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애국자는 애가 셋? 국가의 대답을 원한다

[주장] 여성은 그냥 여성일 뿐이다

등록 2018.10.15 20:38수정 2018.10.15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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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지난 9월 5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소득주도성장 대신 출산주도성장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 남소연


"엄마, 나 요즘 계속 컨디션이 안 좋아. 약을 먹어도 똑같네."
"시집가서 애 낳으면 다 고쳐져. 얼른 시집가."
 

사남매를 키운 엄마와 내가 나누는 흔한 대화이다. 엄마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불치병 환자다. 32살이며 8년째 비혼(非婚)이기 때문이다. 40년 후에도 내 결혼관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가끔은 바꿀 수 있는 구체적인 기회가 기다려지기도 하지만). 노산(老産)이 병을 고친다는 엄마의 입장이 의학적인 견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구글링(Googling)도 못했다.

나는 엄마의 권리를 존중한다. 엄마는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내 소중한 권리도 사용한다. 바로 묵비권. 출산 무경험자로서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는 것이다.

물론 엄마가 아닌 사람이 출산에 관여하는 순간, 난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든 고소인이 될 준비가 돼 있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얼마 전 피고소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지금에서야 알아챘지만 피고소인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그 이름은 '국가'다.

시대착오적인 출산력 조사
 

8월 31일 SNS에 공개된 출산력 조사 안내문 ⓒ 트위터

    
올해 7월 6일부터 9월 15일까지 시행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하 보사연)의 '2018년 전국 출산력 및 가족 보건·복지 실태조사(이하 출산력 조사)'와 관련해 여성비하 논란이 있었다. 지난 8월 말에 한 SNS 이용자가 출산력 조사 안내문을 공개했고, 보사연 홈페이지에는 나흘 만에 비판 게시글이 600건 넘게 달렸다.

논란이 불거진 이유는 이렇다. 첫째, 여성비하적인 조사명칭이다. 출산력(出産力)은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 생물학적인 능력을 의미해 여성을 출산 도구로 인식한다. 둘째, 개인정보 노출 위험이 높은 조사방법이다. 조사원은 조사할 대상이 집에 없으면 현관문에 출생연도와 '출산력 조사 대상'이라고 적힌 안내문을 붙여놓는다. 이런 조사 방법은 가임기 여성의 경우 거주지가 범죄에 악용될 우려가 있다.

셋째, 시대착오적인 조사내용이다. 조사표 5번 설문 문항의 경우 '남편이 할 일은 돈을 버는 것이고 아내가 할 일은 가정과 가족을 돌보는 것이다', '아이는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잘 키울 수 있다' 등 가부장적인 부부 역할이 선택지로 제시되고, 전통적인 성 역할관 프레임에 갇혀 결과가 도출된다.
  

보건사회연구원 홈페이지 게시판에 접수된 출산력 조사 비판 게시물 ⓒ 보건사회연구원 홈페이지

 
여성들은 출산력 조사로 여성을 아이 낳는 기계로 취급했다고 비판했고, 보사연은 3년 후 차기 조사에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해 조사명칭과 내용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조사에는 왜 좀 더 일찍이 시대정신이나 성 평등에 대한 감수성(Gender Sensitization)이 반영되지 않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적극적인 사과와 해명은 보이지 않고, 개선도 3년 뒤로 미뤘다. 사실상 '3년 후 조사에서 절대 이런 표현과 조사 방법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은 없었다.

보사연은 9월 4일 보도자료를 통해 "용어에 대한 거부감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니만큼 대체 용어 선정에는 적극 나서겠으나, 조사 중에 당장 조사명칭과 조사 내용을 변경하는 것은 어렵다. 차기 조사에서는 통계청 승인이 유지되는 범위 내에서 가구방문 면접조사의 대안을 모색해 보겠다"고 밝혔다. 밀봉한 조사표를 우편함에 넣고, 새로운 조사 문항을 개발한다는 개선안이 미봉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것들은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다. 나는 '출산력 조사는 향후 폐지됩니다'라는 국가의 대답을 원한다. 폐지 이유를 알기 전에 '출산력 조사'에 대해 알아보자.

인구가 곧 국력이라는 옛말

출산력 조사는 1964년부터 실시됐다. 이 조사는 3년마다 출산 행태 변화와 요인을 분석해 정부의 인구정책, 가족보건정책, 가족복지정책을 수립하는 목적으로 시행됐다. 국가 경제 및 복지 정책을 수립하는 데 여성들의 출산 의사와 가족에 대한 인식을 조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여성의 존재를 출산과 양육에 고정시킨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결과적으로 국가는 출산력 조사를 통해 여성의 출산에 개입하게 된다.
  

70년대 산아제한 캠페인 포스터 ⓒ 보건복지부

 
출산정책으로 여성의 몸을 통제해온 우리나라의 역사는 산아제한이 논의된 1950년대 후반부터다. 그리고 1960년대에 가족계획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출산에 대한 책임을 개인과 가족으로 이전시켰다. 40여 년 전에는 산아제한이 주제였다.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남녀 인구수의 불균형이 문제가 된 적도 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이 구호는 3명 이상의 아이를 가진 엄마들을 애국심이 없는 사람들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저출산으로 인해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고 경제성장이 둔화된다는 위기가 공론화됐다.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지자체별로 출산지원금도 준다. 양성평등 TV 광고를 제작해서 아빠도 육아에 참여해야 한다고 홍보한다. 출산력 조사에서 아동수당까지, 이 모든 정책은 국가가 여성의 출산을 유도하거나 관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외교, 국방, 경제, 복지 등 다양한 정부 사업 중에 왜 하필 출산이 중요한 정책 사항이 되었을까? 이런 발상은 중상주의가 지배하던 절대왕정과 근대국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구가 곧 국력이라는 프레임을 반복하는 것이다.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는 <인구론>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는 인구 수준은 먹고 사는 것과 비례하며, 자연적인 출생과 사망 외에 생산주체인 여성을 통해 인구를 조절할 수 있다고 본다. 21세기의 출산정책은 아직 맬서스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이 관점은 현실적으로 폐기되었다. 이미 세계의 식량 생산량은 지구인 전체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다. 지구에 기아에 시달리는 빈곤층이 있는 것은 식량 분배의 문제이다. 사람이 먹을 것을 소가 먹고, 일부 사람들이 그 소를 먹느라 굶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현재의 분배 상황을 설명한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200년 전 인구관을 내세운다. 지금의 시장 주체와 국가는 인구가 늘면 경제 성장이 가능하고, 인구가 줄면 경제 성장이 멈출 것이라고 말한다. 심한 경우 망국까지 언급하면서.

인구가 줄면 경제 성장이 멈출까? 혹은 인구수는 곧 경제 규모로 이어질까? 우리는 한국보다 인구가 적은데도 1인당 GDP가 높은 나라들을 알고 있다. 캐나다만 해도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보다 인구수가 1486만3851명 적지만 1인당 GDP는 1053억이 많다.

인구가 많을수록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것도 아니라면, 인구와 경제성장의 인과관계는 실재하는 것일까? 소득주도성장이든 혁신성장이든, 그것이 인구랑 무슨 연관이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인구가 줄어 경제활동인구가 축소되고, 저출산·고령화 문제로 청·장년층의 부양 부담이 늘어난다고 한다. '출산하라'는 이 시대의 정언명령인 셈이다.

돈으로 해결하려는 저출산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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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수당' 사전 신청이 시작된 지난 6월 20일 시민들이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06년부터 올해까지 12년간 정부에서 저출산 정책에 사용한 예산은 150조 원이다. 9월 21일부터는 저출산 정책의 일환으로 아동수당이 지급됐다. 아동수당은 아동 양육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고 아동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제도로, 아동 빈곤 해소와 아동 행복 추구를 위해 기본적으로 지원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이 제도의 도입 배경에는 떨어지는 출산율을 올리겠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유주헌 보건복지부 아동복지정책과장은 6월 8일 정책브리핑 기고 내용에서 "저출산 현상 심화에 따라 아동 한 명 한 명을 제대로 키우는 것이 중요한 만큼 아동에 대한 투자 확충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라고 말했다. 심지어 아동수당이 저출산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과잉복지'라는 논란도 있다. 저출산 문제에 아동수당으로 접근하는 것은 제도의 본래 취지와 맞지 않다.

사람들은 묻는다. '한 달에 10만 원을 지원해 준다고 아이를 낳을까?' 2인 이상 가구 기준 소득 수준 90% 이하 만 0~5세인 0~71개월 아동은 매월 10만 원씩 아동수당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질문 하나를 더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아이를 낳으라고 돈을 주는 것이 맞을까?' 아이를 낳는 최후의 결정은 온전히 여성에게 달려있다. 그 결정도 개인의 몫이다. 가족이 협조할 수는 있으나 낳는 결정은 여성이 하는 것이다. 즉, 출산은 국가나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국가 경쟁력을 위해 여성에게 출산 책임을 부여하는 것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

아동수당은 태어난 아이들에게 지급하는 것이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쓰이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대에 따라 국가는 경제 발전이나 인구관리라는 목적으로 출산에 개입해왔다. 가족계획부터 저출산 대책까지 여성의 몸은 관리 대상일 뿐이었고, 여성의 자율성도 존중받지 못했다.
  

2016년 12월 29일 행정자치부가 공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 사이트. '가임기 여성인구수' 통계 수치와 지역별 순위를 표시해 논란이 됐다. ⓒ 행정자치부


출산력 조사가 50년 동안 바뀐 사회적 인식을 반영 못했다는 논란은 어쩌면 유별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2년 전 행정자치부가 발표한 '가임기 여성 분포도'의 여성도 아이를 낳아야 하는 존재였다. 최근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신생아 1명당 20년간 총 1억 원을 지원한다고 조건을 내걸어 '출산주도성장'을 주장했다. 출산을 국가성장도구로 보는 인식이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책논리로 깔려있다.

여성의 출산, 강요에서 선택으로

그런데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과 '낳아야 하는 것'은 다르다. 여성은 왜 출산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을까?
  

8월 22일 통계청이 발표한 '6월 인구동향' 보도자료의 합계출산율 ⓒ 통계청

 
올해 처음으로 '출산율 0명대'가 현실화된 한국. 저출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싶다면 더 이상 여성이 책임지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서 낳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낳고 싶어도 낳을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두 자녀를 둔 여성 A(39)씨는 맞벌이 부부지만 '독박육아'를 하고, 남성 B(38)씨는 육아비용이 부담돼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 낳을 생각이 없다고 한다. 국가는 정책논리를 앞세우기보다 저출산의 근본 원인에 집중해야 한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김상희 부위원장은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초저출산 현상에 대해 "국가가 '아이를 왜 안 낳느냐'고 할 일이 아니라 '아이 낳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출산을 권하는 나라에서 여성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을 무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페미니스트의 '낙태죄' 폐지 운동도 여성이 임신중단을 선택할 수 있다고 알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형법 269조의 낙태죄든 출산력 조사든 여성의 몸을 국가가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출산은 여성의 선택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는 국가가 아닌 여성에게 있다. 출산의 고통과 독박육아의 고충이 뭔지도 모르는 국가가 어떻게 아이를 낳으라 말라 하는지. 우리 엄마는 네 번이나 진통을 겪고 키워서 잘 알겠지만, 엄마가 간섭해도 내 임신과 출산은 내가 결정할 것이다.

이제 아이 셋을 낳으면 애국자라고 한다. 그럼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은 비애국자이거나 국가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사람이란 말인가? 여성은 그냥 여성일 뿐이다.
#출산력조사 #저출산 #아동수당 #비혼 #가임기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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