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힘, 파리를 살린 결정적 요인

[아빠와 함께 쓰는 파리여행기 22] 예술의 결정체, 오페라 가르니에

등록 2018.10.14 14:55수정 2018.10.1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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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된 오페라 가르니에

'오페라'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가니 거대한 웨딩 케이크를 연상시키는 오페라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상부엔 '국립음악아카데미(Académie Nationale de Musique)'란 황금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정식 명칭은 가르니에궁(Palais Garnier)이고 통칭은 오페라 가르니에(Opéra Garnier)다.


정문 계단에선 시민이나 관광객들이 햇볕을 쬐며 오페라광장(Place de l'Opéra)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 아빠와 함께 그 계단에 잠시 앉아 보았다.
 
"저기 오른쪽에 보이는 저 녹색 차양의 카페 말이다."


아빠가 가리키시는 오른쪽 건물을 보니 녹색 차양이 쳐진 가게의 2층과 3층 사이의 벽에 '카페 드 라 페(CAFÉ DE LA PAIX)'라는 글자가 보였다. 굳이 번역한다면 '평화다방'이다.
  

중앙의 오페라 가르니에 왼쪽 건물의 녹색 차양이 쳐진 자리가 카페 드라페다. ⓒ 강재인


오페라 구경을 마친 정치인이나 귀족들이 들리던 카페였는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엔 모파상, 에밀 졸라,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 등 프랑스 문인들이 자주 들려 오페라를 비평하고 글을 쓰던 곳이었다고 한다.

아빠와 나는 계단에서 일어나 건물 뒤쪽으로 갔다. 상당히 많은 관람객이 입장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우리는 여행 전에 온라인으로 예매해둔 표가 있어 줄을 서지 않고 그대로 입장할 수 있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의 배경지로 알려진 건물 내부는 화려했다. 인상적인 부분은 높이 30미터의 천장까지 뚫려 있는 현관홀과 뮤지컬 영화에 등장하는 좌우대칭의 대계단(Le grand escalier)이었다. 층계는 대리석이고 난간은 줄마노다.
  

화려한 중앙 대계단 ⓒ 강재인

   
극장 무대와 객석도 화려했지만 무엇보다 천장에 그린 샤갈의 그림이 일품이었다. 턱 하니 객석에 앉아 오페라를 감상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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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천장화가 인상적인 오페라 극장 ⓒ 강재인

  
하지만 공연 전이나 휴식시간에 샴페인 같은 것을 마시며 관람객들 사이에 친교를 나누던 대휴게실(Le grand foyer)에 들릴 수 있어 좋았다. 파리 패션위크 기간에 유명 브랜드의 패션쇼가 열리기도 하는 이곳의 천장과 벽은 폴 보드리의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고, 화려한 샹들리에와 황금 칠을 한 실내장식은 보는 이의 눈을 황홀케 한다.
 

벽과 천장이 그림과 샹들리에로 장식된 화려한 모습의 대휴게실 ⓒ 강재인

   
그러나 이날 아빠를 감탄시킨 것은 대계단도 대휴게실도 아니었다. 대휴게실 끝에 발코니로 나가는 문이 있었는데, 그리로 나가신 아빠가 잠시 후 돌아와 내게 손짓하셨다. 따라 나가니 발코니의 기둥 사이로 오페라광장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광장을 중심으로 일정한 높이의 건물들이 기하학적으로 죽 늘어선 파리 시가지의 모습.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오페라 가르니에의 발코니에서 바라본 파리 시가지의 모습 ⓒ 강재인

   
"압권이다!"


아빠가 외치셨다.


그 뒤 나는 아빠를 모시고 부근의 라파예트백화점(Galeries Lafayette)으로 갔다. 거기서 화장품 같은 것을 고르는 동안 아빠는 중앙에서 천장까지 무슨 원형 경기장처럼 구성된 백화점 내부의 화려한 모습을 구경하고 계셨다. 이 백화점 또한 19세기 말의 건축물이다.

"파리는 백화점도 예술품이로구나."

그렇게 말씀하시는 아빠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만 할 수 없어 쇼핑을 대충 끝낸 뒤 옥상정원으로 올라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올라와 파리 시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물들의 높이가 일정했다.

"저 건물들의 높이를 법으로 통제한다면서요?"
"그래, 상한선이 대략 20미터 정도라더라."
"왜 제한을 둔 거예요? 도시 미관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통일성을 주는 게 아름답다는 프랑스인의 인식 때문이었을까요?"
"둘 다 가능하지. 어느 경우든 도시 정비의 기준을 아름다움에 두었다는 것 자체는 평가할 만해. 그러나 실제 이유는 엘리베이터 보급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던 탓이 아닐까? 걸어 올라가는데 큰 무리 없는 높이가 20미터 정도이거든."
 

바람이 불어 옥상은 좀 쌀쌀한 편이었다.

"그만 내려가시겠어요?"

[아빠의 이야기] 서구 예술가들에게 '마음의 수도'였던 파리

오페라광장으로 다시 돌아온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광장에 면해 있는 카페 드 라 페에 들렸다. 웨이터에게 '연어 스테이크 구이(Pavé de saumon grillé)'를 주문한 뒤 와인 글래스를 들자 딸도 잔을 들어 쨍하는 소리를 냈다. 테라스의 노천 테이블에서는 딸이 웨딩케이크를 연상시킨다고 한 객석 1900석의 오페라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건물 위쪽에 새겨진 저 황금글자 말이다."
"Académie Nationale de Musique(국립음악아카데미)요?"
"그래. 파리국립오페라(Opéra National de Paris)의 극단 이름인데 시대에 따라 명칭이 바뀌었다. 그 바뀐 이름만 훑어보아도 프랑스 근대사가 혁명과 반동의 되풀이였던 것을 실감할 수가 있어."

             

파리국립오페라 극단명 변화 ⓒ 강재인

 
"정말 왕정, 공화정, 제정(帝政), 공화정, 제정, 공화정으로 점철되었네요. 저 건물이 세워진 건 언제였어요?"


완공은 제3공화국 때인 1875년이지만 착공은 나폴레옹 3세 때인 1861년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가 오페라 전용극장을 새로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1858년이었다. 그해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들이 터뜨린 위장 폭탄사건에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좁은 골목이 아니라 탁 트인 넓은 장소에 건립할 오페라 전용극장의 설계도를 공모했다. 이에 응모한 설계가는 모두 171명이었는데, 1∼2차 심사를 거쳐 만장일치로 채택된 것은 35세의 젊은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의 작품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가르니에가 공식 프레젠테이션을 하던 날, 내적으론 황실 건축가 비올레 르 뒤크를 지지하던 황후가 가르니에를 향해 "그게 대체 무슨 양식이오? 그리스 양식도 아니고 루이 15세나 루이 16세 양식도 아닌 것이" 하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가르니에는 "이건 나폴레옹 3세 양식인데 황후께옵서 불평을 하시다니요!"하고 응수했다. 이에 흐뭇해진 나폴레옹 3세는 가르니에를 불러 귓속말로 "걱정하지 말게나. 사실 저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네" 하고 속삭였다고 한다.

특권과 정실이 판치던 왕조 시대에 설계도를 공모했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다. 황후의 지지를 받던 건축가를 제치고 일개 무명 건축가의 설계도가 채택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진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는 얘기다. 완공되자 오페라 가르니에 건축물의 영향력은 과연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오페라 가르니에를 모방한 대표적 건축물은 워싱턴에 있는 미국의회도서관의 토머스 제퍼슨 빌딩(1897)이다. 폴란드에서는 율리우스 슬로바키극장(1893), 바르샤바 필하모닉 공연장(1901), 우크라이나에서는 리비우 오페라극장(1900), 키예프 오페라극장(1901), 브라질에서는 아마조나스극장(1896), 리우데자네이루시립극장(1909), 베트남에서는 하노이 오페라극장(1911) 등이 모두 오페라 가르니에를 흉내 낸 건축물이다.

"오페라 가르니에도 그렇지만 오늘 둘러본 개선문과 샹젤리제도 모두 만만치 않은 문화유산이던데요. 심지언 라파예트 백화점까지. 파리는 정말 역사와 기억의 공간 같아요."
"유산이 많다는 것뿐 아니라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니? 아까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파리 시가지의 아름다움! 어디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넌 그 이유가 뭐라 생각되느냐?"

"예술성?"
"통일성이나 다양성, 또는 조화로움을 말하는 사람도 있더라. 분명 그런 면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네가 지적한 예술성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아름다움은 힘이거든."
"아름다움이 힘이라고요?"
 

그렇다. 역사상 파리는 여러 번 외침을 당했다. 나폴레옹 때는 유럽동맹군에 점령당했고, 보불전쟁 때는 프로이센군에 점령당했으며, 2차대전 때는 독일군에 점령당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파리는 기념사진 같은 것이라도 찍어 추억을 간직하고 싶은 곳이지 전쟁도구로 파괴하고 싶은 도시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파리의 아름다움이 파괴를 막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얘기고, 그게 바로 아름다움의 힘이라고 하자 딸이 눈빛을 빛냈다.

서양사를 보면 처음엔 그리스이고 다음은 로마제국이다. 그다음은 두각을 나타내는 나라가 별로 없다가 13세기경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가 유럽의 권력 발전소 노릇을 한다. 그 영향력을 사실상 프랑스로 옮겨오기 시작한 것이 17세기의 루이 14세였다. 그와 동시에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열었던 이탈리아로부터 문화의 주도권을 가져온다.

이후 프랑스가 유럽의 모든 문화·예술·요리·패션·라이프스타일·에티켓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다는 말을 해주고 나서 "이 말은 전에도 한 번 했지?"하고 덧붙였더니 딸이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팍스 브리태니커의 영국도 있었잖아요?"
"있었지. 하지만 영국은 섬나라다. 젊었을 때 런던에 가본 일이 있는데 파리에 비하면 어쩐지 시골 같은 느낌이었다."
"미국은요?"


미국은 힘이 있지만 역사가 없다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로마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처럼 미국은 유럽 문화를 끌어들였다. 그 결과 미국 상류층은 유럽식으로 먹고 유럽식으로 입고 유럽식으로 생활했는데 그 유럽식 모델의 상당 부분이 사실은 파리였던 셈이라고 하자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뉴욕 맨해튼의 오래된 아파트들을 보면 파리 아파트와 비슷해요."
"그렇지? 생각해봐라. 헤밍웨이 등 잃어버린 세대가 왜 파리에 와서 살았는가를. 한두 명이 아니었잖아? 그들에겐 '도시의 원점'인 파리가 마음의 수도였던 거야. 미국의 작가나 예술가들에겐 파리의 도회문명적 감성이 필요했던 거지. 그런데 그게 미국인만 그랬겠어? 스페인, 이태리, 폴란드, 벨기에,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아일랜드 예술가와 작가들도 다 비슷했단다. 그래서 문화의 수도인 파리로 몰려들었던 거야."

  

오페라광장의 어둠은 한층 짙어졌지만 조명을 받은 오페라 가르니에는 오히려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 wiki commons

 
유서 깊은 카페 드 라 페의 노천 테이블에서 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어둠은 짙어졌지만 조명을 받은 오페라 가르니에는 오히려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페라 가르니에 #파리국립오페라 #파리국립음악아카데미 #파리여행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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