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가는 손주 보며 글썽이는 시어머니... 아 어렵다

[매일 육아하며 배웁니다 13] 며느리에게도 체온계 같은 게 있었으면

등록 2018.10.07 10:53수정 2018.10.0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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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면, 어른들끼리는 경험하기 힘든 낯선 일들을 겪습니다. 오직 육아하는 이때만, 부딪칠 수 있습니다. 애 키우는 동안 나를 흘려보내는 것 같아 좌절감에 글을 씁니다. '너희만 크냐? 엄마도 같이 크자'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성장하기 위해 육아일상 속 메시지를 담아 글을 씁니다.[편집자말]
둘째의 이마를 짚었다. 아리송하다. 열이 있는 것 같았다. 손으로 열을 재도 대부분 아이의 감기를 잡아냈었다. 애 둘 엄마인 나의 손바닥 체온계는 믿을 만했다.

"여보, 둘째 열나는 것 같아."


남편도 짚어보더니, 등까지 뜨끈하다며 확신했다. 하지만 때는 한가위. 의사를 만나려면 대학 병원 소아 응급센터로 가야 했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 일단 지켜보자며 의견을 모았다. 무엇보다 이 장난꾸러기가 보채지 않고 꺅꺅대며 잘 놀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제수음식을 하고 돌아오신 시어머니께서 둘째와 놀아주셨다.

"아이고, 열이 좀 나네?"

지체할 수 없었다. 재빨리 병원으로 향했다.

결과는? 37.1˚C. 축 늘어진 아이들이 가느다란 팔다리에 링거액을 꽂고 부모 품에 안겨 있는 응급실 속에서 우리 부부는 민망한 웃음만 지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접수를 취소해주셨다. 다시 20분을 달려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체온계의 중요성
 

밤 9시, 응급실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 ⓒ 최다혜

 
이 모든 일은 체온계의 '렌즈 필터'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었다. 시댁인 울산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 열 잰다고 고막 체온계를 꺼냈었다. 체온계는 둘째가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이다. 귀에 대고 놀길래 두었더니, 안 보는 틈에 체온계의 플라스틱 렌즈 필터를 빼서 신나게 잇몸으로 씹어대고 있었다. 명절 기간 꼼짝없이 체온계를 못 쓰게 된 거다.

- 37.5˚C 이하. 초록색. 정상 체온.
- 37.6˚C~38.5˚C. 노란색. 미열.
- 38.6˚C 이상. 빨간색. 고열.


우리 집 체온계의 '열 구간'은 편리했다. 측정 결과대로 따른다면 망설일 필요 없었다. 그런데 체온계를 쓸 수 없으니 막막했다. 오로지 상황과 경험에 의존해 병원에 갈지 말지, 미열인지 고열인지를 결정해야 하니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나의 감으로 아이의 고열 여부를 판단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브라운 체온계와 렌즈필터 ⓒ 최다혜


스스로 판단하기 어렵고 힘든 건 며느리 역할도 마찬가지다. 체온계의 '열 구간'처럼 며느리로서의 적정선을 알려주는 기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부장제 사회처럼 가사노동에만 충실한 며느리가 되자니 자존감이 바닥나고, 한 번도 보고 배워본 적이 없는 평등한 며느리 역할을 해보자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족 간 역할 균등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이 첫 명절을 맞았을 땐 무조건 열심히 했다. 착한 며느리이고 싶었다. 누구나 다 엄지 척, 해주는 그런 며느리. 얼마만큼 애쓰면 괜찮은 건지 모르니 일단 '제가 할게요~'부터 시작했다.

사실은 일 잘해서 칭찬받는 며느리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동등한 가족 구성원인 며느리이고 싶었다. 하지만 친정엄마를 비롯해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며느리들은 항상 시어머니와 밥을 차리고, 과일을 깎고, 커피를 탔다. 여성들의 노동으로 가족들이 안락을 누려오던 모습만 봐왔기에 평등한 며느리가 되려면 어떤 행동해야 하는지 몰랐다.

정확한 지침은 없지만, 상황과 경험에 의존해 적절한 가족 역할을 수행하기로 했다. 일단 음식 할 때는 어머님 옆에서 거들었다. 설거지를 남편이나 시누이와 같이하고, 내가 잤던 이부자리 정리를 했다. 고생하셨을 어머님, 아버님을 위해 나가서 밥 한 끼 사드렸다. 명절음식 준비로 바쁘신 어머님을 위해 멍게 비빔밥과 떡볶이, 치킨으로 저녁 준비를 해뒀다.

시누는 프렌치토스트와 바나나를 예쁘게 잘라 점심 한 끼를 차려줬다. 산소에 다녀와서는 아버님께서 꽃게 라면을 끓이셨다. 다 같이 고구마 줄기를 둘러앉아 벗기고, 아버님께선 저녁과 아침 설거지를 하셨다. 시낭송을 준비하는 어머님 옆에서 함께 책을 읽고, 아버님께서 아이들 데리고 고양이 보러 가시면 커피를 마셨다.

시부모님의 마음을 미처 생각 못 했다

대가족이 모이니, 일손도 많고 서로 거들 수 있었다. 함께 돕는 명절이 아직 어색해 몸이 베베 꼬인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가부장적 명절이 더 익숙하기에 몸이 반응해버린다. 아버님께서 설거지를 하실 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기 죄송했다.

그래도 한편, 명절을 여성들의 노동으로 겨우겨우 이어간다면, 다음 해 명절도 즐거운 마음으로 만날 수 없을 터였다. 내 역할을 충분히 하되, 남편이나 아버님께서 주방으로 가실 때는 굳이 '제가 하겠습니다!'를 외치지 않았다. 물론 앉아서 지켜보는 마음도 편치 않다.
 

시누이가 구워준 프렌치토스트와 곱게 장식한 바나나 ⓒ 최다혜

 
엄마의 손바닥 체온계는 정확하지 않은 건 물론이고 때로는 불안한 마음까지 덮쳐 멀쩡한 아이를 '급성 고열'로 진단해버린다. 며느리 역할도 마찬가지다. 결혼 5년차지만 여전히 어렵다. 어느 정도가 중도인지, 어떻게 해야 평등한 며느리로서 현명하게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일단 해보자며 손바닥 체온계처럼 성급히 판단해 행동하면 '삑!' 하고 오진이 날 수도 있다.

명절 다음 날 아침. 연휴를 이틀 남기고, 머릿속에는 온통 조카, 언니, 형부 생각밖에 없었다. 둘 다 다른 집안의 며느리가 된 언니와 나는 명절 끄트머리에나 잠깐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각자 아이들 키우느라 명절처럼 특별한 행사 아니면 만나기도 어려웠다. 어서 조카와 언니 부부를 만나고 싶었다.

짐을 싣고, 서둘러 씻고, 밥도 허겁지겁 먹고... 정신없이 준비하다 문득 어머님 얼굴을 보니 아들 가족을 더 보고 싶어 하시는 마음이 가득했다. 며느리 마음 모르시지 않으니 더 붙잡지는 않으셨다. 애써 외면하며 꾸역꾸역 현관 밖을 나서니 어머님 눈에 눈물이 맺히셨다. 손주와 자식들 보내는 부모 마음을 미처 생각 못 했다. 삑, 오진! 좀 천천히 준비할걸.

다음번에 가족들을 만날 때는 서로가 덜 아쉬울 수 있을까. 아마도 경험이 더 쌓였으니,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과 추억을 쌓으며 적정선을 알아가는 게 지름길이 아닐까.

7번 국도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이만하면 잘했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노동의 균형점을 고민한다.
 

집으로 가는 7번 국도 길. ⓒ 최다혜

#며느리 #양성평등 #평등한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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