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전 박태보가 갖고 있던 민주시민 기본 덕목

[동작 민주올레⑭]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 - 노량진길⑧

등록 2018.10.10 17:06수정 2018.10.1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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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내년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탐방은 총 6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상도길, 현충원길, 신대방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 연재를 마치고, 이번에는 '노량진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노량진 삼거리 - ②노량진 수산시장 - ③노량진역 광장 - ④옛 노량진경찰서(현 동작경찰서) - ⑤가톨릭노동청년회 - ⑥노량진 컵밥거리 - ⑦사육신공원 - ⑧노강서원 터 - ⑨노량진 나루터(노들나루공원) - ⑩한강인도교(한강대교)

노강서원, 민절서원, 사충서원

노강서원은 사육신공원이 있는 작은 봉우리 북쪽 면 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육신공원을 둘러본 후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내려가면 길 인도에 있는 '노강서원(鷺江書院) 터' 푯말을 어렵게나마 찾을 수 있다. 인도에 있는 가로등과 신호등 사이에 마치 숨겨놓은 듯이 설치돼 있다.
 

서울시가 설치한 <노강서원 터> 푯말 이 곳에 노강서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유일한 푯말인데, 쉽게 찾기 힘들다. 수락산 자락에 다시 세워진 연도도 1968년이 아닌 1969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 김학규


조선시대 사육신공원 주변에는 노강서원을 비롯해 3개의 서원이 있었다. 사육신이 죽은 지 200여 년만인 숙종 7년(1681)에 사육신을 배향하기 위해 세워진 민절서원(愍節書院)은 사육신공원 정상부에 있었다. 처음에는 민절사라는 이름의 사당만 있었으나, 숙종 18년(1692)에 편액·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으로 거듭났다. 지금도 당시 기둥을 세운 주춧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사충서원(四忠書院)은 사육신공원 대각선 건너편으로 노량진역 동남쪽에 있었다. 노론 4대신으로 불리는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를 제향하기 위해 영조 1년(1725)에 세워진 서원이다.

지금은 학원가가 자리잡고 있어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서울시가 세운 사충서원 푯말은 엉뚱한 데 있다. 한동안 사육신공원 입구에 표석 형태로 서 있다가 위치가 잘못됐다는 지적을 받자 이번에는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큰 길 건너편으로 노량진역을 지나 서쪽의 마을버스 정류장 앞에 설치했다. 사충서원 제자리 찾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조선전기에는 사육신이, 조선후기에는 박태보가


숙종 때 충신 박태보(1654~1689)를 기리고 모신 노강서원은 1695년에 처음 건립됐다. 박태보는 강직한 선비의 대명사로 통한다. 조선전기에 사육신이 있었다면 조선후기에는 박태보가 있었다. 박태보는 소론의 영수 박세당의 아들로 사극의 단골손님 장희빈이 살던 시대의 인물이다. 정선경이 주연을 맡은 1995년의 <장희빈>(SBS)에서는 탤런트 노영국씨가 박태보 역을 맡았다.

장옥정의 소생 윤(숙종 사후 임금에 오른 경종)을 원자에 책봉하고 장옥정을 희빈으로 삼으며 남인이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기사환국(1689) 후, 숙종이 이번에는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하려 할 때 박태보는 86명의 뜻을 모아 이에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소를 직접 작성했던 박태보는 속 좁은 숙종에게 혹독한 국문을 당하게 되고, 진도로 유배 가던 중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노량진에서 죽는다. 노량진에 노강서원이 들어서게 된 배경이다.

사람들은 스물네 살에 장원급제한 전도유망한 선비가 서른여섯 한창 나이에 죽음에 이르게 되자 이를 안타까이 여긴 나머지 '박태보 설화'와 고소설 직전 단계의 '박태보전'을 여러 버전으로 남겼다.

남중일색 박태보, '박태보 설화'를 남기다

'박태보 설화'는 해방이후 백악산인이 수집하여 <이조오백년야사>(1959, 삼문사 펴냄)에 아래와 같이 채록해놨다. 
  

《이조오백년야사》 표지(1959, 삼문사 펴냄) 1950년대 백악산인이 낸 《이조오백년야사》에는 박태보 설화가 전한다. ⓒ 김학규

"박태보의 별호는 정재(定齋)다. 그는 어려서부터 슬기로웠고 또 얼굴이 남중일색(男中一色)이었다. 참판 이종엽의 집에서 심부름하는 여인 하나가 그 아름다운 풍채에 반하여 염치를 돌보지 않고 정재의 유모에게 자기의 뜻을 말했다. 유모는 그 사정을 딱하게 생각하였으나, 그 수단으로서는 곧기 참대 같은 정재에게 차마 입을 열어 볼 수가 없었다. 그래 유모는 그런 이야기를 정재의 어머님에게 해 보았다. 그의 모친 역시 그런 여인의 생각을 동정은 했으나 아들을 움직여 낼 것 같지가 않아 남편 서계공(박세당)에게 아들을 좀 달래 보라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 부친이 여인에게 적원(積怨)하여 전정(前程)에 장해되도록 하지 말라는 훈계를 했으므로 정재도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여 그 여인과 한 번 동침한 일이 있었다. 그 뒤 여인은 정재의 양친을 뵈옵고 스스로 머리를 쪽져서 출가한 부녀처럼 하고 다녔다. (중략) 그런 가운데도 세월은 흘렀다. 정재는 그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에 올랐고 여인은 그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갔다. 그러자 민중전(인현왕후) 폐하는 소동이 일어나 상소하다가 화를 입고 정배 가는 도중 노량진에 이르러 정재가 숨을 모을 때였다.

어떤 여인이 와서 뵈옵기를 청한다기에 들이라 하여 보니 그 여인이었다. 정재는 멀어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여 겨우 손을 들어 여인의 손을 한 번 꽉 잡은 다음 그만 목숨이 다했다.

여인은 그 앞에서 눈물만 흘렸다. 한 번 청해 사랑받은 마음의 님을 뫼시기에 세상은 얼마나 쓰라린 것이었으랴. 가슴이 메어지도록 그리웠던 사람, 해도해도 다 못할 그 동안의 쌓인 이야기를 들어달라 한마디도 못해보고 간 님 앞에 눈물 밖에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었으랴. 울다가 여인은 일어나 나갔다.

그가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는 민후가 복위되고 정재의 사당이 필역되는 날 - 그러나 살아서가 아니었다. 눈에 스미도록 흰 소복을 하고는 사당 뒤 석가래에 목을 매어달아 싸늘하게 죽어갔다."


지금의 성평등 관점에서 보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지만, 그래도 애틋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는 뛰어난 재주에 잘 생기기까지 한 '절개 있는 선비'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후인들이 만들어낸 사랑이야기(love story)일 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박태보의 삶과 죽음을 다룬 고전 소설 '박태보전'에는 죽음을 앞둔 박태보의 이야기가 다르게 적혀 있다. 부인이 울며 머뭇거리자 "사나이는 부인의 손에서 죽지 않는 것이 예"라면서 물리치고 아버지 박세당이 보는 앞에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박태보 설화'와 '박태보전'의 공통점은 박태보를 '강직한 선비' '절개 있는 선비'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태보, 혹독한 고문 닥쳐오는 상황에서 동지 오두인을 먼저 생각하다

하지만 정작 박태보의 진면목은 다른 데 있었다. 박태보는 임금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소를 올린 후 이성을 상실한 숙종이 상소를 본 바로 그날 밤 대대적인 국문 회오리를 일으키려는 상황에서 최고 주동자로 몰려 체포를 앞둔 전 판서 오두인을 찾아간다. 오두인은 박태보보다 나이로도 서른 살 위였다.

그는 오두인에게 "글을 결정하고 상소문을 쓴 것은 모두 내 손으로 하였으니, 공(公)은 숨김없이 사실대로 이야기하여 임금을 속이지 마시오"(<숙종실록>)라고 말한다. 동지 오두인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동지를 먼저 생각하고 동지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놓치지 않았던 박태보. 오늘날 민주시민이 갖춰야 할 핵심 덕목의 하나인 '배려'를 박태보는 300년 전에 이미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숙종 앞에 끌려간 86인의 좌장격인 오두인으로서는 모든 책임을 박태보에게 미룰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숙종의 입에서 거친 말이 쏟아져 나오면서 "상소문을 지은 사람은 누구이고 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물었지만, 오두인은 "박태보가 집필하였고, 여럿이 서로 의논하여 지었습니다"라고 답변해 박태보에게 모든 일이 쏠리지 않도록 배려한다.

이는 함께 국문을 당한 이세화도 마찬가지였다. "오두인의 말에 의하면 박태보(朴泰輔)가 집필(執筆)하였다고 하는데, 상소문을 지은 사람도 박태보인가?"라고 압박을 가했지만, "박태보가 쓰기는 했습니다만 상소의 내용은 70여 인이 서로 의논해서 하였습니다"라고 말하며 버텨낸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일촉즉발 위기의 상황에서 보여준 박태보의 이러한 행동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박태보,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은 집안 내력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똑똑했을 뿐만 아니라 불의를 참지 못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박태보의 이러한 성격은 아무래도 집안 내력이었다. 소론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아버지 박세당은 조선의 주류였던 주자성리학을 다르게 해석하고 송시열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노론으로부터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자'(사문난적)로 몰려 유배되기도 한 인물이다.

할아버지 박정은 인조반정에 참여한 반정공신이었지만, 젊은 시절 사헌부에 근무할 때 다른 사람들은 쉬쉬하고 있는 데도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자 좌의정이던 김류를 상대로 "공의 자제가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은닉했다고 한다"라면서 거리낌 없이 논박한 인물로 유명하다.

아버지 박세당과 박태보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박세당과 박태보 사이에서는 이런 일화가 순조 때의 노론계 인물 심노숭의 '자저실기'에 전한다.

"하루는 두 사람이 충청도 직산에 있는 한 비석이 길 동쪽에 있는지, 길 서쪽에 있는지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다가 상대방을 설복하지 못하자 각자 따로 하인을 보내서 알아보게 했다고 한다."('자저실기', 심노숭)

이런 일화도 마찬가지로 '자저실기'에 전한다.

"부자가 모두 숫자 알아맞히기를 잘 했는데, 박태보가 마당에 있는 살구나무에 달린 살구를 가리키면서 '몇 개가 달렸다'고 말하니까, 아버지 박세당이 '아니다! 몇 개가 달렸다!'고 하면서 아들 박태보가 말한 개수보다 몇 개 적게 말했다. 부자간에 이를 둘러싸고 언쟁이 일어났다.

결국 하인을 시켜 살구를 다 따서 세어보기에 이른다. 결과는 일단 박세당의 승리였다. 박세당은 화를 내면서 아들 박태보에게 "억지로 아는 체하며 이기려고만 들면 안 된다!"고 꾸짖었다. 그런데 꾸중을 듣던 박태보가 벌떡 일어나 곧바로 살구나무 위로 올라가 나뭇잎 뒤에 숨어 있던 병든 살구 몇 개를 따가지고 내려왔다. 결국 박태보의 승리로 끝났다."


박태보의 이런 성격은 어려서부터 유명했던 모양이다. 박태보가 아이였을 때 하루는 박세당이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방의 장판이 송곳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놀란 박세당이 사연을 캐물으니 박태보가 "송곳으로 벼룩을 찔러 잡으려고 그런 건데 결국 잡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는 주변에 친구가 별로 없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아버지 박세당의 입장에서 보면 똑똑한 자식 박태보가 자신과 성격을 빼닮았을 뿐만 아니라 더 심하기까지 하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생의 선배로서 자신이 이미 겪었던 '고난의 길'을 아들 박태보가 똑같이 걷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도 간절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처럼 '내가 살아봐서 아닌데~"라면서 훈계조로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박세당은 박태보와 비슷한 처지의 인물 이야기를 찾아내 열다섯 살의 아들에게 시를 지어 보여준다. 박세당의 문집 '서계집'에 있는 '시태보(示泰輔)'라는 제목의 시다.

한 걸음 갈 적에 한 걸음 천천히 감을 잊지 마라 / 一步無忘一步遲
더디 감은 안온하고 빨리 감은 위태로운 법 / 遲行安穩疾行危
일찍이 머뭇거리며 사람들의 뒤에 처져서 갔으니 / 逡巡曾落人叢後
범씨의 아들이 바로 너의 스승이니라 / 范氏之兒是汝師


똑똑한 아들 박태보가 혼자 너무 앞서 가다가 화를 당할까 걱정하는 아버지 박세당의 마음이 읽힌다. 박세당은 아들을 쉽게 설득하기 위하여 '범씨지아(范氏之兒)'라는 중국 송나라 때의 고사까지 인용했다. 여기서 범씨는 중국 북송 시절 '악양루기'를 지은 인물로도 유명한 명재상 범중엄이고, 박태보가 자신의 스승으로 삼기를 바랐던 '범씨의 아들'은 범중엄의 아들 범순인(요부)이다. 고사의 내용은 이렇다.
 
범중엄이 둘째 아들 요부를 고향인 고소로 보내 보리 500석을 가져오라고 했다. 요부는 보리를 실은 배를 타고 귀가하는 길에 단양에 이르러 오랜만에 친구 석만경을 만났다. 그런데 석만경의 얼굴이 어두웠다. 근심어린 표정으로 사정을 물으니 석만경으로부터 "요 몇 년 사이에 부모와 아내를 잃었는데, 장례 치를 돈이 없어 겨우 가매장했을 뿐이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에 요부는 장례를 잘 치르라면서 보리 500석을 배 째로 내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요부는 아버지 범중엄에게 고향 소식을 전하면서 석만경의 어려운 처지를 말했다. 범중엄이 "그럼, 왜 보리를 주지 않았느냐"고 꾸짖듯이 묻자 요부는 "벌써 배 째로 주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고사는 '보리 배'라는 뜻의 '맥주(麥舟)'라는 한자성어로 전한다. 집안도 좋고 능력도 있고 잘 나가는 범순인은 이렇듯 주변을 챙기며 함께 가는 인물이었다. 범순인도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 등을 거쳐 후에 재상이 되었다.

수락산 자락에서 '박태보 정신'을 되새기다
 

수락산 자락에 다시 세워진 노강서원 노량진에 있던 노강서원이 6.25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후, 1968년에 수락산 자락에 다시 세워졌다. ⓒ 김학규

노강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였다. 한강이 넘치고 청파동 아래까지 물이 찼던 을축년(1925) 대홍수 때는 물에 휩쓸려 나갔지만, 곧바로 다시 건립되었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후에는 다시 세워지지 못했다.

그런 노강서원이 박태보의 무덤이 있는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 자락에 새로 세워진 것은 1968년의 일이다. 이미 도시화된 노량진에 다시 세울 수 없는 상황에서 반남 박씨 사패지가 있는 수락산 자락에 다시 세운 것이다. 수락산 자락에는 아버지 박세당의 무덤도 함께 있다.

노강서원이 노량진을 떠나게 된 것은 대단히 아쉬운 일이지만, 수락산 등산을 하면서라도 강직한 선비 박태보의 또 다른 측면인 '타인에 대한 배려'를 되새겨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그나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태보에게서 배우다 - 김학규
아깝다 태보여!
옳지 않은 일에는 항상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그대
어리석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온갖 고문 다 받고서
진도 귀양길에 노량진에서 스러졌네
 
사람들은
서른여섯 젊은 나이 그대 아까워
남중일색(南中一色) 애틋한 <박태보 설화> 남기고
강직한 선비 기리는 《박태보전》 남겼다네
 
우리는 그대 태보에게서
이제 다른 점을 배우고 있지
 
만사에 옳고 그름 분명하고
남보다 늘 앞서가던 그대 태보
'범씨의 아들이 바로 너의 스승이라'던
아버지 세당의 당부를 끝내 잊지 않았으니

그대 태보 86인의 연명받아 올린 상소
숙종의 폐부를 찔러 분노케 할 때
먼저 잡혀가는 판서 오두인에게 말했지
"글을 결정하고 상소문을 쓴 것은 모두 내 손으로 하였으니,
공(公)은 숨김없이 사실대로 이야기하여 임금을 속이지 마시오."
 
그건 만용도 아니고 소영웅주의도 아니었지
오직 동지를 먼저 생각하는 배려의 마음이었지
우린 이제 이를 일러
'박태보 정신'이라고 부른다네

(* 곧 [동작 민주올레] 동작지역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탐방⑮(노량진길  8회)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
#동작 민주올레 #노량진길 #노강서원 #박태보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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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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