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과 마늘 때문에 사형선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아내의 죽음

[박만순의 기억전쟁] 정혜열가 이야기 ② '좌익활동' 이유로 국가폭력의 희생양 된 부모

등록 2018.10.21 11:26수정 2018.10.2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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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8일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원. 재판에 나온 수십 명의 피고는 모두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위반'죄를 범한 자들이다. 즉, 부역(附逆) 혐의자들에 관한 재판이다.

검사 김○○이 피고 이정기(여, 41, 충남 공주군 계룡면)에 관한 범죄사실을 이야기했다. "피고는 6.25 발발 후 인민군이 남하했을 때 공주군 계룡면 여성동맹위원장을 맡아, 150명의 부녀자를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또한 주민들로부터 고추장, 호박, 마늘을 강제로 징수해 인민군에게 제공했다." 즉, 북한군에게 식량을 제공해 남침을 용이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어진 구형은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이에 사형에 처하길 바랍니다" 판사는 검사의 구형을 곧바로 선고했다. 주민들로부터 고추장, 호박, 마늘을 걷은 것이 사형을 선고받을 만큼의 죄인가? "전쟁 때인데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이런 황당한 재판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정기 판결문고추장, 호박, 마늘 걷었다고 사형선고한 판결문 ⓒ 정혜열


이정기는 원래 평안북도 철산군 차안면 유정리 출신으로 1909년생이다. 그의 남편은 정상윤으로 일본 명치대(明治大) 3년 재학 중 국내에서 신간회 결성을 주도했다. 그는 신간회 평북 철산지회 결성과 관련해 일제에 검거되어 18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이정기는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고, 일제강점기 내내 남편의 응원자 역할을 자임했다.

해방 후 정상윤은 현재 공주시장 격인 공주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정치운동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 수립 후에 좌익이 본격적인 탄압을 받았고, 그는 1949년에 검거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50년 6.25 발발 직후 대전 산내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 집단 학살되었을 때, 정상윤도 그 대열에 끼였다. 이런 와중에 북한군이 남하했고, 정상윤의 아내인 이정기가 계룡면 여맹위원장을 맡게 된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여맹위원장을 맡은 것이 공주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공주형무소에 수감된 이유다.

보따리 이고 계룡산 넘어
   

이정기젊었을 때의 이정기 ⓒ 정혜열


공주형무소는 한국전쟁 당시 충남 공주시 교동 3번지에 위치했다. 형무소는 북한군 점령 당시 미군 폭격에 의해 공장 건물 1동(약 50평)과 창고 건물 1동(약 20평) 및 주벽(周壁)을 제외하고 모두 파괴되었다.

이처럼 형무소에는 재소자를 수용할 감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장과 창고 건물을 개조하여 공주지역의 부역혐의자 200~300명을 수용하였다. 수감된 재소자들은 가마니를 깔고 덮으며 생활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집단 수용되었다.

재소자들은 열악한 수용시설과 식량·의약품의 심각한 부족으로 아사(餓死), 병사(病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재소자들은 지서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 고문과 가혹행위로 인해, 수감과정에서 사망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또한 1·4후퇴 직전 전염병인 장티푸스가 발병, 수많은 재소자와 간수들이 고생했다.(진실화해위원회,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재소자 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이런 상황에서 중공군의 참전으로 대한민국 군·경이 다시 후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들도 대전을 경유해 부산형무소로 이감되는 방침이 정해졌다.

어머니가 남쪽으로 이송된다는 소문을 들은 정혜열(당시 18세)은 헐레벌떡 공주형무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는 전쟁 초기에 학살되고, 어머니를 면회할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무남독녀인 그에게 가족이라고는 할머니밖에 없었으나, 연로해서 동행할 수 없었다.

부역 혐의로 수감되었던 형무소 재소자들이 광목천으로 손이 묶인 채 트럭에 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정혜열은 마침내 어머니를 찾았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어머니가 장티푸스에 걸려 얼굴이 반쪽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가움과 서러움이 겹쳐 "어머니"하고 외쳤지만, 어머니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숙인 얼굴을 약간 들기만 했다. 어머니는 이제 자기가 가는 곳이 '황천길'인 것을 아는지, 딸을 향한 눈매가 안쓰럽기만 했다. 하지만 정혜열은 어머니가 황천길로 가는 트럭을 탄 것이라고 당시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몇몇 사람들이 면회를 왔지만 누구도 재소자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고, 트럭 네 귀퉁이에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경비를 섰다. 고개를 약간만 들면 군인들은 개머리판으로 재소자들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혜열은 어머니를 다시 부르지도 못하고, 트럭이 출발하는 모습만 바라보았다.

공주형무소 간수한테 재소자들이 대전형무소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정혜열은 보따리를 이고 계룡산을 넘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곳에 없었다. 이미 남쪽으로 이송된 후였다. 이정기는 부산으로 남하하는 도중 김천 방면에서 군인들에 의해 학살되었다.

재산을 지키려고 안간 힘... "사회주의자 딸인 게 죄냐?"
 

정혜열어머니의 사연을 증언하는 정혜열 ⓒ 박만순


"무기 어디다 숨겼어?"

어두컴컴한 밤에 옆 빈집으로 끌려가는 정혜열의 마음은 덤덤하기만 했다. 앞서 가는 이는 마을 우익청년단원으로 어깨에는 M1총이 메어 있었다. 빈집에 들어서자마자 청년은 다그쳤다.

"무기 어디다 숨겼어?",
"무슨 말이에요?"
"인민군이 너네집 어디에 무기를 숨겼느냐 말이야! 너, 내 말 잘 들으면 살려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줄 알아!"


청년의 황당한 소리에 정혜열은 기가 막혔다. '이놈 속셈이 뭐지? 오호라 괜히 시비를 걸어 우리 집 재산을 뺏으려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움칫했던 마음이 펴졌다.

정혜열은 청년이 겨눈 총구에 가슴을 들이대며 큰소리로 외쳤다. "너 같은 쓰레기한테 목숨 구걸하지 않아. 쏘려면 쏴!" 전쟁 와중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그의 입장에서 겁날 게 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당당해지자는 게 당시 심정이었다.

정혜열의 당찬 태도에 청년은 총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청년의 모략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경천지서로 끌려갔다. 지난번 청년과 마을 구장, 또 다른 한 청년이 경천지서에 정혜열을 고발한 것이다. 이들의 속셈은 할머니와 살고 있는 정혜열네의 토지와 재산을 가로채려는 것이었다. 정혜열은 결혼하지 않은 막내삼촌하고 같이 살았지만, 삼촌은 청각장애자라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서에 끌려갔지만 별 혐의점이 없어 곧바로 풀려났다.

하지만 구장을 포함한 소위 '3인조' 날강도들의 모략은 지속되었다. 이번에는 계룡면에 있던 CIC(특무대) 사무실로 끌려갔다. "학생이 빨갱이 활동을 했다는 제보가 있어 조사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CIC대원은 젊은 학생이었다. 정혜열은 "우리 아버지는 일정 때 일본 명치대(明治大)에 유학한 사람이다. 거기에서 맑스주의를 배워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일정 때는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사회주의 활동을 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그분의 딸일 뿐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사회주의자의 딸인 게 죄냐?"라고 말했다.

그의 당당한 태도에 놀란 CIC대원은 정혜열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다음 날 귀가시켰다.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정혜열이 아무 일도 없이 CIC에서 풀려나자 3인조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육군첩보부대인 HID에 다시 밀고했다. 정혜열은 HID에서도 CIC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응했다. 정혜열의 이야기를 들은 HID대원은 '거짓으로 고자질한 놈들 버릇을 고쳐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을까지 따라온 HID대원은 우물가에서 고자질한 청년을 사무실로 연행했다. 다음 날 HID사무실로부터 호출을 받은 정혜열은 무릎 꿇은 채 비굴한 얼굴을 하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아야 했다. "야, 이 자식아. 이 학생한테 사과해",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무고(誣告)했다가는 죽을 줄 알아!" 이 싸움은 정혜열의 한판승으로 마무리되었다.

부모가 남겨준 재산을 지키는 일은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 무남독녀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졸지에 천애고아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아버지가 해방 후 좌익활동으로 국가폭력의 희생양이 된 것은 역사의 비극이다.

그런데 어머니 이정기의 죽음은 더욱 비극적이다. 여맹위원장으로서 고추장, 호박, 마늘을 징수했다고 사형선고를 받았으니 말이다. 물론 적법한 절차에 의한 사형집행도 아니다. 1.4 후퇴 시기에 불법적으로 집단학살당한 것이다. 아무래도 이정기의 판결과 죽음에는 남편의 전력이 작용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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