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17 14:32최종 업데이트 18.10.17 14:32
 

조선총독부.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제국주의자들의 식민통치 방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군사력과 자본을 투입하는 것은 상식적이고, 종교는 물론 심지어 아편, 창기, 유곽까지도 이용했다. 영국은 중국에 식민지를 개척할 때에 주로 아편을 이용하다가 아편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일제는 조선 식민정책으로 아편과 창기, 매춘을 통해서 조선 청년들의 심신을 파멸시키려고 하였다.


먼저 아편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일제가 조선에서 아편을 유통시키고 대량의 아편 중독자를 만들어내는 데는 중국인들의 역할이 필요하였다. 영국과 중국의 아편전쟁 과정을 지켜보아온 일제는 영국과는 달리 지극히 노회한 수법으로 조선에 아편을 보급시켰다. 중국인들을 통해 조선에서 아편을 판매하고 유통시키도록 한 것이다. 

처음에 중국 상인들은 점포에 아편 흡수 용기를 벌여놓고 행인들에게 장난삼아서 흡입토록 권장하였다. 마치 요즘 맥주나 음료수의 시음장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아편 흡수가 곧 중독되는 것은 정해진 순서였다. 

조선총독부는 서울ㆍ부산ㆍ대구ㆍ평양ㆍ인천 등 대도시를 비롯한 전국 각 도시에 중국인들이 백주에 공공연히 판매하는 아편흡수기를 방임할 뿐만 아니라, 아편 수입으로 인한 재화의 해외 유출을 우려하여 국내에서 양귀비의 재배를 묵인, 장려하였다.

아편이 인체에 치명적인 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선인들은 총독부의 묵인하에 아편을 피우거나 주사용기를 통해 추입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이것은 크게 전파되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나라 잃은 아픔에다 계속되는 일제의 수탈과 탄압, 직장이라 해도 급료가 일본인에 비해 4분의 1 이하인 차별대우 때문에 극심한 좌절감과 상심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처지에서 아편을 통해 순간적인 향락으로 자포자기에 빠진 아편 상습자, 중독자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리고 마을마다 아편의 원액을 생산하는 양귀비 재배가 아무런 단속없이 이루어졌다.

아편이 조선인들의 심신만을 파멸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 거주 일본인들도 아편을 피우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물론, 아편에 중독된 조선인들은 고가의 아편값을 마련하기 위해 잘사는 일본인 집을 습격하는 일이 잦아지고, 이 때문에 일본인의 생활이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중국 상인들이 점포에서 행하던 공공연한 아편 시음행위를 폐쇄시키는 등 단속을 하는 척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양귀비 재배와 아편 원액의 거래는 방치하거나 외면하였다. 조선 청장년들의 심신을 파멸시키고 퇴폐적이 되도록 하는 것이 총독부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또한 조선인들의 심신을 파괴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창기와 유곽을 적극 권장하였다. 

미국의 유명한 일간신문 <시카고 트리뷴>은 1919년 12월 26일자 사설에서 일본의 조선 식민정책에 대해 "일본이 조선에서 한 일 가운데 가장 훌륭하게 해낸 일은 유곽의 증설이다. 이것은 일본이 의도적으로 조선인 남녀를 타락시키고자 한 것이다"라고 비난한 바 있다. 이 사설의 지적처럼 일본 군대와 낭인과 함께 가장 먼저 조선에 자리잡고 활동한 것 중에는 창기와 유곽이 있었다. 

창기란 우리의 전통적인 기생과는 달리 갈보, 매춘부, 매소부, 창부, 창녀, 매음녀, 논다니 등을 포괄하는 명칭으로 해석되는, 매춘을 전업으로 하는 창녀와 같은 것이었다. (양태진, '일제잔재 매춘ㆍ유곽', <일제 잔재 19가지>).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기생제도가 있었지만, 이것은 매음과는 전혀 다르고, 매음 행위는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일제는 1904년 10월 서울 쌍림동에 제일루라는 유곽을 만들었으며 병탄과 함께 공창제도를 만들고, 초기에는 일본 여성으로만 구성하다가 차츰 조선 여성들로 대체하였다. 

공창제도가 시작되면서 창녀촌과 유곽이 날로 번성하여 전국 각지에 생겨났다. 서울에서는 지금의 충무로 인근 쌍림동과 용산구 도원동, 마포구 일대, 다동, 도림동, 아주개, 종로, 소공동, 구리개, 황토현 등지에 산재해 있었다. 

부산에도 도심지는 물론 항구에 많이 들어섰다. 창녀촌과 유곽이 늘어나면서 각종 성병이 만연하고 국민의 윤리도덕이 날로 퇴폐하였으며, 청장년들의 유곽 출입으로 가정파탄이 끊이지 않았다. 곳곳에서 창기조합이 결성되어 관헌의 보호를 받는 기이한 현상도 있었다.

총독부는 1916년 3월 31일 경무총감 부령 제4호(창녀취체규칙)를 발포하여 공창제도를 합법화시키면서 이를 적극 보호하였다. 총독부가 창기 조합까지 결성하면서 이것을 '보호 육성'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①조선의 전통적인 윤리도덕을 파괴함으로써 일본에 동화시키며 ②망국지한(亡國之恨)의 울화에 견디지 못하는 우국지사들을 청루로 끌어 들이고 ③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청년자제들을 주색에 빠뜨리려는 계략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요정과 유곽, 매음굴이 수천 군데가 생기고, 땅을 빼앗긴 조선인 여성들은 생계 수단으로 유곽으로 모여들어 대도시는 물론 지방 도시에까지 창녀촌이 번창해 갔다. 

조선총독부의 이와 같은 추잡한 '인육시장' 보호정책은 다른 어떠한 억압이나 고문, 재산상의 수탈에 못지 않은 잔학하고 악독한 행위였다. 뒷날 일본군 성노예(위안부)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우국열정이 넘치는 박재혁은 이같은 참담한 현상을 지켜보면서 거듭 일제 타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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