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가 '금강저를 든 사나이' 보고 놀란 이유

〔서평〕 <신화 거꾸로 읽기>

등록 2018.10.05 21:48수정 2018.10.05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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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따위의 금기는 제대로 지켜지는 법이 없다. 마치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금기는 깨지고 그로 인해 영웅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 중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는 대표적인 예다. 신과 영웅들이 펼치는 서사적 구조로 신화를 전하고 있는 <일리아스>는 잘 알려진 트로이 전쟁 이야기다. 호메로스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트로이 목마와 아킬레스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호메로스는 트로이 전쟁을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의 금지된 사랑이 원인이라고 했다. 트로이 전쟁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통합하고자 했던 아가멤논 왕의 의도된 전쟁이었는지 아닌지는 호메로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금기에 도전하는 인간의 욕망, 의지, 사랑과 질투를 통해 신화를 인간의 이야기로 가져왔다. 


호메로스는 이미 기원전 8세기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헤시오도스는 기원전 7세기에 <신통기>를 써서 그리스 신화를 문학으로 가져왔다. 그들의 뒤를 이어 많은 역사가와 문학, 예술가들이 신화를 다듬으며 체계를 세웠고, 문화 속에 담아냈다. 그렇게 그리스 신화는 서양 문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살펴야 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신화는 잊히고 퇴색되어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구전을 통해 전해지던 그리스 로마 신화가 책갈피를 넘어 그림과 조각, 건축물에 존재를 드러내는 일은 예사였다. 그 신화가 오늘날에는 많은 영화의 모티브가 되고 있다. 잘 알려진 영화 <트로이>에서 브래드 피트는 반신반인인 아킬레스를 맡아 열연했고 호평을 받았다.

이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는 현실 속에서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쯤 되면 영화와 문학, 예술 작품 등에 녹아든 신화는 그야말로 불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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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신화 거꾸로 읽기 이윤기 저, 작가정신 출판 ⓒ 작가정신

런 신화에 천착했던 작가가 있다. 동인문학상과 대산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소설가로 역량을 인정받았지만, 번역가로 더 잘 알려진 이윤기다.

<그리스 로마 신화>,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 등을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 땅 독자들에게 소개했던 이윤기는 <신화 거꾸로 읽기>를 통해 이 시대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문화 현상들에서 신화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 의미를 역추적했다. 

<이윤기 신화 거꾸로 읽기>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남겨놓은 유산을 문화적 상징물에서 찾아냈다. 그를 통해 신화가 현대 문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습을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이윤기는 박물관, 의회 건물, 군의관 계급장, 심지어 서울에 있는 백화점 건물과 금강역사가 사자 가죽을 쓴 모습에서마저 그리스 로마 신화가 남겨놓은 유산이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  


신화의 눈으로 문화를 살피는 이윤기의 관찰력은 예리하다. 그는 대영 박물관에서 간다라 시대의 돋을새김 '금강저를 든 사나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부처님의 보디가드인 금강역사가 손에는 제우스의 벼락을 들고, 머리에는 헤라클레스의 사자 가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강역사와 그리스 신화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간다라 문화는 알렉산드로스가 인도를 정복하고 확립한 그리스풍 문화다. 이 지역에서 발달한 간다라 미술은 뭘 그리거나 새기기를 좋아하는 그리스 로마풍의 불교 미술이다. 간다라 사람들은 부처님의 보디가드에게 막강한 무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벼락의 신 제우스와 인간의 피가 섞인 영웅 중에서 가장 강력한 헤라클레스를 떠올렸다. 그야말로 동서의 조합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불상도 그리스의 신상과 연관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이 나올법하다. 이윤기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간다라 미술의 꽃이라고 하는 간다라 불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석굴암의 아미타불상이 '그리스 신상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간다라 불상의 특징은 부처님의 눈언저리가 깊고, 콧날이 우뚝한 데다 입술선이 선명해서 흡사 서양 사람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117쪽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그리스 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지나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역사 지식은 새로운 발견으로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윤기의 주장을 지나치다 할 수 없다. 

<이윤기 신화 거꾸로 읽기>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어느 나라든 신화를 갖고 있다. 그 많은 신화 중에 유독 그리스 로마 신화가 대중문화 속에서 인기를 얻는 이유가 뭘까? 그리스 로마 신화가 타 지역에 비해 탁월한 영감을 주는 기제가 있어서 그랬을까?

고대 그리스는 유럽 최고 문명을 자랑했다.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는 그리스 신화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문화로 삼았다. 결국 그리스 로마 신화가 유럽 미술과 건축, 문화를 이해하는 필수 요소로 성장하는 데에는 로마 제국의 힘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윤기의 진단은 정확하다. 
"문화적 기반이 약했던 로마가 그리스 신화 체계를 수입,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럽 진출과 함께 유럽 전역에 광범위하게 유포했기 때문입니다." -188쪽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바르바로스'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군지렁군지렁거리는 녀석'이라는 뜻이다. 야만인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여기에서 유래했다. 그리스어를 못하면 야만인이라는 문화적 오만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그들이 그토록 오만할 수 있었던 것은 신화를 인간의 이야기로 녹여냈던 문화적 우월감 덕분이었다. 기껏해야 강, 산, 특정 지역 등에 이름으로 남아 있는 신화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문화'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실체가 그들을 오만하게 했다. 문화를 혼자 소유했다고 믿는 자들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이윤기는 신화를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인류의 어린 시절 이야기 같은 거라고 했다. 이러한 진단이 중요한 이유는 여러 문화 현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종교'라는 이름의 강과 '신화'라는 이름의 발원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시대 문화는 신화에 빚지고 있다 하겠다. 
"어린이들에게 신화를 읽은 일은 사진 찍듯이 인류의 어린 시절을 찍어버리는 일, 어른에게 신화를 읽는 것은 '이야기의 어린이'를 통해 인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398쪽 

오늘날 많은 신화들은 옛날이야기로 치부되며 무시되지만, 어떤 곳에서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거나 종교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반면 그리스 로마 신화는 신화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놓고 따지지 않는다. 문화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림이나 조각, 구조물은 그리스 로마 신들과 영웅들이 이 시대를 사는 새로운 방법이다.

그래서 이윤기는 '신화는 문화를 보이게 한다'고 했다. 이윤기가 <신화 거꾸로 읽기>를 시도한 이유는 문화를 살찌우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는 우리 문화 속에도 의미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추적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음을 살피려 했음이 분명하다. 

이윤기 신화 거꾸로 읽기 -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지음,
작가정신, 2018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 #트로이 전쟁 #호메로스 #금강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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