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저유조 화재가 낳은 어둠과 빛

[주장] 경찰의 조급함, 언론의 혐오조장... 그럼에도 진짜 문제 따져물은 시민들

등록 2018.10.11 15:56수정 2018.10.1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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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이주노동 파견을 축하합니다. 수랏노씨 아들 슐레만. 산업 역군, 영웅이 되어 돌아오세요!"

1995년, 인도네시아에서 해외봉사단원으로 있을 때였다. 상점 간판도 흔치 않던 시골길에 걸린 펼침막은 무심한 사람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TV에서는 종종 한국으로 이주노동 떠나는 산업연수생들이 교육받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남자들은 해병대 상륙 돌격형 머리를, 여자들은 귀가 다 보이게 단발머리로 깎고 유격훈련을 받았다. 군인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훈련 중 신발이 벗겨져도 강행했을 정도로 훈련 과정은 엄격했다.

병영국가로 여겨졌던 한국, 이제는
 

산업연수생 출국 전 교육 모습95년 한국으로 이주노동을 떠나기 앞서 목봉체조를 하던 인도네시아 산업연수생들 ⓒ 고기복


  
예비 산업연수생들은 군대식 훈련을 독하게 받지 않으면 한국에서 견딜 수 없다면서 이를 악물고 진흙탕을 구르고 목봉체조를 당연시했다. 당시 인도네시아인들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병영 국가였다.

인도네시아뿐만 아니었다. 대부분의 산업연수생 파견 국가들은 선발 과정에서 군인 출신을 우대하고 군인처럼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다. 그들은 병영국가에서 견뎌내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나라가 지금은 경찰국가로 비치지 않을까 싶다. 호기심에 풍등을 날렸다가 방화범으로 긴급체포된 이주노동자를 보면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턱 하고 쳤더니 억 하고 죽었다'던 세상은 아직도 그대로 펼쳐지고 있는지 모른다.

경찰의 발빠른 대응에 야유가... 이상한 일

경찰의 발빠른 대응에 칭찬·격려 대신 조롱과 야유가 쏟아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 7일 오후 고양시에서 발생한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 저유시설 화재사고는 17시간 만에 마무리됐다. 사고 직후 경찰과 소방 당국,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가스·전기 안전공사 등이 참여하여 합동 감식을 실시했다.

설비결함이나 오작동 여부 등을 조사한 것으로 알려진 감식팀과 별개로 저유소 주변 폐쇄회로 화면을 확보해 조사를 진행한 경찰은 풍등을 날린 한 이주노동자를 중실화 혐의로 긴급 체포했다고 8일 발표했다. 이날 경찰은 풍등이 저유시설 잔디에 떨어졌고, 그 불씨에 의해 유증기에 불이 붙어 저유탱크가 폭발했다고 밝혔다.

당초 정확한 화재 원인이 나오기까지 최소 2주가 걸릴 것이라던 합동감식팀 발표와 달리 경찰 발빠른 발표와 피의자 체포가 이뤄졌다. 일견 칭찬받아 마땅했지만, 국가기간시설 안전 논란에 불을 지피는 결과를 낳았다.

중실화는, 고의성은 없지만 중대한 과실로 화재를 냈을 때 적용되는 혐의다. 그런데도 경찰은 소방당국을 배제한 채 화재 원인을 풍등에 의한 실화로 단정하고 발표했고, 그 결과 여론은 싸늘했다. 시민들은 피의자로 지목된 이주노동자가 '국가안보태세가 풍등 하나에 날려갈 정도로 허술했다, 우리나라 기간시설 실태를 알려줬다'면서 기관 책임자들을 추궁했고, 경찰 발표가 적절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여론의 역풍에 경찰의 구속영장신청은 인과관계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검찰에서 두 번이나 기각됐다. 경찰에 긴급체포됐던 이주노동자는 48시간 만에 유치장에서 풀려나 불구속 상태로 조사를 받게 된다.

경찰과 언론의 행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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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오전 경기 고양경찰서에서 장종익 형사과장(왼쪽)이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과 관련된 풍등과 동일한 제품을 공개하며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중실화 혐의를 받고 있는 이주노동자는 주거가 확실하고 증거를 인멸할 수도 없다. 경찰의 구속 신청은 처음부터 무리수였다. 화재 안전시설을 갖추지 않았거나 관리하지 않은 송유관공사에 대한 책임 추궁 없이 이주노동자를 긴급체포하고 성과를 자랑하듯 발표했어야 했는지 의문이다.

고양 저유소 화재사고 발생 원인을 둘러싼 이견이 분분한 가운데, 이 사고는 국가기간시설이 얼마나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는지 그리고 안전에 문제가 얼마나 크게 있는지 그대로 드러내 시민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 와중에 경찰은 실질적인 대주주인 재벌을 향한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라도 하듯 이주노동자를 피의자로 발표했다. 희생양을 만드려는 뉘앙스가 강한 경찰의 행태는 구태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불어 경찰 발표를 검증 없이 받아쓰면서 국적과 체류 자격, 월급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부정적인 논란을 키운 언론은 여전히 인권감수성에 무지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시민사회가 따진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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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 저유소에서 불이 나 최준성 대한송유관공사 사장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반면, 시민은 달랐다. 경찰의 피의자 긴급체포 발표 이후, 시민들은 촛불혁명에서 던졌던 질문, '이것이 나라냐!'를 외치듯 수사기관의 대응과 언론의 보도행태를 꼬집기 시작했다. 경찰에 대한 불신이 더 큰 원인이긴 하지만, 시민들은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뉴스로 책임을 전가해선 안된다는 사실을 분명히했다.

시민들은 화재 기관 책임자들과 경찰, 언론이 마땅히 던졌어야 질문을 제기하면서 이주노동자를 피의자로 단정 지은 행태를 규탄했다. 화재 발생에 따른 탱크간 안전거리, 자체소방시설의 작동 여부 및 적정성, 저유소 관련 법령의 적정성 등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철저한 원인조사와 안전관리를 주문했다.

경찰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주노동자들

경찰이 중실화 혐의로 이주노동자를 긴급체포한 이후, 이주노동자들은 숨을 죽이며 이번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대체로 풍등을 날린 행위 자체를 두둔하지는 않았지만, 공정한 수사가 진행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했다.

3년째 이주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L씨(캄보디아)은 스리랑카 이주노동자의 체포 소식을 듣고 한국사회에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공정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사장님이 우리에게 밤에 술 먹으면 안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장님은 술만 먹으면 밤에도 시끄럽게 해요. 무서워요."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D씨는 이번 사건을 대하는 경찰의 진위는 모르지만 "외국인들은 한국에서 항상 조심해야 해요, 잡혀갈 일을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하지만, 억울한 일이 있을 수 있다면서 "정말"이라고 강조했다.

고양 화재사고가 보여준 빛과 어둠

우리 사회는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인한 일자리 불안과 실업의 일상화에 놓여있다. 하지만 영세 제조업과 농어촌 지역은 만성적인 일자리 부족이라는 역설에 직면하고 있다. 내국인이 찾지 않는 일자리에서 묵묵히 내일을 꿈꾸며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바로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들이다.

실화 피의자 불구속을 위한 청와대 국민청원을 했던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는 11일 논평을 통해 "차별과 혐오, 편견이 없는 세상을 위해 이번 화재사고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라고 밝혔다.

고양 화재사고가 낳은 빛과 어둠. 외국인 혐오와 난민 혐오 정서가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시민사회가 직접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것이 빛이라면, 경찰과 언론이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드러냈다는 점은 어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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