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역 앞 광장, 당신이 알아야 할 역사적 사건들

[동작 민주올레⑩]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노량진길③

등록 2018.10.03 12:02수정 2018.10.0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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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4~5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노량진길>이다. - 기자말

'동작 민주올레」' – <노량진길> 3회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동작경찰서 - ⑤컵밥 거리 - ⑥가톨릭노동청년회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전통 노량진 수산시장을 구경하면서 통로를 지나다 왼쪽에 붙어있는 건물 위 옥상으로 올라가면 1호선 노량진역으로 이어지는 육교가 있다. 이 육교를 지나는 중에 서쪽을 바라보면 철길 옆으로 멀리 '별장식당'이 보인다. 볼록한 언덕 위의 저 자리에 조선시대부터 달빛에 부서지는 파도를 구경할 수 있는 '월파정'이 있었다.

③ 노량진역 광장, 독립운동에서 민주화운동까지 '열망' 표출되던 곳

철도시발지(鐵道始發地) 노량진역
  

철도시발지 표석 노량진역이 1899년 경인선이 처음 개통될 때 처음 출발한 역임을 알리는 표석이다. 노량진 역사 안에 설치되어 있어 전철을 타고 노량진역에서 한강쪽으로 가다가 강을 건너기 직전 오른편에 있는 표석을 볼 수 있다. ⓒ 김학규

노량진역은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처음 개통될 당시 출발역이었다. 개통 당시 노량진역에서 제물포역까지의 길이는 33.2.km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노량진 철도 역사 안에는 鐵道始發地(철도시발지) 표석이 서 있다. 鐵道始發地(철도시발지)는 설치 당시(1975년) 총리였던 김종필의 글씨이고, 표석 설치 취지는 친일 문인 서정주가 쓴 글을 새겼다.

노량진역 광장 벽에도 이곳이 '철도시발지'였음을 짐작케 해주기라도 하듯 철도기관차 부품을 활용한 미술 작품이 설치돼 있다. 노량진역은 1900년 한강철교가 완공되면서 경인선 출발역의 지위를 서대문역(현 이화여고 운동장)으로 넘기게 된다.

개통 당시 노량진에서 인천까지 소요시간은 1시간 40분이었으며, 매일 왕복 2회 운행했다. 평균 시속 19.8km이었음에도 당시 조선인에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쌀 한가마니가 4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으니 운임이 상등석이 1원 50전, 중등석이 80전, 하등석이 40전으로 꽤 비싼 편이었다. 그럼에도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 노량진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그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다.

노량진 3.1만세운동

노량진역 앞에는 아담한 광장이 있다.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는 곳이다. 그런데 이 광장은 일제 강점기 이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관련한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노량진 3.1만세운동을 소요사건으로 보도하고 있는 <매일신보>(1919. 3. 25)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처음에는 3.1만세운동 소식을 전하지 않다가 3월 7일부터 '소요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왜곡 보도하기 시작했다. ⓒ 한국언론진흥재단

1919년 일제에 맞선 3.1혁명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지던 무렵, 이곳 노량진에서도 3월 23일 만세 운동이 벌어진다. 노량진 3.1만세운동에 대한 정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는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틀 후인 3월 25일 자 <소요사건의 후보>라는 제목의 기사에 "오후 팔시 반경으로부터 구시경까지 삼백여명의 군중이 모여서 소요를 하얏더라"라고 짤막하게 보도했다.

시위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가까운 영등포역 앞과 당산리(지금의 당산역 주변)에서도 동시에 벌어진다. 세 곳에서 동시에 벌어진 이유는 영등포경찰서의 진압 활동에 차질을 주기 위한 시위 주동자들의 전략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일제가 영등포와 당산리에서는 "주모자를 검속하고 진압"하거나 "군대와 경찰이 협력하여 진압"했지만, 노량진에서는 진압되지도 않았고 연행된 사람도 없었다.

당시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시대일보> 같은 언론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처음 3.1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당연히 외면했던 <매일신보>는 사건이 계속 확산되지 뒤늦게 '소요사건'으로 보도했다. 일제가 만세운동의 규모나 양상을 의도적으로 축소·왜곡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노량진 3.1만세운동의 규모는 <매일신보>의 보도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3.1혁명 100주년에 우리가 기릴 것은 무엇인가 

동작구 사당동에는 삼일공원이 조성돼 있다. 하지만 이 삼일공원은 100년 전의 3.1운동과는 직접 인연이 있는 곳이 아니다. 1967년 여성독립운동가 최은희가 <동아일보>에 "독립공원 설립을 제안한다"는 칼럼을 쓴 게 계기가 됐다. 이에 박정희는 서울에서 땅값이 가장 싼 곳 중 하나였던 사당동에 독립공원 부지를 지정만 하고 예산 지원은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방치되다가 1990년 중앙정부가 아닌 동작구청이 삼일공원으로 뒤늦게 조성했다.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동작구청이 어설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삼일공원에 기울이는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실제 벌어졌던 자랑스러운 역사 '노량진 3.1만세운동'에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해본다.

노량진역 광장에서 만난 경성트로이카의 이관술과 박진홍은

노량진역 광장은 1937년 6월 말 삽을 짊어진 농부로 변장한 경성트로이카의 이관술(1902~1950)과 동지 박진홍(1914~?)이 비밀리에 만난 장소이기도 하다.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에 전시되어 있는 박진홍 독립운동가 박진홍은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에서도 만나볼 수 있으며, 이재유,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박진횽, 이효정 등이 참여한 경성트로이카의 활동은 서대문 형무소 전시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김학규

   
전설적인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이재유(1905~1944)가 일제에 잡히면서 줄곧 수배 생활을 하던 이관술은 경찰의 감시망이 느슨해지자 조직 재건을 결심하고 서울로 잠입해들어와 영등포에 거쳐를 마련하고 활동을 재개한다(경기도 시흥군에 속했던 영등포 일대는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된다, 경성부는 이 지역을 영등포출장소를 설치해 관리했다).

그는 노량진에 살던 안병춘을 통해 독립운동 중 일제에 잡혀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온 지 1개월밖에 되지 않은 박진홍과 연결한다. 동덕여고보 사제지간이기도 한 둘은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오랜 만에 만난 감격을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걸어서 상도리(상도정)를 거쳐 신림에 이르고 다시 번대방리(지금의 신대방동)와 신길리(신길정), 번대방정(현 대방동)을 거쳐 노량진으로 돌아올 때까지 조직재건방침을 비롯한 여러 논의를 거듭한다.
 

이관술 <이관술 1902-1950,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사회평론, 안재성)의 책 표지 ⓒ 사회평론

하지만 이관술의 경성트로이카 조직 재건이라는 야심찬 도전은 또다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노량진에서 박진홍과 헤어진 이관술이 며칠 후 박진홍을 통해 연락한 이복동생 이순금을 여의도에서 만나다가 갑자기 불어난 샛강 때문에 다리를 건너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리면서 극적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때 이관술은 샛강을 헤엄쳐 피신하지만, 이순금은 꼼짝 없이 잡힌 몸이 됐다. 그러면서 이관술이 서울에 잠입한 사실이 일경에 알려지고 말았다. 이관술은 다시 한 번 지방으로 피신해 1년 후 다시 서울에 잠입할 때까지 '고난의 행군'을 거듭해야만 했다.

1985년 2.12총선을 앞둔 대학생들, 노량진서 "민정당 독재 결사반대" 외치다

노량진역 광장 앞에는 2005년까지 노량진역과 건너편을 잇는 육교가 있었다. 독재정권시기 이 육교 위에서도 민주화 시위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철거전의 노량진역 앞 육교 노량진역 앞 육교는 2015년 철거되었다. "35년... 잘 버텨줘서 고마워!"라는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 하지만 노량진역 앞 육교는 35년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 김학규

19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서울 남부지구평의회 소속 대학생들(숭실대, 중앙대, 숙대, 단국대, 서울대 등) 수백 명은 노량진경찰서 인근 민정당 동작구지구당 사무실 앞에서 '민정당 독재 결사반대'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횃불 시위를 벌였다. 당시 민정당 동작구지구당 위원장 허청일은 전두환 민정당 총재의 비서실장이기도 했다.

이 시위로 20명이 연행되고 여러 명이 수배되는 일이 벌어졌다. 수배자 중 한 명인 숭실대생 조혜란은 경찰서가 눈앞에 보이는 노량진 육교 위에서 시위를 벌이다 연행되기도 했다. 이 시위로 조혜란(숭실대), 민경남(숙대), 김덕룡(중앙대), 조항오(단국대) 등 4명이 구속됐다.

이러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전통이 동작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진 탓일까. 2000년대 들어 노량진역 광장은 동작 지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상징성을 갖는 곳으로 발전한다. '미군장갑차에 의한 효순이 미선이 두 여중생 압사 사건'(2002) 때부터 시작해 최근의 '4.16 세월호 참사'(2014),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탄핵 정국'(2016~2017) 등 큼지막한 사회적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촛불집회가 열리는 곳이 바로 노량진역 광장이다.
 

노량진역 광장 촛불집회 장면 2017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전국이 들썩일 때 노량진역 광장에서도 동작지역 시민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여러차례 촛불집회를 가졌다. ⓒ 김학규

 
(* 곧 [동작 민주올레]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⑪<노량진길 4회>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시민기자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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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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