여성이 사회적 삶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증폭시켰고 (···) 문화적 개화와 예의범절의 발달을 촉진했다."
 
만약 서민의 문화였다면

치치스베오 문화는 더 이상 아내를 집안에 가둬둘 수 없지만 그렇다고 단독 외출을 허용하기도 싫었던 귀족 남성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해서 등장한 현상이다. 귀족 남성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내를 '보호'하는 안전장치였다. 계몽주의 발달에 따라 여성의 사교문화가 확산되는 현상에 맞춰 구(舊)와 신(新)을 절충하는 방법으로 이 문화가 나온 셈이다. 제2장의 또 다른 대목이다.
 
"시종기사는 귀부인을 어떠한 위험이나 타인의 모욕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 그리고 그녀가 남성의 보호망 안에 속해 있음을 물리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사실, 귀부인의 남편은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이처럼 치치스베오 문화는 전통적으로 집안에 갇혀 있던 귀족 여성들이 집 밖으로 나가 사교 활동을 하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남편들을 대신해 귀족 여성들의 '안전'을 담보하고자 귀족 출신인 치치스베오들이 여성의 팔짱을 끼게 됐던 것이다.

귀족 문화는 귀족과 운명을 함께한다.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양반의 권위가 약해지자 양반이 애용하던 한자 문화가 덩달아 약해진 것처럼, 치치스베오 문화 역시 이탈리아 귀족들과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귀족문화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혁명이념이 전파되면서 급격히 와해됐다. 치치스베오 문화 역시 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탈리아도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1796년에서 1814년 사이에 프랑스 군대의 지배를 받았다. 점령군인 프랑스 군대는 혁명이념에 반하는 치치스베오 문화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고 해체를 위해 칼을 들이댔다.

책 제6장에 언급된 것처럼 "나폴레옹 제국에서는 도덕적 청렴함, 결혼 생활에 대한 헌신 등이 핵심 가치로 대두"했다. 새로운 가족 윤리에 대한 이같은 요구가 프랑스 군대의 침입을 계기로 이탈리아에 확산되면서 치치스베오 문화가 공격을 받고 쇠퇴일로에 접어들었다는 게 책의 설명이다.

만약 치치스베오가 일반 서민의 문화였다면, 프랑스 군대에 맞서 훨씬 오랫동안 버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귀족의 문화였기에 이탈리아 평민들이 프랑스 군대에 동조했고, 치치스베오 척결을 위한 문화적 캠페인이 널리 확산될 수 있었다.

치치스베오 문화는 남편의 질투심을 어느 정도는 억제하고 어느 정도는 지지해준 현상이다. 계몽주의와 함께 확산된 18세기판 이탈리아 적폐청산 속에서 등장한 이 귀족문화는 프랑스 군대의 혁명이념 전파와 함께 19세기 초반부터 쇠퇴해지다가 이제는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 - 18세기 이탈리아 귀족 계층의 성과 사랑 그리고 여성

로베르토 비조키 지음, 임동현 옮김,
서해문집, 2018


#치치스베오 #시종기사 #삼각관계 #아내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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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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