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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주연을 카메오로 만들었는데... 왜 흥미로울까

[담론으로 보는 영화] 애니메이션 <리즈와 파랑새>

18.10.11 10:29최종업데이트18.10.1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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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려라 유포니엄, 흩날려라 플루트

<리즈와 파랑새>(10월 9일 개봉)를 보는 사람은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인데, 하나는 <목소리의 형태>를 통해 그녀의 팬이 된 사람들이고, 둘은 <울려라 유포니엄!>이라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보았던 사람들이다. 물론 둘 다인 사람들도 있겠지만, TV 애니메이션의 극장판으로 기획된 이 영화에서 원작의 이름이 지워진 것을 떠올려 본다면 아마도 전자를 노린 듯하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울려라 유포니엄!>이라는 원작을 관객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으므로,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우연히 선택하게 된다면 아마 감독의 이름에 이끌릴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원작의 색채를 귀띔해 주지 않는 것은 야마다 나오코라는 사람을 굳게 믿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영화는 딱히 원작을 몰라도 재밌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독립적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그런 부분에서 야마다 나오코의 강점이 잘 드러난다. 잠시 사족을 더하자면 엄밀하게 말해 'TV 애니메이션'에서 새로이 창조해 낸 극장판은 '원작'을 몰라도 재밌게 볼 수 있는 게 마땅한 일이고, 우리가 아는 숱한 영화들도 사실은 소설 원작이 많다는 걸 떠올려 보면 더더욱 그렇다. 어쩌면 원작의 이름세에 의존하는 게 비겁한 일(상업적으로는 몰라도…)이기에 이 영화에 <유포니엄!>의 이름을 차용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엄밀하게 원작 소설과 원작 애니메이션(소설 기반의 TV 판을 지칭함)의 팬들이 즐길 수 있는 부분을 많이 남겨두었기에, 영화를 먼저 관람하고 후속으로 그것들을 보아도 즐거워질 수가 있다.  

다시금 야마다 나오코의 강점 이야기로 되돌아오자. 팬들이 즐길 수 있는 부분을 많이 남겨두었다는 것, 또한 원작을 보지 않은 '입문자'들에게 원작으로 향하는 호기심을 만들어 준다는 점이 그녀의 강점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녀가 작품에 보내는 시선과 깊은 연관이 있다. 야마다 나오코는 그 누구보다도 작품 속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하는 감독이다. 일반적으로 감독들이 작품 속 캐릭터를 자신의 피조물로 생각하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과는 다르게, 그녀는 늘 작품 속 캐릭터를 자신에 대입하곤 한다. 이는 아마도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인데, 그녀가 맡는 작품이 주로 다른 이로부터 만들어진 창작품이라는 점과,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이다. 
 

영화 <리즈와 파랑새>의 작품 포스터 ⓒ 디스테이션

  
그녀의 창작품이 아니다

그녀가 맡은 작품들은 그녀의 창작품이 아니다. 이는 애니메이션 산업의 구조 탓인데, 외부로부터 하청받은 작품을 진행하는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고유한 특성 때문이다. 잘 나가는 소설을 바탕으로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지는 이 작품들은 명백하게 외부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어느 정도의 지위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그전까지는 이 하청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곤 사토시나 유아사 마사아키는 자신이 직접 작품을 만드는 진정한 감독이기는 하나, 오히려 TV 애니메이션 스태프로 출발해 영화 감독에 막 뛰어든 그녀의 위치야말로 정말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다른 이의 상상을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변화시키는지에 관해서 그녀의 행보는 정말로 주목할 만하다. 

아마도, 타인의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녀는 작품 속에 이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변화라는 단어보단 '소화'라는 단어가 맞는 듯한데, 그녀는 인물을 아예 바꾸지 않고 고개만 돌리는 식으로 늘 새로운 구도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여성이라는 것이 사람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이 될 수는 없지만, 여성이야말로 여성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말에는 누구나 동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맡은 작품들이 주로 여성 출연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이 남성 시청자층에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을 다시금 여성의 시선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점에서, 그녀가 작품을 소화하는 방식은 무척 탁월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남성의 시선에 의해 타자화된 소녀들의 모습들, 그게 설사 '대상화'라는 기겁할 만한 것일지라도, 그녀의 시선에 의해 여성으로서의 자리를 되찾는 모습에 늘 경탄을 보내고는 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 작품 속에서 여성에 대해 어떤 성격을 규정했다 하더라도, 설사 그것이 여성성에 관한 고정관념일지라도, 여성의 시선으로서 캐릭터를 다시금 재해석하는 모습에는 늘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러한 부분으로 그녀가 여성성에 관한 어떤 편협함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게, 그녀는 그저 '여성인 자신의 성격'을 그곳에 투영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녀가 작품 속에서 묘사하는 인물의 성격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야마다 나오코'라는 사람이 가진 본연의 매력을 투영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그녀의 영화 속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늘 섬세하고, 그렇기에 그만큼 교차하기가 쉬운 엇갈린 감정들이 나타난다. 아마도 남자 스태프들의 시선이라고 할 만한, 또는 남자 시청자들의 시선이라고 할 만한 굵직한 성격들을 가진 인물들이 작품 속에서 명확한 성격들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그 굵은 성격들이 교차하는 모습이 확실히 보이는 것과는 정 반대다. 쉽게 말해 섬세하다는 것은 섬세해서 서로를 잘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너무 섬세하기에 서로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모른다는 점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마치 바늘에 실을 꽂기가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영화 <리즈와 파랑새>의 한 장면 ⓒ 디스테이션

  
클리셰 비틀기 

야마다 나오코라는 사람이 보여주는 이러한 인물 성격의 변화는 원작 팬들에게 흥미롭게 다가온다. 원작의 방향성이 거대한 흐름의 어떤 메시지를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영화에서는 무엇을 보여줄지 그녀가 고민할 결과는 그 흐름을 이루는 어떤 물결을 무대 위에서 집중 조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리즈와 파랑새>는 <울려라 유포니엄!>이라는 육십여 명의 취주악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원작에서 관계의 곁가지로 등장했던 이들의 모습을 새로이 찾아낸다. 말하자면 원작의 이야기를 누군가의 시선으로 리플레이하는 것, 우리가 작품이 말하는 메시지를 느꼈다고 생각했던 그 시선을 뒤로 돌려서 그 생각의 편협함에 물꼬를 틀어준다는 점이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 우리이지만 때때로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의 모습이 되는 것을 상상해 볼 때가 있는 만큼, 이 작품도 그런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원작의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중심인물들이 단 한 번 카메오 출연하는 것에 불과한 이 작품은, '취주악'이라는 거대한 흐름과는 달리 '오보에'와 '플루트'라는 별개 구성원의 시선을 따라간다. 노조미(토야마 나오 분)와 미조레(타네자키 아츠미 분)라는 두 소꿉친구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의 선율이 원작의 흐름과는 다르게 표현된다. 원작에서 합주 속의 누군가로 묘사되는 이들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게 되는 이 영화는 마치 멀리서 합주 장면을 보여주다가 갑작스레 연주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때 합주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 취주악부를 우리에게 와 닿는 어감으로 번안하자면 아마도 오케스트라쯤이 될 것인데 이 오케스트라는 수도 없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 종합 예술이다. 그리고 우리가 티브이에서 어쩌다 한 번 보았던 이 오케스트라들은 그 개인들이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로 작게 표시된다. 이것을 단어 하나로 축약해보면 오케스트라가 여러 악기가 모여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 낸다는 '합주'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오케스트라는 개인의 존재감이 희미해져서 그 속에 잘 녹아들어야만 비로소 아름다워진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오케스트라는 개인의 존재감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두가 공명하는 이 선율에서 누구라도 어긋나게 되면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합주는 모두의 감정을 하나로 모으는 공동체, 그러나 그것이 어긋나면 곧바로 티가 나는 독립성을 띠고 있다. 

원작을 보지 않았든, 보았든 간에 우리가 이 작품들 <유포니엄!> 그리고 <리즈와 파랑새>에서 떠올리는 것은 합주 장면에서 인물 별개의 감정이 무엇일지를 고민해 본다는 점이다. 전국 대회를 목표로 하는 이들에게는 실력의 유무로 출전권이 결정되는 나름의 경쟁 사회가 있고, 그 속에서 실패를 맛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분량상 어쩔 수 없이 생략된다. 아주 단편적인 쇼트로 눈물만이 표현되는 그들의 얼굴, 그리고 합주가 끝난 후 카메라는 주인공과 친구들을 보여주는데 그 뒤편에는 어느 또 다른 친구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실 취주악부가 육십 여 명인만큼 그 속에는 다양한 인간관계가 있을 것임에도 우리는 이 카메라가 보여주는 장면만을 본다는 것에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주인공이 왜 주인공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카메라가 본다는 것'에 토를 달 수는 없지만, <리즈와 파랑새>에서 야마다 나오코가 하는 것은 카메라 밖에서 스쳐 지나가듯 언급되었던 친구들의 슬픈 눈물이다. 카메라를 우리의 눈으로 빗댄다면, 우리가 살아가며 떠나보내는 거리의 많은 사람들의 표정 속에 어떤 감정이 숨겨져 있는지를 그녀는 몹시 궁금해한다. 작품 속에서의 합주가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롱쇼트라면,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인물 별개를 세심히 들여다보는 미디움 쇼트 혹은 클로즈업이라기보다는, 주로 대화 장면에서 응용되는 리버스 쇼트이다. 
 

영화 <리즈와 파랑새>의 한 장면 ⓒ 디스테이션

  
리버스 쇼트

작품 속 그녀가 상대방을 바라보면 다음 장면은 아마도 상대방이 그녀를 바라보는 리버스 쇼트이다. 주로 인물의 대화장면에서 어깨에 걸쳐 사용되는 이 리버스 쇼트의 존재는 유성 영화가 낳은 산물 중 하나이다. 유성 영화가 소리를 도입함으로써 자막을 인물의 입에 부여했고, 그 자막이 바로 인물 간의 대화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지만 야마다 나오코가 주로 다루는 소리의 메타포는 그런 대화 형식을 무색하게 만든다. <목소리의 형태>에서 소리를 잃어버린, 소통을 잃어버린 두 친구가 택한 것은 얼굴이 아니라 손끝에서 벌어지는 대화였고, <극장판 케이온!>에서는 입에 차를 머금은 채로 다시 말해 발화를 포기하고 기타 연주로 마음을 전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정리하자면 야마다 나오코가 의도했던 아니던 간에 그녀의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소통하고 있고, 그건 마치 그녀의 영화가 무성영화라는 신체의 미학 속으로 관객을 유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다. 

무성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리버스 쇼트가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무성영화에는 쇼트 자체를 대화한다고 여기게 하는 형식적인 틀이 없다. 그래서 무성영화는 신체의 미학이라 불리는데,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과 같은 인물의 영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들의 몸짓이 자칫하면 우스꽝스러워 보일지는 몰라도 사실은 그 손끝과 발끝에서 연기자의 감정이 잘 묻어나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무성영화는 '발레'라는 고고함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그 발레라는 것은 손을 뻗고 다리를 내밀어 신체의 굴곡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는 예술이고, 마찬가지로 무성영화란 것이 바로 그러하다. 

무성영화가 한 편의 발레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자체로 영화가 왜 예술이라 불리는지를 말해주는데, 이와의 슌지의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을 볼 수 있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는 소리를 제거하고 보아도 그 자체로 하나의 감정이 잘 전달된다. 실제로 발레를 다루는 작품이 있는데, 바로 <하나와 앨리스>이다. 이 작품에서 두 여고생은 투닥거리기도 하고 히히덕거리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서로 발레를 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두 사람이 뛰어노는 장면에서는 고등학생 시절의 풋풋함이 은은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미소를 짓게 한다. 이와이 슌지는 놀랍게도 남성으로서 그런 여고생의 풋풋함을 그려내던 것이었고, 야마다 나오코는 '그런 여고생'이 아니라 그냥 '학생'이 품는 그 감정을 발레의 형식을 빌려 공공연하게 표현해낸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뒷모습을 비추어 내던 카메라가 보여주어야 할 곳은 아무래도 얼굴이다. 입에서 발화가 시작되는 만큼 대화 장면은 얼굴을 중심으로 신체를 미들 숏으로 잡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 야마다 나오코의 작품에서는 인물이 대화하던 중에, 대화의 중심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타이밍에는 마치 부끄럽다는 듯이 카메라가 무릎 아래로 시선을 내려버린다. 어쩌면 우리가 친구와 대화하다가 차마 얼굴을 보지 못할 말들을 할 때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처럼, 쑥스러움이거나 부끄러움이거나 미안함이거나 자괴감이거나 하는 감정을 따라 길 가는 두 사람의 무릎 아래를 보여주는 카메라 쇼트가 바로 이곳에 있다. 그때 쇼트 안에 자리 잡는 건 '발'이라는 신체 끝의 미학, 부끄러운 장면에서는 이리저리 발목을 굴리고 툭툭 쳐보기도 하는 사소한 습관들이다. 

마치, 언제나 감정은 끝자리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인물이 누군가 대화하며 깊이 고민하는 장면에서, 그 어느 쇼트에서 카메라는 가상의 상대를 가정하듯 쇼트의 가장자리를 비워버린다. 비유하자면 두 명이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 속에는 한 사람만이 있으니 나머지 자리가 텅 비어있다. 사실 누군가와 대화하는 장면, 리버스 쇼트에서는 인물의 얼굴을 중심에 두는 게 정석인데도 가장자리로 밀어버린다. 그때 우리는 굳이 이 영화가 인물의 얼굴을 가장자리로 밀어내서 무엇을 얻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곧 우리는 방금 전에 보았던 소녀들의 발을 생각해 낸다. 무릎 아래에 살짝 걸쳐진 발걸음이 그 자체로 인물이 가야 할 길을 표현했듯이, 가장자리가 비어있는 그 장소에는 인물의 시선이 가야 할 곳이 있다. 쇼트 전체에서 텅 비어있는 쪽으로 우리의 시선이 향하게 되고, 영화는 그 다음 장면에서 대화하는 상대를 보여주지 않고 어떤 풍경을 보여준다. 어떤 풍경이냐면, 대화하면서도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두 인물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표로, 정말 엉뚱한 쪽에 시선이 내리 꽂힌다.
 

영화 <리즈와 파랑새>의 한 장면 ⓒ 디스테이션

  
악기와 발끝의 리듬 

영화를 보다 보면 인물의 대화보다는 시선에 집중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엄밀히 생각해 보았을 때 이러한 집중은 이입이라기보단 공감을 요구한다. 영화에서 인물이 대화하는 장면은 일반적인 배치와는 다르게 되어 있는데, 각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상태의 다음 쇼트에는 롱쇼트로 그들을 잡음으로써 관객의 감정이입을 방해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하고, 감정적인 동화를 끌어내야 할 영화가 오히려 멀리 떨어져 객관적으로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이 영화는 무성이라는 발레적인 특성에 점점 더 다가가게 된다. 언어로 곧바로 도달하지 않는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표정이나 손짓도 아니고,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와 발끝의 리듬이다. 

이를 소녀적이라고 한다면 소녀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만, 과연 소녀만이 에둘러 말하는 간접화법을 택하는 건 아니다. 세상 그 누구라도 직접 하기 껄끄러운 말은 돌려서 말하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로 홍상수를 논하는 것도 가능하다. 홍상수의 영화는 철저하게 대화하는 영화로써, 인물의 대화를 엿듣지 않으면 상황적인 맥락이 전혀 와 닿지 않는다. 여기서 그 대화는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그것, 단지 발화 말고도 신체의 언어와 사회의 언어까지도 포함한다. 하지만 반대로 야마다 나오코의 영화는 언어가 통용되지 않는 세계로, 단지 리듬으로만 무언가를 전하는 철저한 무성의 시대이다. <목소리의 형태>에서는 수화라는 것이 언어를 리듬화한 것이었고, <리즈와 파랑새>는 두말할 것도 없이 취주악이라는 리듬이 있다. 그리고 딱히 대화 없이도 리듬으로 인물의 관계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야마다 나오코의 영화는 유럽 영화의 방식을 그대로 가져오고 있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개인적인 면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일례로 <리즈와 파랑새>에서 나타나는 발의 메타포는 두 사람의 걸음걸이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데, 그 발이라는 것은 단순히 리듬뿐만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갈지도 결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가난한 블레이크씨가 관공서에 복지신청을 하러 갈 때의 카메라는 그의 모습을 수평으로, 옆에서 잡는다. 그때 블레이크 씨의 걸음은 마치 한 마리의 참새처럼 종종걸음인데 그 리듬감이 가난한 처지와는 사뭇 괴리되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말하자면, 그 영화에서의 발걸음은 발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일종의 하소연과도 같다. 그리고 <리즈와 파랑새>에서 그러한 종종걸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을 대신해서 리듬을 만들어 내는 악기의 연주 모습이 있다. 두 주인공 미조레와 노조미가 소꿉친구이지만 연주 실력이 다른 것처럼, 그들의 악기가 오보에와 플루트로 이원화되어 있음에도 결국에는 손으로 부는 관악기라는 것만은 동일하다. 그리고 그 관악기는 마치 피아노 건반처럼 리듬을 요구한다. 

당연하게도 영화 속에서 실력이 뛰어난 미조레가 노조미의 실력에 맞추어 '힘을 숨기다가' 합주를 망치는 대목은 그런 맥락에서 기획된 것일 테다. 주변 사람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며 콩쿠르 출전권을 포기하라고 넌지시 말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둘의 리듬이 앞서 나가거나 맞춘다는 점으로 완급 조절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 후에 밝혀진다. 동반자라는 것은 발걸음을 맞추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영화는 아주 대놓고 말해준다. 그도 그럴 것이 리듬이라는 형태로, 언어를 거치지 않아서 본의치 않게 완곡어법이 되어버린 두 소녀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대놓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영화 <리즈와 파랑새>의 한 장면 ⓒ 디스테이션

  
상하좌우의 관계

음악은 공연장 어디로나 울려 퍼지는데, 이들의 대화는 상하좌우가 명확하다. 영화가 인물의 관계를 다루는 만큼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쇼트-리버스 숏이라는 대화 장면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인물이 어느 방향을 바라볼지는 딱히 정해져 있지가 않다. 아마도 두 인물이 소통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시선의 방향을 일치하는 것이 좋을 텐데, 작품 중간에 들어 갈등이 일어나는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본래의 시선과는 멀어진다. 카메라는 점점 중심에 잡던 구도로부터 멀어져 가장자리에 인물을 내쳐버리고, 왼쪽 위 대각선으로만 이루어지는 대화가 왼쪽과 오른쪽으로 별 순서 없이 뒤섞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마치 그들이 서로의 눈을 피하는 것처럼, 특히나 발바닥 아래를 조명해 리듬감을 조성하는 장면은 흡사 고개를 떨구고 있다는 단절의 표시처럼 보인다. 

어쩌면 단지 사춘기의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을 이것은 요즘 사람들도 많이 겪는 일 중 하나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낼 것인가는 서로의 자존심에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자존심이 없는, 너무나 큰 이타심으로 자신을 낮추어 버리는 겁쟁이들에게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자신이 말을 꺼내면 이 아슬아슬한 관계조차 부수어 버리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상황이 있을 것이고, 대부분 영화에서는 어떻게든 대화를 시키고야 만다. 그러나 음악 영화의 매력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들의 대화는, 언어는 말이 아니라 음악이다. 그들의 말이 흘러나오는 곳은 입술이 아니라 입술을 대체하는 관악기의 끝이다. 그 관악기 끝에서 시작되는 화해의 리듬이 두 사람 주변을 맴돌기 시작할 때 마음의 동요는 정말로 시작된다. 

영화 초반에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서 미조레의 위에서 노조미가 투닥이던 쇼트는 영화 후반에 가서야 역전된다. "노조미를 위해서라면"이라는 말로 침묵을 택하던 그녀의 목청이 트이면서 진정한 재능이 개화하고 노조미는 그런 실력에 압도되어 취주악부를 그만두고 입시공부에 열중하게 되지만, 영화 초반의 쇼트가 반대로 노조미의 위에서 미조레의 발이 투닥이는 것을 보면 그녀들의 관계는 여전해 보인다. 말하자면 그녀들은 두 쌍으로 이루어진 대위법처럼 보인다. 소심하거나 대담하거나, 챙겨주는 게 배려라고 생각하거나 챙겨주는 걸 받아들이는 게 배려라고 생각하거나,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녀들은 연주하는 악기가 다르다는 차이점이 있고, 또 그런 게 합주라는 형식으로 합쳐진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화해를 말하는 방식은 오로지 선율이다. 
 

영화 <리즈와 파랑새>의 한 장면 ⓒ 디스테이션

 
​​​​​​​파랑새가 나오는 동화

영화의 원작제목이 악기를 울린다는 이름의 <울려라!>였던 것은 미숙한 실력으로 자꾸만 끊기는 그들의 연주소리가 아직 개화하지 못한 학창시절의 청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 <리즈와 파랑새>는 그것보다는 뒤쪽의 이야기로, 영화 속에 동화의 형식을 빌려 '놓아주지 못하는 자'와 '놓아지기 싫은 자'라는 두 가지 테마를 버무려 낸다.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도 사용되었던 이 메타포는 이미 날개가 돋아나 자신을 받아준 이를 떠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떠나기 싫어하는 자식의 마음과, 그런 아쉬움을 겪지 않으려 계속해서 붙잡아 놓으려 하는 부모의 마음이 결합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새장 속의 새가 아니라 새장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일 테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아무쪼록 '울려라!'가 아니라 '퍼져라!' 정도가 아닐까 싶다. 울려 퍼진다라는 형용사는 울리다와 퍼지다의 결합이고, 그것은 곧 '악기를 통해 나와야만 세상에 빛을 볼 수 있다'는 발화의 형식과도 연관된다. 원작이 '울려라'라는 말로 말하지 못한 말을 하라며 종용했던 것과는 다르게, <리즈와 파랑새>의 주제는 '퍼져라'라고 말하며 사람들 앞에 도달하기 위해선 그 소리가 나오는 발화부 앞을 떠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파랑새 쿄토 애니메이션 쿄애니 리즈와 파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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