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 알려드릴 테니 돈 좀 뽑아주실래요?"

[탈북청년 8] 평안남도 순천에서 온 송광현 이야기 (상)

등록 2018.10.13 11:22수정 2018.10.1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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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입국한 3만 명의 탈북자 중 대다수가 청년이다. 하지만 학교, 직장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는 '탈북'이라는 꼬리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큰 무게이다. 북한이라는 뿌리 없이 이들의 삶을 말할 수 없지만, 이제는 탈북자보다는 한국인 청년으로 불리고 싶은 7인을 만났다. 각 스토리는 <미디어눈> 에디터들이 탈북청년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기사에 사용된 이름, 나이, 지명은 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일부 수정이 있었음을 사전에 밝힌다. - 기자말

버스터미널 몰라 택시 타고 전주까지

"저기요, 돈 찾는 것 좀 도와주세요."

"네?"

"비밀번호 알려드릴 테니까 10만 원만 뽑아주시면 안 될까요? 처음 해봐서요.
아, 그리고 전주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해요?"

"아마 평택 터미널 가면 버스가 있을 거예요. 평택 터미널로 가보세요."

하나원을 한 달 먼저 나와 전주에 가 있는 형을 찾아가려던 길이었다. 분명 하나원(*북한 이탈 주민에 초기 정착을 돕는 기관)에서 이런 기계에서 돈을 찾을 수 있다고 배웠는데 막상 해보니 쉽지 않았다. 돈 찾는 기계(ATM) 앞에서 한참을 끙끙거리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서 간신히 돈을 찾았다. 


일단 돈은 뽑았는데 서울에서 전주는 어떻게 가고, 터미널은 무엇일까? 버스를 타라는 것 같으니 일단 타는 곳을 찾아봐야겠다.

"택시! 전주 가는 버스 타는 곳으로요."

"터미널 가려면 지하철을 타지 그랬어. 바로 앞에 지하철역 있구먼."

"아, 지하철이 있었어요?"

"어디 가려고 한다고요?"

"전주요."

"전주? 전주 가는 버스가 어디 있으려나…"

택시는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렸다. 지하철 타면 금방 간다던 터미널은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도움을 받을 길이 없었다.

"아저씨, 그냥 전주로 가주세요."

그렇게 택시로 서울에서 전주를 향해 달렸다.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하니 25만 원이 나왔다. 아까 찾은 10만 원에 지갑에 있던 15만 원을 모두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현금을 안 찾아 뒀으면 큰일 날 뻔했다. 며칠 지나서 서울로 돌아오는 택시비로 15만 원을 내고 나서야 바가지를 왕창 썼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별 수 없었다. 
 

은성 작가 ⓒ 미디어눈 은성작가

 
한국에서의 생존 법칙 '영어를 알아야겠구나'

8년 전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기억이다. 나는 평안남도 순천에서 온 송광현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정말 답답한 것 투성이었다. 길을 물으면 다들 터미널로 가라는데, 도대체 터미널이 무슨 말이람. 길 찾기는 둘째이고 "터미널"이란 말을 생전 처음 들어봤다. 터미널뿐 아니라 OO 빌딩으로 찾아오라는데 "빌딩"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고생한 적도 있다.

한 번은 머리를 자르고 싶어서 동네를 돌아다니는데 이발소가 한 군데도 안보였다. 한참 후에야 수많은 OO헤어들이 머리를 자르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렵게 찾아 들어간 미용실에서 "어떤 스타일로 해드릴까요?"라고 묻는데 "스타일?" 이건 또 무슨 말인지 답답했다. 북한에서처럼 "머리 모양"이라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쳐다봤다. 한국에서 살려면 영어를 잘해야겠구나! 가장 처음 익힌 한국에서의 생존 법칙이다. 

얼마 안돼 월급 250만 원을 받는 첫 일자리를 구했다. 아버지 150만 원 드리고, 남은 100만 원으로 생활하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중고차를 사고 난 뒤에 생겼다. 차가 생기니 주말이면 친구들과 마음 내키는 대로 놀러 다녔다. 이번 주는 정동진, 다음 주는 부산, 즉흥적으로 떠났다. 

여자 친구가 생기고 나선 2주에 한 번씩 전주도 내려갔다. 북한처럼 통행증이 필요하지도 않고, 누구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됐다. 대신 자유를 만끽한 대가가 만만치 않았다. 북에 남은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매달 드리기로 한 150만 원을 못 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애꿎은 카드사 직원하고 실랑이만 늘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이스피싱까지 당했다. 연체금이 오백만 원을 넘어갔다. 전화 요금까지 연체되어 핸드폰도 끊기기 직전이었다. 여기저기서 독촉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고객님, 이번 달까지 연체금을 입금하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주기 싫어서 그래요? 돈이 없는데 어떡하라고요!"
 

은성 작가 ⓒ 미디어눈 은성 작가

 

애꿎은 카드사 직원하고 실랑이만 늘어갔다. 전화기를 붙잡고 한창 실랑이 끝에 500만 원 중 150만 원을 먼저 갚고 나머지는 할부로 내기로 했다. 딱 150만 원만 해결하려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 150만 원만 빌려주세요."

"이놈아. 하다 하다 이제는 돈까지 빌려달라고 그러냐?"

"주기 싫으세요? 그러면 마음대로 하세요. 대신 왜 감옥에 갔느냐고 뭐라고 하지 마세요. 알아서 할 테니까."

"이 자식이 뭐? 내가 이러려고 너를 목숨 걸고 데리고온 줄 알아?"

"그러게 왜 나를 데리고 와서 힘들게 해요. 엄마랑 동생이랑 버리고 오게 하고. 누가 데려와 달랬어요?"

그렇게 아버지와도 한동안 연락을 끊었다. 지금도 철이 든 것 같지 않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8년 전 얼마나 아버지 속을 썩였는지를 깨닫고 있다. 처음 누리는 자유를 만끽하며 살았던, 철없던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이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두 번째로 깨달은 한국 생활 생존 법칙이다. 

화폐개혁으로 평생 벌어둔 돈이 휴짓조각으로

아버지와 내가 한국에 온 것은 2010년이었다. 그전까지는 평안남도 순천에서 살고 있었다. 순천은 평양에서 20km 떨어져 있다. 한국으로 치면 성남이나 안산 같은 수도권 도시다.

북한에 살던 당시 이미 국가 배급 체계는 무너졌고 주민들은 북한 체제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 더는 나오지도 않을 배급에 의존하지 않고 시장에 물건을 내다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장마당 세대"가 등장했고, 자기 노동으로 임금을 받으며 벌어먹는 일이 흔해졌다. 이전까지 북한 노동당에 들어가는 것을 성공이라고 믿었던 청년들은 현실을 깨달았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최고라는 인식이 퍼져갔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사실 우리 집은 장사를 해서 그나마 살 만했다. 시멘트를 사다 팔며 돈을 많이 모았었다. 그런데 2009년 화폐개혁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정부가 화폐 개혁을 하겠다고 통지한 지 1주일 만에 평생을 벌어둔 돈이 휴짓조각이 된 것이다.

화폐 단위를 조정해 10만 원을 천 원으로 바꾸는 개혁을 단행했는데, 문제는 한 가구당 바꿀 수 있는 돈은 10만 원까지였다. 나머지 돈은 국가에서 전부 몰수하는 것이다. 사전 안내도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 모든 일은 일주일 만에 벌어졌다. 장마당이 생기며 돈에 눈을 뜨는 사람들이 생기자, 이를 두려워한 김정일 정권의 묘수였다.
 

은성 작가 ⓒ 미디어눈 은성작가

 
평생을 모아두었던 돈이 사라졌다. 정부는 인심을 쓰는 것처럼 1인당 500원씩을 추가로 지급했다. 식구가 다섯인 우리 집은 2,500원을 더 받아 일주일 만에 전재산이 3,500원으로 줄었다. (한 집당 최대 환전 가능 금액은 천 원이며, 1인당 500원씩 다섯 식구가 2,500원을 더 받아 전 재산이 3,500원)  

2009년 화폐 개혁을 단행한 날, 쌀 1kg의 가격은 18원이었다. 그런데 시간 단위로 물가가 치솟기 시작해 저녁때는 30원, 세 시간 후에는 35원, 다음날이 되니 100원, 다음날 점심에는 120원으로 올랐다. 2010년 7월 내가 탈북한 그 해 마지막으로 보고 온 쌀 가격이 1,050원이었다. 집 전 재산이 3,500원인데 쌀 1kg이 1,050원인 것이다. 

한 끼 먹기 위해 안간힘

속으로 욕이 나오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는다. 아니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체제에서 평생을 살아왔어도 인간으로 느껴지는 억울함과 분노가 있었다. 말을 안 할 뿐 이미 김정일 개××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북한 주민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올라왔고 더는 국가를 신뢰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주민들의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 정부는 꼭 총대를 멜 한 사람을 내세운다. 그때도 화폐 개혁을 멋대로 주도했다는 혐의로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이 총살을 당했다. 하지만 북한 체제에서 김정일 결재 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다 아는 일이다. 북한 주민도 그런 쇼를 믿지 않는다. 

북한 정부의 감언이설을 믿지 않는 청년들의 희망은 부자가 되는 것이다. 군대나 대학교에 가지 않은 청년들은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나섰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한 끼 먹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가장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은 노력(노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막노동으로 돈을 번다. 우리 동네에는 시멘트 공장과 가구 공장 단지가 있는데, 거기서 어떤 사람은 조립을 하고 어떤 사람은 도장(塗裝)을 하고 어떤 사람은 만들어진 완성품을 운반하는 일을 한다.

물건을 운반하는 방법도 소득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차로 운반하는 사람이 있고 구루마(리어카)에 싣고 가는 사람도 있고 몸으로만 지고 운반하는 사람이 있다. 청년들은 이런 일에 투입된다. 이렇게 하루 종일 일하고 받는 일당은 쌀 1kg도 안 된다. 이 쌀 1kg으로 네 식구의 하루 식사를 책임져야 한다. 죽어라 일해도 한 끼도 해결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도 별의별 일을 다 해봤다. 가구도 만들어보고, 꽃게잡이 배도 타고, 아버지 따라 장사도 나갔다. 아버지가 탈북을 생각한 것도 나의 고생을 보면서 시작된 것 같다. 

<다음화에서 계속>

취재. 글: 조은총 에디터   l 삽화: 은성 작가
 

탈북청년 토크콘서트 ⓒ 미디어눈

* 10월 LINK(Liberty in North Korea)와 함께 영화 '장마당세대' 상영과 탈북청년 취재원들이 참여하는 LIVE 토크콘서트를 엽니다. 신청: https://goo.gl/forms/FdqicRyfOKJ48u6V2
덧붙이는 글 미디어눈 팀 블로그에도 연재중입니다. https://brunch.co.kr/@medianoon/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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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눈 #탈북청년 #탈북 #청년 #장마당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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